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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azil(1985)

posted Apr 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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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고 진로를 모색하던 해에, 기자 선발시험에 응시한 적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실기시험이었는데, 영등포 시장에서 두 시간 내로 3분짜리 스트레이트 기사를 써오라는 문제였지요. 저는 시장 주변의 노점상 실태를 취재했습니다. 단속에도 불구하고 자리를 옮겨 다니며 인도를 거의 다 차지하고 있는 노점상들은 보행자들에게 불편과 위험을 끼치고 있었으며, 합법적으로 세금을 내면서 점포를 운영하는 인근 상인들의 불만도 컸습니다. 다른 한 편으로는, 노점상들이 경제적 약자라는 사실이 있었죠. 어차피 보도되지 않을 시험답안에 불과했지만, 저는 제 기사가 어느 쪽에 비판의 칼날을 맞춰야 할지 고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법이 지켜지지 않는 현장을 보았으므로 그것을 고발하면 족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경제적 약자인 노점상들의 불법행위를 비난하는 걸로 기사를 마무리하기는 불편했기 때문에, 저의 기사는 경찰의 단속이 형식적이고 뜸하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이렇게 끝을 맺었습니다. "노점상에 관한 정부의 보다 근본적인 대책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나랏님이 가난을 구제하라는 주문으로 끝맺은 셈인데, 요즘도 저는 치졸하게 급조된 제 시험답안과 비슷한 태도의 보도를 자주 만나게 됩니다. 온갖 불행과 사고와 탈법의 대책을 정부에 요구하는 분위기는, 정부의 몸집을 손쉽게 키워줍니다. 불행과 사고를 완전히 막을 방법은 없으므로, 그것을 막는 일이 전부 정부의 몫이라면 이론상 정부의 크기에 한계란 없습니다. 그 점에 있어서는 히틀러와 스탈린의 정부조차 충분히 크지 않았으니까요. 테리 길리엄 감독의 1985년 영화 <Brazil>은 지나치게 커져버린 정부의 모습을 섬뜩하게 풍자한 블랙코메디입니다. 유감스럽게, 이 영화는 국내에 <여인의 음모>라는 괴상망측한 제목으로 출시되어 있어서, 대여점에 가보면 더러는 에로물 근처에 꼽혀있기도 하지요.


단조롭고 반복적인 일상을 별다른 불만 없이 살아가는 주인공 샘 로우리는 미래 어느 나라의 하급관료입니다. 그는 밤마다 위기에 처한 여인를 구하는 용사가 되는 꿈을 꾸곤 합니다. 이 나라는 정부가 국민들을 세밀히 감시하는 전체주의 체제인데다가, 관료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어서 서식을 갖추어 관공서에 신고하지 않으면 전열기 수리조차 합법적으로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날, 교정당국 전산장비의 실수로 인해 범법자 터틀에 대한 체포영장이 선량한 시민인 버틀의 이름으로 발부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어디론가 체포된 버틀씨의 행적은 찾을 길이 없어집니다. 행정상 착오를 통보하기 위해 버틀씨네 가족을 찾아간 샘은 길에서 어떤 여자를 만나는데, 그녀는 밤마다 그의 꿈속에 등장하던 바로 그녀였습니다. 그러나 현실 속에서 그녀는 당국에 수배된 테러용의자였기 때문에, 사랑을 쟁취하고 버틀씨 사건을 해결하려는 그의 시도는 점점 더 위태로운 방향으로 소용돌이쳐 그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습니다.


