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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들의 행진

posted Oct 0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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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며칠전, 아이들과 함께 <바보들의 행진>을 다시 봤습니다. 장발단속으로 도망가고, 통금위반으로 경찰서에 잡혀가는 장면에 어리둥절해 하는 아이들이 재미있더군요. 최인호 원작소설을 1975년 하길종 감독이 영화화한 <바보들의 행진>은 한국 영화사를 말할 때 빼 놓고는 이야기가 안되는 작품입니다. 하길종은 신동 소리를 들으며 자라, 국내 최초로 영화과(UCLA) 학위를 받고, 프란시스 F 코폴라와도 친한 사이였다는데, 38세의 나이로 요절했습니다. 그는 이 영화로 ‘현실과 타협했다’고 한숨지었다지만, 설사 유신체제를 모르는 사람이라도 그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을 겁니다. 본질상 영화란 3차원의 세계를 평면에 그리기 때문에 타협이고,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라 있을 법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타협이며, 작품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상품이기도 하기 때문에 타협인 것이니까요.


    하지만 검열에 30분이나 잘려나갔다는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역시 <바보들의 행진>은 뭔가 미진한 느낌을 줍니다. 하길종 감독은 누벨바그에 경도되어 있었다죠. 거칠게 툭툭 끊어지는 누벨바그의 영향은 이 영화에서도 볼 수 있는데, 애당초 그런 접근이 원작소설과 잘 어울리는 것이었는지 의문입니다. 더구나 과장된 연기와 상투적으로 더빙된 성우들의 대사들과 합치면, 영화문법과 서사구조가 서로 겉도는 것 같은 느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하길종 감독이 현실과 타협했다고 할 때의 현실은 억압적인 정치상황 못지않게, 누벨바그 방식을 제대로 소화할 수 없었던 한국의 영화 제작현실을 가리킨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이 영화는 주인공이 신체검사를 받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입영열차를 타는 장면으로 끝나는 수미쌍관의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사이에 70년대 대학생들의 코믹하고 가벼운 에피소드들이 전개됩니다. 하지만 그 행간에는 이들을 짓누르고 있는 현실의 무서운 무게가 느껴집니다. 병태는 미팅에서 만난 영자와 잠간 사귀다가 차이고, 영철은 고래를 잡겠다며 동해안으로 가서 절벽에서 뛰어내려 자살합니다. 병태와 영철은 영화 속에서 경찰이라는 공권력과, 또 교수들이라는 기성세대와 끊임없이 충돌하는데, 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70년대의 관객들에게 이 영화가 대놓고 말하지 못한 가장 높은 벽이 유신체제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을 터입니다. 영화가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이런 은유적 방식 때문에 <고래사냥>이나 <왜 불러> 같은 삽입곡들은 더 빛을 발합니다.


    <바보들의 행진>은 시대상황과 함께 읽어야 하는 영화입니다. 그러지 않으면, 주인공들은 미팅이나 다니다가 실연에 속상해하고, 돈 없이 생맥주 마시며 땡깡이나 부리다가, 불현듯 미친듯 자살해 버리는 젊은이들로 보일 뿐이죠. 삶에 대한 열정을 좀처럼 보여주지 않는 주인공들의 기행은, 과대항 술마시기 대회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선수들이 도열해서 막걸리를 열 잔씩 마시고 시험을 치르고, 다시 열 잔을 또 마시는 이 장면은 대단히 유머러스합니다. 시합에서 우승하는 병태의 모습은 Cool Hand Luke에서 삶은 달걀 50개 먹기 내기에서 이기는 폴 뉴먼을 연상케 합니다. 더 근사한 것은 작가 최인호와 코미디언 이기동이 시합의 심판으로 카메오 깜짝 출연을 하는 점이죠.


    30년이 흐른 후 다시 본 <바보들의 행진>에는, 영화를 좀 더 잘 만들지 못한 게 이상할 만큼 빛나는 재료들이 들어 있더군요.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최인호 원작의 탄탄함과, 윤문섭이라는 배우와, 송창식의 노래였습니다. 몇해전 소설 취재를 안내하면서 만나본 최인호 선생은 환갑을 넘긴 나이에도 불구하고,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정력과 따라잡을 수 없는 재치를 지닌 영원한 청년이시더군요. 연포해수욕장에서 기타치고 놀다가 캐스팅되었다는 윤문섭은 제 고교선배님이시기도 합니다. 믿거나 말거나, 그가 출연한 단 한 편의 영화가 <바보들의 행진>이었습니다. 그 뒤 홀연히 영화계를 떠난 그는 지금 인도네시아에서 사업가로 활동중이죠. 그의 외모는 개성 있으면서도, 병태가 늘 끼고 다니던 정구채가 잘 어울리던 귀공자의 인상이었습니다. 우스워 보일 만큼 구부정한 자세로 그가 휘적휘적 걷던 팔자걸음은 70년대 청년문화의 또다른 상징이었죠. 그의 영화경력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병태의 우수어린 눈동자는 그가 연기해낸 것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매력을 있는 그대로 발산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는 신인배우였지만, 커피를 열 잔은 마신 것처럼 과장된 명랑함을 보이던 이영옥의 상투적인 연기에 대비되어 그 어눌한 자연스러움이 더 돋보였습니다.


