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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왕사신기(2007, 드라마)

posted Jan 2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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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BC 드라마 <태왕사신기>는 고구려 근초고왕의 아들인 태자 담덕이 먼 옛날 하느님의 아들 환웅이 남겼다는 네 개의 신물을 찾고 광개토대왕으로 성장하는 이야기를 줄거리로 삼고 있습니다. 이 드라마는 <여명의 눈동자>, <모래시계> 등 으로 한국 드라마사에 큰 획을 그은 김종학-송지나 콤비가 만든다는 점과, 400억원을 넘게 쏟아부어 사극과 환타지를 결합하는 새로운 시도라는 점 때문에 방영 이전부터 많은 관심을 끌었습니다.


    공을 들이고 돈을 들인 덕분인지, 태왕사신기에는 눈길을 끄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잔듸를 밟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종종 화면 속에 등장하는 사극을 시청하며 자란 저로서는 고구려 국내성을 재현해 놓은 초대형 세트를 보는 것만으로도 무량한 감개에 젖기에 충분했습니다. <태왕사신기>가 지닌 가장 큰 미덕은 아마도 태자 담덕이 고구려의 강역을 넓혀나가는 목적을 사해동포적 세계관으로 찾고 있었다는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의 발자취를 따라 새로운 역사관과 문화를 창조해낸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비견할 만한 고구려 청년왕의 일대기를 드라마와 더불어 상상해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역자 연호개를 처단하는 대목에서 담덕은 형제의 의를 맺은 거란을 손바닥 뒤집듯 적대시합니다. <태왕사신기>가 묘사하는 거란과 말갈의 모습은 형제라기 보다는 미개한 야만족이어서, 담덕의 이런 행동은 지당해 보입니다. 팔은 간단히 안으로 굽는 것이죠. 이런 대목에서 아쉽게도, 이 드라마는 자기 주인공이 드라마 속에서 표방하는 사해동포 정신을 따라잡지 못하겠다는 것을 스스로 실토하고 맙니다.


    야심찬 시도에도 불구하고, <태왕사신기>는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는 못했습니다. 새로운 것을 보여주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잘 압니다만, 그래도 이 드라마는 너무 안일하게 너무 많은 기성의 이미지와 아이디어를 가져다 썼더군요. 송지나 작가는 <모래시계>에서도 <The Godfather>, <The Untouchables> 같은 영화의 장면이나 구성을 솜씨 좋게 빌려다 쓴 적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땐 소도구적 차용이라는 느낌이 짙었습니다. 그러나 <태왕사신기>에는 <Harry Potter>와 <The Lord of the Rings>의 그늘이 너무 깊고 짙게 드리워져 있더군요.


    자신의 진정한 능력을 몰랐고, 설사 알았더라도 집에서는 감춰야 하는 십대의 소년. 그는 하늘의 예언에 의해 선택받은 자였습니다. 청년으로 성장한 그는 평생 그를 괴롭혀온 불사의 마법사와 최후의 대결을 펼쳐야 합니다. <태왕사신기>의 격구장이 우리나라의 어떤 옛 스포츠 현장보다도 막상 호그와트의 퀴디치 경기장을 닮아 있었던 건 단순한 우연일까요?


    한편, 진정한 ‘왕의 귀환’이 테마입니다. 물건 속에 봉인된 절대적인 힘을 둘러싸고, 그것을 차지하기 위한 전쟁이 벌어집니다. 지팡이를 든 백의의 마법사가 지혜와 마법으로 주인공을 도와줍니다. 그의 주변에는 도끼를 잘 다루는 종족의 대표와 활을 귀신같이 쏘는 친구가 있습니다. 악의 화신인 마법사는 세상의 모든 정보를 보고 들어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사악한 의도를 통해서만 정보를 해석하기 때문에 그의 오만함은 오히려 그의 가장 큰 약점이 됩니다. 그런 점에서 사우론과 최민수는 형제지간처럼 보입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두개의 천년’ 운운하는 생소한 표현도 110을 ‘Eleventy’라는 새로운 조어로 표현했던 J.R.R. 톨킨의 그늘 속에서 발아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더군요.


