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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Room with a View

posted Dec 2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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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처로울 지경으로 연애에 서툰 한 남자가 등장하던 영화가 있었습니다. 스토익(stoic)하다는 표현으로는 모자를 정도로, 이 남자는 여자 앞에서 서툴고, 뻣뻣하고, 속이 보입니다. 당연하게도, 그는 자기 약혼녀를 남성미 넘치는 외간남자에게 빼앗깁니다. 영화는 A Room with a View이고, 남자는 그때만 해도 신인이던 다니엘 데이 루이스입니다.


    A Room with a View(1985)는 봄베이 태생의 제작자 이스마일 머천트와 영국인 감독 제임스 아이보리 콤비가 E.M.포스터의 소설을 영화화한 일련의 작품들(Maurice, Howard's End)중의 하나입니다. 그 전부터 사극을 꾸준히 만들던 머천트-아이보리는 이제 하나의 상표에 가까울 정도로 색깔이 분명한 그들만의 브랜드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피렌체와 영국으로 배경을 옮겨가며 전개되는 A Room with a View에는 메기 스미스, 덴홀름 엘리어트 등 뛰어난 배우들이 조연으로 포진해서, 자신들이 등장하는 장면마다 호시탐탐 주인공들로부터 관객의 관심을 훔쳐내는데 성공하고 있습니다. 빛나는 조연들 중에서도 단연 압권이 '영국에 있는 못난 약혼자' 역할을 정말이지 남의 일 같지 않게 연기해낸 다니엘 데이 루이스였습니다.


    영화 속에서 한 번, 그는 자신의 약혼녀에게 키스를 하는데, 어찌나 인상적인지 For Whom the Bell Tolls의 잉그리드 버그만과 게리쿠퍼의 키스신이 저절로 떠오릅니다. 마리아(잉그리드 버그먼)이 죠단(게리쿠퍼)에게 이렇게 말하지요. “오, 로베르토, 나는 키스하는 법을 몰라요. 알면 당신에게 입맞출텐데... 코는 어디로 가야 하나요? 코가 어느 쪽으로 가야 하는지 늘 궁금했어요 (조던이 그녀에게 키스한다) 코가 방해가 되는 건 아니네요, 그쵸? 항상 난 걸리적거릴 거라고 생각했어요.(그녀가 그에게 키스한다) 봐요, 이젠 나도 할 수 있죠.” 잉그리드 버그먼의 이 대사는, 처녀의 순진무구함을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여자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하지만 A Room with a View에서 쎄실(다니엘 데이 루이스)은 키스를 잘해서 게리쿠퍼를 연상시키는 게 아닙니다. 그는 놀랍게도(!) 키스할 때 코가 엄청나게 걸리적거리고 분위기를 깨는 장애물 역할을 할 수도 있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이는데, 실은 그것은 묘기에 가깝습니다.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저런 연기를 해낼 수 있는 젊은 배우가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기만 하더니, 세월이 지나면서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한 쎄실의 서투름이 가슴 속에 오래도록 남는 이유는 따로 또 있는 것 같습니다.


    본시 남자는 여자들에게 서툰 동물인 것입니다. 그 서투름을 들키는 순간의 곤혹스러움을 <쎄실의 어설픈 키스>만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장면을 딴데서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설령, 상대 여성을 혼절시킬 만큼 성적인 매력을 뿜어내면서 잘 '꼬시는' 남자라도, 여자들에게 오랫동안 능수능란한 ‘정답’으로 남을 수는 없을 겁니다. 아니, 그런 남자일수록 정답이 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는 법이죠.


    3년의 터울을 두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는 그런 종류의 남자도 멋지게 연기해 보였습니다. 필립 카우프먼이 밀란 쿤데라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에서 난봉군 토마스 역할을 맡은 거죠. 여기서 그는, 여자에게 상처를 주는 것이 사명이라도 되는 듯이, 가볍게 만나고 가볍게 떠나버립니다. 그런데 참 묘하지요.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연기하는 토마스의 잔인하고 무신경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그 위로 쎄실의 서툰 모습이 겹쳐 보이는 겁니다. 정반대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토마스와 쎄실은 남자가 여자를 원할 때 여자의 입장에서 보자면 대체로 오답이 되고 마는 비극을 공통적으로 보여주는 셈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그토록 다르고, 다르기 때문에 그토록 서로 끌리고, 서로에게 끌리기 때문에 혐오하고 오해하는 야릇한 사이가 되는 것이겠죠. 남자가 여자에게 ‘오답’신세를 면하는 길은 ‘컨닝’을 하는 방법뿐이라는 점을 직설적으로 보여준 영화는 What Women Want(2000)였습니다. 멜 깁슨에게 굳이 팬티호스를 입거나 다리털을 밀게 만드는 역겨운 장면까지 꼭 필요했었는지는 의문입니다만, 저 여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좀 들여다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희망을 가져본 남자는 결코 적지 않을 겁니다. 대체로, 남자는 여자에게 자기가 원하는 것을 말하고, 여자는 자기가 원하는 대로 남자가 하는지 못하는지 지켜보지 않습니까?


