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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2007)

posted Jan 21,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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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해 전 저는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주연한 <Unforgiven>에 관해서 이런 이야기를 쓴 적이 있었습니다.


    "원수는 물에 새기고 은혜는 돌에 새기라는 말이 있습니다. 용서할 줄 아는 능력은 개인적으로 고귀하고 사회적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세상에는 용서받기 어려운 일도 존재한다'는 생각과 공존할 때만 의미를 가집니다. 원수를 물에 새긴다는 말은, 적어도 용서를 빌어야 하는 쪽에서 할 말은 아닌 겁니다. 상상해 보시죠. 누구도 용서를 구하지 않지만 모든 것이 용서되는 사회, 모든 사람이 면책특권을 누리는 국회의원들처럼 구는 사회가 얼마나 끔찍할 것인지를! 용서를 구할 줄 아는 능력은 용서할 줄 아는 능력 못지않게, 아니, 때로는 그보다 더 중요합니다. 아무도 용서를 구하지 않는 곳에서 용서를 베풀 능력이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것은, 실은 신의 능력도 미치지 못하는 일입니다."


    <밀양>은 쉽게 스스로를 용서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지옥의 풍경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또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제게 그런 화두를 던져주었던 <Unforgiven>을 다시금 회고하기도 했습니다.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들에게 그랬듯이, 저에게도 <밀양>에서 가장 눈에 크게 띄는 것은 주연배우 전도연의 혼신의 힘을 기울인 연기였습니다. 그것은 젊은 여배우가 쉽사리 보여줄 수 없는 호연이었습니다. 하지만 개인적인 취향을 말한다면, 그것은 제가 최고라는 찬사를 바치고 싶은 종류의 연기는 아니었습니다. 극중인물인 '신애'는 자신의 충격과 슬픔과 한을 삼키고 자제하려고 나름대로 노력하지만, 그런 신애를 연기하는 전도연의 연기에서는 별다른 절제를 느낄 수 없었습니다.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다는 이청준의 1985년 소설 <벌레 이야기>를 찾아서 읽어보았습니다. 소설의 화자는 남편이고, 아내는 끝내 자살을 합니다. 초등학생인 아들이 실종되자, 아내는 그것이 '유괴에 의한 실종으로 확실시되고 난 다음에도 악착스럽게' 잘 견뎌 나갑니다. 어떻게든지 아이를 다시 찾겠다는 어미로서의 강한 의지가 그녀를 버텨주는 거죠. 신문사, 방송국은 물론이고 그녀는 다니지 않던 절에 찾아가 공양도 바치고, 교회에 헌금도 바칩니다. 아이의 주검이 발견되자, 이제는 범인을 찾겠다는 복수심이 그나마 그녀를 붙들어 줍니다. 범인이 잡히자 그녀는 교회에서 영혼의 평안을 구하고, 마침내 범인을 만나 용서하겠다고 합니다. 그런데, 교도소에서 면회한 범인은 어느새 '주님을 영접'하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평안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아내에게 이웃의 김집사는 신의 섭리를 받아들일 것을 종용합니다. '왜소하고 남루한 인간의 불완전성, 그 허점과 한계를 먼저 인간의 이름으로 아파할 수가 없는' 김집사의 그런 권유는 아내를 더 큰 절망 속에 빠뜨립니다. 결국 아내는 유서 한 장 남기지 않고 자살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납니다.


    영화 <밀양>의 주인공 신애는 바람을 피우던 남편과 사별하고, 그 남편의 고향인 밀양에 내려와 새로운 삶을 살아보려고 합니다. 그다지 강하거나 요령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 그녀에게, 억센 사투리의 고장에서 어린 아들을 키우겠다는 선택은 당초부터 무모해 보입니다. 그런 그녀에게 동네의 남정네들, 특히 카센터의 노총각 사장은 수장쩍은 호감을 드러내지요. 자기를 아는 사람이 없는 곳에서 새출발을 하겠다던 그녀는 밀양 땅에 들어서면서부터 내내 주눅이 들어서 지냅니다. 실제로 그녀 같은 처지에 그런 선택을 하는 여성을 상상하기는 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저로서는 이 영화가 매우 강한 상징성을 띄고 있다고 느꼈습니다. 작가가 뭔가 큰 소리로 주장하려는 것처럼 보였다는 뜻입니다.