    본격적인 ‘신물 찾기’ 경쟁이 벌어지면서부터는 아더왕의 성배 기사단 이야기를 연상시키는데, 아니나 다를까, 최고의 능력을 가진 왕의 기사는 왕의 여자를 마음 깊이 사모합니다. 청룡의 신물을 지닌 처로는 마치 트리스탄과 호수의 기사 랜슬롯을 합쳐놓은 듯한 이미지였습니다. 백제의 성주가 왕의 기사로 활약한다는 설정 자체가 중세 유럽의 분위기를 짙게 풍기죠. 신물을 찾아 평화로운 세상을 열겠다는 기사들의 이야기에 한 몫 끼지 못했다면 아더왕이 서운했을 테지만. 여하튼 이상의 모든 요소들 때문에 모처럼의 환타지 대하 사극은 서구적 정서와 이미지와 논리를 담은 기묘한 변종 드라마, 또는 극화한 컴퓨터 게임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그 결말은 졸렬하기 짝이 없습니다. 마지막회를 본 시청자들은 흑주작처럼 폭주했고, 심지어 ‘낚였다’며 배신감을 토로하기도 했죠. 그 원인을 몇 가지 생각해 봅니다.


    우선, 제작일정에 쫓긴 졸속이 쌓이고 쌓여 마지막에 그 모습을 드러냈을 겁니다. 송지나 작가의 원래 대본을 살펴보면 실제로 방영된 것만큼 에멜무지로 대충 만든 것 같은 느낌은 덜합니다. 그러나 이런 제작여건을 감안하더라도 결말의 졸렬함이 그다지 감해지지는 않습니다. 작가가 기교로 메울 수 없는 틈새가 이 드라마의 설정 속에 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The Lord of the Rings>가 보편적인 감동을 주는 까닭은 ‘권력의지’와의 싸움을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골럼은 권력의 맛에 길들여져 은퇴할 줄을 모르는 정치가들을 상징합니다. 애당초 프로도의 싸움은 반지를 파괴하기 위한 싸움입니다. 반지는 절대악을 상징했고, 그 파멸은 당연한 결말을 의미했습니다. 하지만 <태왕사신기>의 신물 찾기 경쟁은 모순된 설정이었습니다. 신물이 제 역할을 했다면 태왕은 하늘의 덕으로 치세를 얻은 것이니 영웅담이 될 수 없을 터입니다. 따라서 신물들은 사라지거나 부서져야 할 운명이었는데, 그것이 부숴져야 할 필연성을 관객에게 설득시키는 것은 난망한 일이었습니다. 광개토왕은 토굴집으로 돌아간 호빗이 아니라, 민족 최대의 강역을 싸움으로 얻어낸 정복군주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의 드라마를 보는 이유도, 싸워 이기고 ‘우리 것’을 넓힌 그를 통해서 대리만족을 얻으려는 것이죠. 우리 속의 권력욕과 소유욕이 광개토대왕을 회고하게 만드는 겁니다


    정치적으로 말해, 자신의 영역을 넓히려는 욕심은 나쁜 것이 아닙니다. <태왕사신기>에서처럼 순수하게 이웃을 이롭게 만들려는 마음과 왕좌를 사양할 만큼 성숙한 자세로 그것을 실현시킬 수만 있다면 그것은 참 좋은 일이기도 하겠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역사를 신화로 채색하는 건 생각보다 위험한 일입니다. 독일의 신화를 예술의 현장에 이끌어낸 이는 바그너였고, 정치기술에 접목시킨 자는 히틀러였습니다. 히틀러가 젊은 시절 바그너의 작품에서 큰 감동을 받았던 건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신화와 역사를 버무려 섞는 행위에서는 정복의 논리라는 음험한 프로파간다의 냄새가 납니다.


    제국주의의 아픔을 경험한 우리가 이런 생각을 발전시키는 건 첫째 도덕적으로 옳지 못합니다. 환단고기라는 수상쩍은 책에 바탕을 둔 온갖 고대사적 자기과시를 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는 것을 저는 염려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보여주는 건 자긍심이 아니라 피해의식과 지배욕이 뒤섞인 비뚤어진 감정처럼 보이기 때문이죠. 둘째, 외교적으로 현명하지 못합니다. 중국에서는 한류의 열풍이 반한/혐한감정의 회오리바람을 낳고 있다죠. 사람 마음이란 다 비슷하기 때문에 이해를 못할 바는 아닙니다. 싫겠지요. 자기들보다 잘사는 조그만 나라 사람들이 잘난체 하는 것이. 그런 그들에게 <태왕사신기> 같은 드라마는 훨씬 더 노골적으로 읽힐 것이고, 필시 드라마의 성공에 곱절로 비례하는 부정적인 반응을 낳을 것입니다.