    <바보들의 행진>에서 느껴지는 완성도의 미진함은 한국 영화산업이 처했던 열악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그 열악함은 단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정치적 억압만으로 설명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산업에 대한 보호와 통제는 본질상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보호하기 위해 통제하고, 통제하기 위해 보호하는 것이죠. 유치산업으로 보호되고 있던 한국의 영화산업은 오랫동안 그야말로 유치한 상태를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우리 영화의 제작현실을 가장 위협적으로 변화시켰던 사건들 중 하나는 '직배허용'이었습니다. 외국 메이져사의 직접배급을 허용하면 마치 이 땅의 영화는 다 말라죽어버릴 것처럼 겁먹은 영화인들의 시위가 이어졌고, 직배 상영관에는 뱀이 풀어지기도 했었죠.


    직배가 허용된 이후 막상 말라죽은 영화는, 말라죽을 수밖에 없었던 영화들뿐입니다. 정치적 민주화 과정과 병행해서, 영화제작집단이 소비자의 욕구를 좀 더 섬세하게 반영해야만 하는 ‘민주화’도 소리 없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세계영화와의 힘겨운 경쟁을 경험한 뒤에야 우리 영화는 모스크바에서, 베를린에서, 로카르노에서, 급기야는 칸느에서까지 깃발을 휘날리는 힘찬 도약을 이뤄낸 것입니다. 불과 몇 년 사이에 "방화"라는 명칭 자체가 얼마나 어색한 외국어처럼 들립니까. 그 어색함의 한 자락이 아직 스크린 쿼터를 유지하자는 목소리 속에 묻어 남아있긴 합니다만.


    <바보들의 행진>이 우리 영화사에 미친 영향은, 그 속편과 아류작들의 행방을 살피는 것만으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가 성공을 거두자, 하길종 감독과 최인호 작가 콤비는 속편인 <병태와 영자>(1979)를 만듭니다. 제대한 병태가 영자의 사랑을 쟁취하려고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담겨있고, The Graduation의 라스트씬처럼 약혼식장에서 신부를 데리고 줄행랑치는 병태의 모습으로 끝나는 영화죠. 하감독이 간암으로 별세하는 바람에 이 영화는 그의 유작이 되었습니다. <병태와 영자 2>는 이강윤 감독이 만든 속편인데, 영자(이영옥) 말고는 배역이 다 바뀝니다. 세번째로 바뀐 병태 역할에는 <바보들의 행진>에서 병태 친구 영철로 나왔던 하재영이 맡아서 좀 서먹한 느낌이었죠. 이 영화는 고단한 신혼살림으로 전전하는 병태와 영자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바보들의 행진>에 대한 향수는 배창호 감독의 <고래사냥>(1984)과 <고래사냥 2>(1985)에서도 절절히 느껴집니다. 그 제목 자체가 <바보들의 행진>에서 자살한 영철이 버릇처럼 뇌까리던 대사이자 그 영화의 타이틀송이었던 데다가, 김수철과 손창민이 연기한 주인공의 극중 이름도 ‘병태’였던 거죠. 배창호 감독의 화면은 70년대 영화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안정감이 있고, 유머의 세련미도 객석에서 보기에 한결 편안한 것으로 발전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보들의 행진>은 그 후의 청춘영화들이 담지 못한 깊이와, 이르지 못한 높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젊은 층과 진지한 공감대를 형성하기 위해 새로운 시도들을 포함하려고 애쓴 흔적들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87년 이규형 감독의 <청춘스케치>에 이르면, 한국영화가 걷고 있던 길이 과연 발전인지 퇴행인지 심각하게 고민하게 됩니다. 영화 속에서처럼 한국의 대학생들이 점점 바보가 되어간 것이 아니라면, 지금쯤은 좀 나은 청춘영화 한 편쯤 나와줘도 좋을 것 같습니다. Paper Chase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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