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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ces with wolves

posted May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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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빌 코스비는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코미디언입니다. 그는 언젠가 조니 카슨이 사회를 보던 투나잇 쇼에 나와서 이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만의 특유의, 아주 느린 블루스 같은 박자로.

    “나는 '흑인'이 되기 전부터 코미디언이었죠.(I was a comedian before I was black.) (웃음) 그래요, 나는 젊어서 소위 ‘깜둥이(니그로)’ 코미디언으로 시작했습니다.  네, 맞아요. ‘깜둥이 코미디언’이라는 게 있었죠. 백인 관객이 몰려와서는 ‘이봐 깜둥아, 네 농담으로 우리 양심에 매질을 좀 해다오’ 하는 시선으로 날 봐요. 그럼 나는 인종차별에 관해 농담 몇마디를 해주고, 그들은 편안해진 양심으로 집에 돌아가 잠을 자죠”

    그가 얼마나 비범한 만담가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촌철살인이어서 기억 속에 오래 남아있습니다. 만담도 이 쯤 되면 한동안 소화해 볼 생각의 음식(food for thought)이랄 수 있겠습니다. 몇 가지 논란이 가능하겠습니다: (1) 남의 비판을 듣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거늘, 인종적 편견을 지적받고 비판을 웃으며 수용하는 미국의 백인들은 양심적이고 성숙한 사람들이다. (2) 그 백인들은 코메디를 통해 가벼운 가책을 받는 것으로 평소의 잘못을 용서받기 원하는 것이므로 가증스럽다. (3) 그런 관객들의 소모적 필요에 부응하는 코스비의 인종적 만담은 체제유지적 봉사에 불과하다 (4) 아니다, 시종 부드러운 말로 ‘전체관람가(G-rated)’수준의 만담을 하면서도 인종적 모순을 꾸준히 다루고, 말하고, 생각하게 하는 그의 코메디는 건강하고 provoking하다. 기타등등 기타등등.

    비판을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위선이 없을 수는 없겠습니다. 듣기 싫은 것을 듣고 참아내거나, 반추하는 것은 사람의 본성에 반하는 것이고, 도덕적인 일이며, 도덕은 본질적으로 위선입니다. 2천년 전 형식주의적 유대교리에 매몰된 이스라엘에서 예수가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 위선자들아!”라고 일갈하신 이래로 위선은 험악한 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가 요구한 것은 위선보다 나은 것을 하라는 뜻이었지, 위선을 하느니 차라리 악을 저지르라는 의미가 아니었다는 점은 근대에 들어 도덕적 상대주의가 지배이념이 된 이래로 자주, 실은 너무 자주 잊혀집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전쟁과 분란이 일상화되고 백성들에게는 영악하고 현실적인 악다구니만 남아, 너나 할 것 없이 눈치를 살피며 실속을 챙기지 않으면 살기 어려운 형국이었던 춘추전국시대가 진행중이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분연히 일어선, 인류의 또 다른 스승 공자는 위선하라고 가르칩니다. 저는 공자가 꼭 아담 스미스처럼 현실주의적인 혜안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으로 바꾸기란 어렵다는 점에 착안했다는 점에서 특히.

    개인적 성불이나 구원을 향해 제각각 가장 멀리 갈 수 있는 만큼 가는 길을 찾아나서는 대신, 조금 덜 멀리 가더라도 다들 함께 갈 수 있는 길을 찾아나선 점에 공자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仁과 義는 마라톤의 종착점과도 같은 것이어서 모든 이가 거기에 도달한다는 보장 같은 것은 없습니만, 禮와 樂으로 보법을 삼으면 한 사회가 종착점 방향으로 가장 멀리까지 가볼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아니었을까요. 내세가 아닌 현세에서 말입니다.

    강조하거니와, 위선하는 사회는 위악하는 사회보다 낫습니다. 길에서 교통사고가 나면 주위의 눈이 무서워서라도 점잖게 경위와 해결책을 의논하는 사회가, 일단 게거품부터 물고 목소리 크기 경쟁을 해야 하는 사회보다 살기 좋은 것입니다. 잘난 사람의 위선적이 싫게 느껴진다면, 상상해 봐야 합니다. 힘 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전부 위악적이면 어떨 세상이 될 것인지를. 위선보다 더 먼 곳을 향해 스스로를 수양하는 가운데 위선의 사회적 효용을 인정하는 君子, 공자의 어깨 위에는 아마도 천근만근 책임감과 도저한 인류애가 놓여 있었을 겁니다.

    한편, 비판을 하는 일은 비판을 받아들이는 일에 비해서 대단히 쉬운 일입니다. 더구나, 사람은 자신이 소속집단의 입장을 대변한다고 느끼게 되면 쉽사리 자제력을 잃습니다. 민족주의는 서구의 근대사가 만들어낸, 역사의 위험한 폭발성 엔진입니다. 공동체를 대변한다고 믿는 순간, 평소 점잖은 사람들도 ‘남’에 대해서는 무시무시한 대거리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라인홀드 니이버가 더 이상 핵심적일 수 없을 정도로 간결한 제목으로 정리했듯이) 사람은 도덕적일 수 있지만 사회는 비도덕적인 법입니다.