    소설의 3인칭 화자(남편) 시점과는 달리 영화는 주인공의 시점에서 진행되는데다, 앞서 만한 전도연의 호연에 힘입어, 이 영화는 타인을 함부로 평가하고 정죄하고, 타인의 삶에 함부로 간섭하려는 사람들의 추한 모습을 적나라하게 객체화하여 보여줍니다. 영화 속에서 신애는 앞모습 못지않게 많은 장면에서 뒷모습으로 돌아서거나 돌아앉거나 또는 돌아누운 채, 관객들조차 그녀의 슬픔에 관여하는 것을 한사코 거절합니다.


    <밀양>의 영어제목은 <Secret Sunshine>, 그러니까 밀양의 한자 뜻풀이인 은밀한 볕입니다. 화면에서 돌아앉아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신애를 바라보던 카메라가 그녀의 마당 한 구석에 내려앉은 한웅큼 햇볕을 비추며 영화는 끝이 납니다. 원작소설과는 달리 아이 엄마의 자살로 끝나버리지 않는다는 점, 그리고 영화 제목이 은밀한 볕이라는 점 등을 생각하면, 이창동 감독이 말하고 싶었던 것은 일종의 희망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찢기고 짓밟힌 신애의 가슴속 지옥도 속에서도 그 어떤 희망이 있을 수 있고, 저로서도 그랬으면 합니다. 그러나 영화 말미의 조각볕이 상징하는 것은 설사 희망이더라도, 여러 사람이 나누어가질 수는 없는 희망 같아 보입니다. <밀양>의 볕은 너무나 비밀스러운 나머지, 관객들도 엿보고 공감하기 어려운 사적인 비밀이 되어버린 것이죠.


    사실 저는 그럴 수 밖에 없겠다고 느꼈습니다. 희망을 말하기에는, <밀양>은 너무 짙은 미움과, 너무 완전히 타버린 재같은 좌절과, 장마철 김치처럼 너무 많이 시어버린 비아냥을 담고 있지 않나하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용서를 비는 일의 소중함에 관해서 저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는 이 영화를 평가하는데 저는 왜 이렇게 짠 걸까요?


    앞서 말한 <Unforgiven>은 용서를 구하다가 결국 용서받기를 포기한 사내의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Unforgiven>을 보면 그 영화가 용서받고 싶은 심정으로 만들어졌다는 걸 금새 느낄 수 있습니다. <밀양>은 용서를 베풀려다가 좌절한 여인네의 이야기입니다.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하나같이 용서를 구하기는 커녕, 남에게 용서하기만을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그런데 막상 영화 <밀양>도 용서를 구할 생각은 조금도 없습니다. 마치 영화 속의 밀양사람들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영화 <밀양>은 죄 없는 피해자의 눈높이에서 유괴범을, 교회를, 타인을, 그리고 사회를 나무라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의 이런 시선은 아이러니컬하게도, 영화 속에서 신애를 함부로 '불행한 사람'이라고 규정하는 김집사의 모습과 그리 많이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그것은 수상쩍은 전제적 권력(tyranny)의 모습입니다. 노벨상 수상자인 엘리아스 카네티는 그의 저서 <권력과 대중>에서 전제적 권력의 특징을 여섯 가지로 요약했습니다. 그 중에는 '답변을 요구할 권리', '판단하고 규탄하고 용서할 권리'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용서는 고귀하고, 어려운 행위입니다만, 그것을 독점하려는 기미가 보이면 그곳에서는 정치적 권력욕의 비린내가 풍깁니다.


    정죄하는 힘과 용서하는 힘은 본질적으로 하나입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용서하는 행위와 용서를 구하는 행위가 그토록 판이하게 다른 것이겠죠. 누구도 용서를 구하는 자리에는 서지 않으려 드는 우리 세상의 황량한 모습을 <밀양>은 솜씨 좋게 그려냈습니다. 다만, 오만함으로 겸손을 가르칠 수 없듯이, 용서에 관한 이야기를 원망과 비난으로써 한다는 것은 어색하지 않은가요? 만에 하나, 저 혼자서만 그렇게 느끼는 거라면, '어린 아이를 죽이는 영화'를 좀 병적으로 싫어하는 저의 취향이 <밀양>에 대한 점수를 박하게 만든 탓인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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