    중국이라는 큰 나라가 덩지 값도 못하는 동북공정 따위 짓거리를 한 것을 저는 비웃습니다. 그것은 결국 자충수가 되어 중국에게 돌아갈 것이기 때문입니다. 최근 들어 유난히 고구려 드라마가 범람한 것은 아마 중국의 동북공정에 대한 반발이었을 겁니다. <주몽>(MBC, 2006~2007), <연개소문>(SBS, 2006~2007), <대조영>(KBS1, 2006~2007), <태왕사신기>(MBC, 2007) 등이 연달아, 또는 동시에 방영되었죠. 신라중심의 역사에서 한번쯤 외출해 보는 것은 상쾌한 경험입니다만, <태왕사신기>처럼 신화와 역사를 접목하는 일은 금단의 영역으로 남겨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소위 ‘드라마 동북공정’ 같은 짓을 하는 것은 중국처럼 미련하게 구는 것이고, 우리 고대사의 진실성에 스스로 먹칠을 하는 것입니다. 아무래도 신화는 이야기 속에 남아있는 편이 좋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사족


1. 배우들


    특히 유승호(담덕) 박은빈(기하) 심은경(수지니) 세 사람의 아역배우들이 마음에 쏙 들었습니다. 조금 과도하게 정형적이다 싶은 최민수(화천회 대장로)의 악역도 함께 출연한 박상원(연가려), 장항선(흑개) 등 <모래시계>의 옛 멤버들을 바라보며 무상한 세월을 느끼는 맛으로 즐길 수 있더군요. 게다가 중견 탤런트 김미경(바손)을 비롯하여 연극무대와 은막에서 기본기를 다진 오광록(현고), 박정학(고우충), 박성웅(주무치) 등이 빛나는 조연을 펼쳐주어 드라마의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심지어 이지아(수지니)나 윤태영(연호개) 같은 신인들도 기대 이상의 호연을 보여주었습니다. ‘상냥한 욘사마’의 이미지로 일본열도를 휩쓴 배용준의 연기는 극 전체를 짊어진 주연 치고는 좀 지루하긴 했지만 안정감이 있었습니다.


    문소리는 훌륭한 배우입니다. 가까운 장래에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건져올릴 재목이 틀림없지요. 하지만 <태왕사신기>에서는 시청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미스 캐스팅이었습니다. ‘불의 신녀’가 가질법한 불같은 카리스마와 열정, 깊은 좌절을 연기해내는 그녀의 능력에 착안한 캐스팅이었다고 짐작됩니다만, 글쎄요. 별의 정기를 받아 태어난 두 남자를 철천지 연적으로 만듬직한 수수께끼같은 매력을 그녀는 가지고있지 않거나, 또는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여지껏 배우 문소리가 ‘우리 주변에 있음직한’ 인물을 연기하는데 탁월한 재능을 보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그녀의 역할이 거슬렸던 점은 배우보다는 제작진을 탓하고 싶습니다.


2. 사전제작제


    에피소드들의 균형이 맞지 않고 후반부로 갈수록 지리멸렬하는 현상은 사전제작제도의 부재가 불러온 필연적인 문제인 것 같습니다. 쪽대본을 써가며 졸속으로 제작되는 한국드라마의 현실은 수백억 예산을 쓰는 대형드라마도 비켜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좀 재미가 있을라 치면 어김없이 시청율을 의식한 ‘잡아 늘이기’가 시작되고, 후반부에는 지루해지기 다반사인 겁니다.


    그런데 참 희한하죠? 아시아 지역을 휩쓸고 있는 한류 드라마의 성공요인이 뭘까 궁금해서 이웃나라들의 반응을 살펴보면 더러 ‘사전제작제의 부재’가 성공요인으로 꼽히곤 합니다. 특히 일본 쪽에서 그런 평가가 많은데, 시청자들의 반향을 살펴가며 줄거리와 등장인물의 비중을 수정해 나가기 때문에 수요자의 구미에 맞는 드라마를 생산할 수 있다는 분석입니다.


    한류의 성공요인에는 여러 요소가 있겠습니다만, 만일 ‘사전제작제의 부재’가 성공요인에 속하는 게 맞다면 그건 한국 드라마의 거품현상에 속하는 약점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식으로 제작되는 드라마는 결국 길 잃은 배처럼 무슨 이야기를 하려던 건지 잘 모르게 되기 마련입니다. 탄탄한 기승전결은 모든 드라마의 생명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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