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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ll we dance?

posted Jan 26,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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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물긴 하지만, 지내다 보면 어제 같은 날도 있습니다. 저물녘의 바람을 마주보며 느린 걸음으로 걷다가 하늘을 올려다 보았을 때 문득, 모든 것이 분명해지는 그런 날.  이해가 안될 때 할 수 있는 일은 외우거나 물어보는 두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용서하는 방법도 있다는 것이 깨달아지는 날. 우울함의 이유는 내가 나 자신에 관해서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날. 나에게 모자라게 굴거나 모질게 굴었던 모든 사람들이 다 용서되는 날. 나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더라도 여전히 소중하고 귀한 것들이 오롯이 마음속에 짚어지는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무의미하지는 않은, 그런 날 말입니다.


    제가 착해지는 날입니다. 마흔 고개를 넘으면서 그런 날은 가끔씩 찾아옵니다. 그것은 십대 시절의 종교적인 경험과 조금은 비슷하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훨씬 고요하고 정갈할 뿐 아니라, 스스로의 모습이 굽어보아 진다는 점에서도 다르더군요. 어쩌면, 나이를 먹어 간다는 것이 밑지는 일만은 아닌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해탈의 경지에 이를 재목도 못되는데다가, 매일의 일상이 그런 식이었다가는 오히려 잡답(雜沓)의 한포기로 살아가기 어울리지도 않을 터이니, 그런 날이 아주 가끔씩만 찾아온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운 일은 아니겠습니다. 자주 찾아오는 마음의 평정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막상 어제와 같은 날에는, 날이 밝으면 또다시 반복되는 일상으로 돌아가 이 소중한 느낌들을 잊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이 그다지 조바심 나거나 하진 않습니다. 막상 어제와 같은 날의 느낌이, 마치 애를 써도 잘 기억나지 않는 잊혀진 이름처럼 안타깝고 아깝게 느껴지는 것은 오늘처럼 그 이튿날이 되어서야 입니다.


    마침, 어느 후배가 자신의 블로그에서 아다치 미츠루(あだち充)의 H2를 가리켜 ‘착한 만화’라고 부른 것을 읽어보았습니다. 어제 같은 날과 잘 어울릴 ‘착한 영화’를 고른다면 어떤 영화가 좋을까요? 호튼 푸트의 희곡을 영화화했고 제랄딘 페이지가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던 1985년 영화 The Trip to Bountiful, 주제페 토르나토레 감독의 유일한 걸작으로 남을 것으로 예상되는 1988년 영화  Nuovo Cinema Paradiso, 미야자키 하야오가 각본을 쓰고 (원작은 히이라기 아오기) ‘반디불의 묘지’를 만들었던 콘도 후시요미가 감독한 1995년 만화영화 ‘귀를 기울이면(耳をすませば)’, 그리고 단 한 편의 영화로 뭇남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어 놓고 수오 마사오키 감독과 훌쩍 결혼해 버린 발레리나 쿠사카리 타미요가 주연했던 1996년 일본영화 Shall we dance? 등이 얼른 생각나는 영화들입니다.


    일본 사람들의 이름이 좀 유난히 자주 나오나요? 어쩌면, 일본인들이 좀 유난스러울 만큼 절제를 미덕으로 삼는 섬세한 문화를 가지고 있다는 점과도 관련이 있는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이 저절로 착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착함을 일상 속에서 가장 잘 흉내 내는 지름길은 아마도 절제를 통한 것일 테니까요.


    제가 이렇게 이야기한다고 해서, 설마 일본인은 다 착하다 하는 뜻으로 잘못 알아듣고 날뛸 사람은 없겠지요? 일본인들의 인간관계는 이중적이고 잔혹한 면도 있습니다만, 위선과 냉정함이라는 단점은 둘 다 절제라는 덕목과 아주 무관한 것이 아닙니다. 햇볕을 받으면 그림자가 생기기 마련이듯이, 너그러움과 우유부단함, 엄정함과 냉혹함, 기쁨과 들뜸, 우울함과 차분함 같은 형용사들은 한 가지 특징을 달리 표현한 것에 불과한 경우도 많거든요.