올더스 헉슬리나 조지 오웰 같은 영국 작가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덕분인지, 테리 길리엄 감독은 깊은 통찰력으로 전체주의 사회의 혐오스러운 모습을 묘사했습니다. (그는 영국으로 이민 온 미국인입니다.) 실제 길리엄 감독은 이 영화를 가리켜 "1984년(이 영화가 제작되던 해)의 <1984>"라고 불렀다죠. 게다가 <Brazil>은 독특하고 촌철살인적인 유머로 가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길리엄은 저 유명한 코메디 그룹 Monty Python의 일원이었으니까요. Monty Python은 BBC 방송을 통해 센세이션을 일으킨 70년대 영국의 문화게릴라로서, '의식의 흐름' 같은 지적인 실험을 슬랩스틱과 접목시키기도 했습니다. 이들이 현대 코메디에 미친 영향은 심대한데, 요즘 젊은이들의 '황당 개그'에도 맥이 닿아 있죠. 참고로, 원치 않는 수신 메일을 '스팸'이라고 부르게 된 연유도 'Spam'이라는 제목의 Monty Python 개그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Brazil>의 풍자는 우선 그 제목에서 시작합니다. 브라질과 관련된 거라곤 코빼기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죠. 영화 속 암울한 현실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Aquarela do Brasil>이라는 감미로운 선율이 배경음악으로 사용될 뿐입니다. 여기서 브라질은 낭만적이고 환상적인 도피처를 상징합니다. 1987년 일가족을 이끌고 탈북하던 김만철씨가 "따뜻한 남쪽 나라"로 가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가 말한 따뜻한 나라는 이 영화의 제목과 흡사한 의미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만철씨의 여정과는 달리, <Brazil>의 주인공 샘은 연인과의 도주를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질서를 교란한 죄로 체포당합니다. 나무 그늘 아래에서 주인공이 연인에게 "이젠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탈출의 성공을 자축하는 장면이 실은 그가 외과수술을 닮은 고문을 당하면서 꿈꾸는 환각으로 밝혀지는 마지막 장면은 가슴 쓰라린 여운을 남깁니다. 슬픈 풍자로 가득한 성인판 <Matrix> 같다고나 할까요. 해피엔딩을 고집하는 제작사에 맞서 길리엄 감독은 이 비극적 결말을 지켜내려고 고군분투했었답니다. '환각 속으로의 도피'를 몽환적으로 그려내는 것 또한 길리엄 감독의 장기인데, 그는 <Time Bandits>, <The Adventures of Baron Munchausen> 등의 작품을 통해서도 그 주제를 솜씨 좋게 다루었죠.


사실 <Brazil>이 경고하고 있는 것이 전체주의 정부의 위험만은 아닙니다. 관료주의(Bureaucracy)는 관료기구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위계질서를 지닌 인간의 모든 조직에서 발아하고 성장하고 번성하는 특성입니다.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파킨슨(Cyril N. Parkinson)은 이 점을 짐짓 심각한 어조로 풍자했습니다. 이른바 "업무는 그 업무를 처리할 수 있는 시간을 채우도록 늘어난다"는 '파킨슨의 법칙'을 천명한 것이죠. 그는 관료적 기구가 스스로 확대되려는 지속적인 경향을 가진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모든 조직에 다 해당되는 이야기겠지만, 파킨슨의 법칙은 특히 정부 조직에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매사에 정부의 적극적인 개입을 요구하는 언론의 태도는, 그 의도와 무관하게 수상쩍은 공생관계를 초래합니다. 오래전 급조된 제 시험답안이 그랬듯이, 손쉽게 정부 탓을 하는 비판은 어쩌면 게으른 사수처럼 과녁을 확대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정부는 욕을 먹는 대신 - 또는 욕을 계속 먹지 않기 위해 - 팔을 더 길게 뻗고 덩치를 크게 불리는 것이죠. 저 역시 납세자의 한 사람으로서, 시장이 더 잘 할 수 있는 일에 국가가 개입함으로써 더 많은 세금이 쓰이게 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술자리에서건 언론을 통해서건 납세자들은 '왜 정부가 이런 일을 하지 않느냐'는 비판을 하기에 앞서, 그것이 정말 정부에 요구할 일인지 한 번쯤 되짚어 보는 것이 좋습니다. '정부가 왜 이런 일에까지 나서느냐'는 비판을 주변에서 더 자주 접하게 되는 날, 우리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총량은 더 늘어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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