    이런 모든 점들을 생각해 볼 때, 흑인들의 백년 넘는 한과 좌절을 담고 있는 인종차별이라는 주제에 관해서도 웃으면서, 또 웃기면서 비판할 수 있는 코스비 같은 존재들은 위대하고, 귀합니다. 미국인들이 수정헌법 1조를 그토록 애지중지하고, 비판하는 권리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는, 비판을 수용할 줄 아는 자세를 그만큼 소중히 여긴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알렉스 헤일리 원작 미니 시리즈 Roots나 Dances with Wolves에 나오는 것처럼 나쁜 짓을 저지르는 사람들의 나라가 미국이기도 하고, Roots가 전국 네트워크를 통해 제작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고, Dances with Wolves가 아카데미 상을 싹쓸이하는 나라가 미국이기도 합니다. 비판하는 권리와 비판받는 자세를 다 소중히 여기는 마음은 마치 자동세탁기처럼 미국이라는 나라와 사회를 계속 쓸만한 것으로 빨아 놓고 있는 것입니다.

    Dances with Wolves는 인디언의 시점에 서서 만들어진 영화입니다. 케빈 코스트너는 이 영화로 일약 삼류배우의 울타리를 훌쩍 벗어나 스타급 배우겸 문제의식을 지닌 감독으로 거듭납니다. 그랬거나 말거나, 케빈 코스트너 만큼 잘 생긴 배우 치고, 케빈 코스트너 만큼 한 가지 표정 밖에 지을 줄 모르는 배우도 드뭅니다. 단조로운 표정 짓기 대회에서 그와 수위를 다툴만한 주연급 배우는 키아누 리브스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키아누는 케빈 코스트너 만큼 미남이라고 하긴 어렵지요. 케빈 코스트너의 눈이 작은 편이라서 그렇다고요? 페트릭 스웨이지는 그 작은 눈으로도 절절한 아픔과 개구쟁이 같은 장난끼를 잘만 표현합니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준 미니 시리즈 ‘남과북’에서, 사랑하는 여인을 떠나보내며 馬上에서 그가 짓는 표정은, ‘아 저 사람은 앞으로 죽을 때까지 저 여자만을 사랑하겠구나’라는 마음이 얼굴로 변해서 나타난 것 같다....라고 제가 존경하는 방송작가 선생님 한 분이 말씀하셨더랬습니다.)

    Dances with Wolves가 1991년 아카데미 상을 싹쓸이한 건 심사위원들의 알량한 면죄욕구를 충족시켜 준 덕이라는 것이, 남을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일부 구경군들의 반응이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이 영화가 증명한 미국사회의 힘은 자신의 과거를 깎아내리는 고발능력에 있다기 보다는, 거기에 상을 주는 위선의 능력에, 스스로의 추악한 면을 반성하면서도 역사를 통째로 추악한 것으로 단정하지 않을 줄 아는 성숙함과 다양성 속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나라는 천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세계 다른 곳에서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만큼 철저하고 비인도적인 노예제도를 가졌었습니다. 춘향전은 조선시대 노예제도의 모순을 개인의 아픔으로 환원시키고 있고, 그 점에 있어서 ‘왕의 남자’도 곁길로 크게 벗어나지는 않습니다.  Dances with Wolves는 개인사의 아픔으로부터 한 사회의 역사적 통증을 끄집어냅니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가해자는 뚜렷한 얼굴이 없습니다. 그것은 특정한 세력이나 파벌이 아니고, 심지어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군인들만이 아닌, 미국으로 이민 온 백인 조상들 전체입니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에는 다른 곳에서 보기 힘든 특유한 표현으로, ‘우리’가 두 종류 있습니다.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포함하는 ‘우리’를 kita라고 합니다. ‘우리 함께 갑시다’라고 할 때의 우리가 여기 해당합니다. 이것과는 달리, 말하는 사람을 제외한 ‘우리’, 즉 ‘너 말고 우리’를 말할 때는 kami라는 표현을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 남편’이라고 할 때, 또는 ‘우리 편이 너희 편을 이겼다’라고 할 때의 ‘우리’는 kami에 해당되겠습니다. 영어의 We는 Kita인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에, 우리 말의 ‘우리’는 그보다 훨씬 많은 경우에 Kami를 (심지어 요즘에는 그냥 ‘나’를) 의미합니다. 그러다 보니, 영어를 썩 잘하는 사람들조차 영미 사람들이 사용하는 것보다 더 많이 ‘we'라는 주어를 남발하는 경향이 발생합니다.

    Dances with Wolves의 주인공이 백인이라는 점은 의미심장합니다. 우리 자신의 과거 추악했던 모습을 다루되 개인사가 아닌 총체적인 시각으로, “그 자식들”이 “우리(Kami)”를 괴롭혔던 어떤 일이 아니라 “우리(Kita)”가 공유하는 자화상으로, 손빨래로라도 빨아가며 지고 가야만 하는 우리 자신의 양심을 담아서 그려낼 정도로 성숙한 영화를 언제쯤, 만나볼 수 있을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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