    다니엘 데이 루이스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그는 제가 알고 있는 배우들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손을 가지고 있습니다.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에서, 그는 자신의 길고 멋진 손가락들의 관능미를 십분 드러냅니다.  제가 일찌감치 주목하고 응원했던 이 배우는 그러나, My Left Foot(1989)에서 연기가 아닌 묘기로 흡사 더스틴 호프먼의 Rain Man에게 도전해보려는 것처럼 보이더니만, The Last of the Mohicans를 거치면서 자신의 개성을 다 벗어버린 헐리우드 스타로 변신하고, Gangs of New York에 이르러서는 강렬함만 남고 섬세함을 다 잃은 모습을 보여서, 오래된 팬인 저를 낙담시키는 중입니다.


    영국은 미국에 록음악 뮤지션들을 공급해준 것보다는 조금 덜 압도적이지만 조금 더 지속적이고 광범위하게, 영국산 배우들을 헐리우드에 공급해주고 있습니다. 캐리 그란트, 피터 셀러즈, 피터 오툴, 로렌스 올리비에, 크리스토퍼 리, 이언 멕켈런, 데이빗 니븐, 로저 무어, 존 길거드, 엔서니 홉킨스, 숀 코너리, 주디 덴치, 미아 패로 등 어제의 스타들에서부터 앨런 릭만, 존 허트, 케네스 브래너, 숀 빈, 벤 킹슬리, 팀 커리, 제레미 아이언스, 헬렌 미렌, 에마 톰슨 같은 중견배우를 거쳐, 좀 더 젊은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 휴 그란트, 랄프 파인즈, 저드 로, 콜린 패럴, 클라이브 오언, 이완 맥그리거, 케이트 윈슬렛, 키라 나이틀리 등등 그 리스트는 계속한다는 것이 무모할 만큼 끝도 없이 이어집니다.


    영국배우들은 일반적으로 미국배우들보다 배우로서 훈련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그것은 영국이라는 무대가, 영어를 사용한다는 장점에 힘입어 미국과 세계를 향해 열려 있으면서도 연극과 TV드라마와 영화를 자유롭게 오가며 경험을 쌓기에 적합한 정도로 아담한 규모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은 영국왕립극예술학교나 로열 셰익스피어극단을 통해 정극 훈련을 충실히 수업하는 일을 중요시하고 높이 평가하는 영국의 문화적 풍토로부터 더 큰 덕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최근까지도, Lord of the Rings, Harry Potter, 007 시리즈 같은 블록버스터들은 헐리우드를 영국배우들의 놀이터처럼 만들어주고 있습니다. 가장 미국적인 수퍼 영웅이라고 할 수 있는 배트맨의 prequel(나중에 만들어진 전편)인 Batman Begins를 보셨나요? 무대는 시카고인데 정작 등장인물들은, 가면 쓴 웨일즈 사내(크리스쳔 베일)가 런던 태생 잉글랜드인들(마이클 케인, 게리 올드먼)의 도움을 받으며 아일랜드출신 악당들(리암 니슨, 킬리언 머피)과 싸우는 형국이더군요. 마치 엑스칼리버나 브레이브하트의 캐스팅으로도 별 손색이 없을 만큼 영국인들이 대거 설치는 틈새에서 모건 프리먼이나 케이티 홈즈가 동떨어져 보이던 게 우연이랄 수 없을 정도로.


    물이 높은 데서 낮은 데로 흐르는 것처럼, 영국배우들의 뛰어난 수공예적 기량이 헐리우드라는 거대시장으로 흘러가, 우리 안방까지 쉽게 전해지는 것은 영화팬들에게는 다행스럽고 즐거운 일입니다. 그 거대한 시장이 다니엘 데이 루이스처럼 좋은 배우를 망가뜨리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일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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