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ll It Love (L'Étudiante) (1988)

posted Dec 07, 2009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 사랑은 끔찍한 존재들의 결합이다

‘좋은 저녁입니다(Bonsoir).’ 내가 인사를 건냈다.
소피 마르소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고마와요(Merci).’

1993년 서울. 열 네살때 이미 <La Boum>(1980)으로 세계적 스타덤에 올랐던 소피 마르소는 미테랑 프랑스 대통령 방한 대표단에 문화계 인사로 포함되어 있었다. 당시 프랑스는 우리나라에 고속전철 기술을 세일즈하기 총력전을 기울이고 있었다. 미테랑 대통령은 루브르가 소장한 외규장각 도서 중 (비록 한 권이지만) '휘경원원소도감의궤(徽慶園園所都監儀軌)'라는 고서적까지 영구임대 형식으로 반환했다. 대전 엑스포를 방문한 미테랑 대통령 일행을 구름떼 같은 인파가 쫓아다녔다. 물론 소피 마르소를 구경하려는 사람들이었다. 당시 나는 공식만찬 행사를 담당한 의전과 직원이었는데, 만찬장 입구에서 소피 마르소에게 명찰을 건네며 그녀의 눈웃음에 전율을 느끼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녀도, 나도 스물 일곱살이었다.

그녀의 스물 두 살 풋풋하고 팔팔한 시절을 감상할 수 있는 영화가 있다. 국내에는 주제가의 가사를 그냥 따서 <You Call It Love>라는 제목으로 알려졌지만 원제는 <L'etudiante(여학생)>이다. 교사인 발랑띤(마르소)은 소르본느 대학에서 교수 자격시험을 준비중인 처녀다. 팝 음악 연주자 겸 작곡가인 에두아르(뱅상 린든)는 이혼남이다. 스키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진다. 그는 그녀에게 노래를 만들어 바치기도 한다. (80년대의 말랑말랑한 전자음악을 요즘 듣자면 그냥도 손발이 좀 오그라들긴 한다.)

문제는 얘네들이 통 서로 만날 시간이 없다는 거다. 그녀는 교사일과 공부에 밤낮으로 치어 산다. 그는 자기 밴드와 함께 온 지방도시를 순회하며 공연을 하고, 모처럼 파리에 와도 녹음작업에 쫓긴다. 이 둘은 필사적으로 서로의 휴식시간을 맞춰가며 전화로 연애를 한다. 핸드폰이나 문자는 커녕, 이메일도 없는 시절의 장거리 연애는 눈물겹게 고단하다. 셋집의 전화를 다른 사람이 계속 사용하자 그녀는 한밤중에 비를 맞으며 공중전화로 뛰어가기도 하고, 그는 공연도중 막간에 무대 뒤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 그녀를 향해 애태우기도 한다. 이들은 전화를 기다리느라 밤을 지새우기도 하고, 어쩌다 서로의 스케줄이 허락하면 인근도시에서 부리나케 만나 짧은 밤을 하얗게 불태우기도 한다.

핸드폰이 범람하는 시대에 이 영화를 돌이켜보면 좀 복잡한 감상에 젖게 된다. 핸드폰이라는 문명의 이기는 얼마나 우리의 의사소통을 손쉽고 편리하게 만들어 주었는가. 그러나 동시에, 우리의 의사소통은 그만큼 값싸고 안일하게 변한 건 아닐까. 한시도 안보면 못 견딜 것만 같은 연인들에게조차, 핸드폰이라는 물건은 서로에게 지나친 간섭을 허락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행인지 불행인지 ‘공중전화의 시대’에 연애를 졸업한 나로선 답을 알 길이 없지만, 상대방과 나 사이에 자제력 말고는 다른 물리적 금제가 없다면 로맨스는 훨씬 덜 로맨틱해진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누가 봐도 참 용하다 싶은, 힘겨운 연애를 지속하던 두 사람은 결국 스트레스를 이겨내지 못하고 심하게 다툰다. 남자는 오래 공들이던 영화음악 작곡가로서의 데뷔를 퇴짜맞은 즈음이었고, 여자는 마지막 구두시험을 앞두고 소화불량과 불면에 시달리던 와중이었다. 한 바탕 다툰 뒤, 에두아르는 발랑띤이 며칠째 앓던 몸으로 시험장에 갔다는 사실을 알고 그리로 달려간다. 시험장에서 그녀는 교수들 앞에 앉아 마치 재판장의 피고측 변호사처럼 스스로를 변론해야 한다. 그녀에게 주어진 과제는 ‘몰리에르의 <인간혐오자(Misanthrope)>가 희극이냐 비극이냐’를 논술해야 하는 것이다.

교수들 앞에서 감정적으로 흔들리면서 아슬아슬하게 눈물을 보이기도 하던 발랑띤은 조금씩 자신감을 되찾더니 자신의 연애경험을 예로 들어가면서 몰리에르를 논한다. (글쎄다. 내가 교수라면 높은 점수를 주긴 어려웠을 것 같다.) 그녀는 알프레드 드 뮈세의 작품 <사랑으로 장난하지 말라(On ne badine pas avec l'amour)> 중 일부를 암송하면서 열변을 토하는데, 이것은 시험장에 뻘쭘하게 들어선 에두아르를 향한 변함없는 애정의 고백이기도 하고, 이 영화의 주제이기도 하다.

    “모든 남자들은 거짓되고, 지조 없고, 불성실하고, 수다스럽고, 위선적이며, 교만하고, 비겁하고, 비열하고, 쾌락을 쫓아다닌다. 모든 여자들은 믿을 수 없고, 교활하고, 허영심에 들떴으며, 의심 많고, 부도덕하다. 세상은 흉칙한 짐승들이 진흙탕에서 비틀거리며 기어다니는 바닥 없는 하수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런 세상에서 성스럽고 숭고한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그다지도 불완전하고 끔찍한 두 존재의 결합이다.”

이 영화는 그녀가 시험에 붙었는지 떨어졌는지까지는 보여주지 않는다. 시험이 끝난 뒤 교정에서 만난 두 사람이 환한 얼굴로 서로를 포옹하면서, 캐롤린 크루거가 부른 당대의 히트 주제곡 ‘You Call It Love.’가 흘러나온다. 맞다. 사랑은 불완전하고, 심지어 끔찍한 존재들의 결합이다. 그렇기 때문에 비로소 사랑은 의미 있는 그 무엇일 게다. 물론, 서로의 미진함을 감싸고 감당하려는 짝들에게만 그렇다. 불완전하고 끔찍스런 존재들의 결합이 다 사랑인 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