    Shall we dance?의 주인공은 평범하고 건실한 가장이지만, 그는 중년에 갑자기 춤바람이라는 치기(稚氣)에 유혹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유치해진 남성에 관한 유치한 줄거리입니다만, 이 영화는 가슴을 따습게 만들어줍니다. ‘치기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어느 정도 ‘치기 어리게’ 하지 않을 수는 없는 법이겠죠. 제 친구는 이 영화를 가리켜, “영화적 판타지가 잘 살아 있는 영화”라고 평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직 저는 이 영화를 그보다 더 잘 설명한 표현을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울려 퍼지는 음악 Shall we dance는, The King and I에서 율 브리너와 데보라 카가 춤을 추는 장면에서보다 마음을 오히려 훨씬 더 많이, 그리고 멀리 움직입니다.


    ‘영화적 판타지’라는 것은 참 묘해서, 그것을 낚아채기란 돌틈에 숨어있는 우럭을 미끼 없이 잡는 것보다 어려운 것 같습니다. 결정적인 증거가, 이 영화를 리메이크한 2004년 미국 영화 Shall we dance?입니다. 리처드 기어와 제니퍼 로페즈를 기용하여 만든 미국판 리메이크는, 영화의 뼈대만을 섣불리 빌려오면 원본이 제아무리 좋은 영화라도 충분히 망가질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본보기로 만든 영화처럼 되어버렸습니다.


    미국판 Shall we dance?가 놓친 것은 불과 2% 정도에 불과할지도 모릅니다. 설명하기 어려운 그 2%가 그토록 절묘하게 영화적 판타지를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죠. 중년의 유부남이 예쁜 춤선생에게 홀려 무도교습소를 찾지만, 그는 흔히 생각하는 식으로 ‘여자에게 바람나는’ 것과는 다른, 중년의 복잡한 유혹에 이끌리고 있었습니다. 관객들이 그 점을 느낄 수 있게 해 주던 설득력이 바로 그 사라진 2% 속에 있었습니다.


    Shall we dance의 주인공이 경험한 유혹은 달콤하고 짜릿하고 활기찬 것이라기보다는, 인생에 서서히 그늘을 드리우는 좌절감과 어떡하든 희망의 돌파구를 찾아보려고 애쓰는 안쓰러움이 뒤섞인 것이었죠. 이런 남성을 묘사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것이었는지는, 원작에서보다 훨씬 더 위태롭고 불륜스러워 보이는 리처드 기어와 제니퍼 로페즈의 무도장면이 선명하게 증명해 줍니다. 그 점은 리처드 기어가 야쿠쇼 코지보다 더 성적으로 위험해보이고, 제니퍼 로페즈에게 신비감이 없는 탓이기도 하겠지만요.


    일본판 Shall we dance?에는 인생을 바라보는 좀 더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습니다. 리처드 기어는 방황을 접고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야쿠쇼 코지가 춤바람을 딛고 다다른 인생은 예전과는 분명히 다른 어떤 지점이었습니다.


    가슴을 따뜻하게 해주는 영화들은 우리의 지친 일상에 작으나마 위안을 줍니다. 정신이 정갈해지는 경험을 하는 와중에도 이튿날이면 다시금 낮은 일상으로 임하리라는 것을 미리 아는 일은, 좌절과 역경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믿는 것 못지않게 정상적이고 건강한 일이겠습니다. 비록 길지 않다고 하더라도, 착한 영화들은 사람들에게 그 영화가 없었다면 갖지 못했을지도 모르는 착한 시간을 선사해 줍니다. 그것은 결코 작은 선물이 아닙니다.


    뒷심이 좀 부족하다고 느끼긴 했습니다만, 최근에 본 ‘라디오 스타’도 그런 착한 영화들 중의 하나였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때 대뜸 떠오르는 우리 영화들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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