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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1/2 Weeks

posted Jul 10,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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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여지껏 본 영화 중에서 가장 야한 영화는 Nine 1/2 Weeks였습니다. 뉴욕에서 미술관을 운영하는 이혼녀가 잘생긴 독신 주식중개상을 만나 성적 일탈과 해방과 실망과 좌절을 경험하는, 1986년 영화죠. 제 후배의 주장에 따르면, 저는 주로 입술이 얇은 여자들더러 예쁘다고 한답니다. 어쩌면 그 말이 사실인지, 저로서는 킴 베이싱어가 미인이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습니다. 딱 한 번, Nine 1/2 Weeks에서의 그녀를 제외하면 말이지요.


    그러고 보니 공교롭군요. 제가 생각하기에 9 1/2 Weeks는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이 지금까지 내어놓은 영화들 중 가장 낫기도 합니다. 영국 캐임브리지 태생의 라인 감독은 CF감독출신으로 영화계에 입문했습니다. 그와 비슷한 또래의 영국인이자 CF감독 출신이라는 공통점도 가진 토니 스코트 감독(리들리 스코트의 동생)의 영화들은 “CF감독출신다운 영상미로 승부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짓눌려 있는 것처럼 상투적이고 답답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에이드리언 라인은 스타일리스트지면서 작가적 재능 또한 갖추고 있다고 평가될만 합니다.


    역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킴 베이싱어가 연기다운 연기를 한 영화도 이 영화 단 한 편이 아닌가 싶고, 미키 루크가 가장 멋지게 나왔던 영화도 이 영화 같습니다. 어쩌면, 이들 풋내기 배우들로부터 그만큼의 연기를 끌어낸 것이 에이드리안 감독의 조련사로서의 능력이 아니었나 싶기도 합니다. 실제로 라인 감독은 두 주연 배우들이 촬영장 밖에서 따로 만나는 것을 엄히 금지하고, 각자에게 상대방에 대한 요상한 ‘뒷담화’를 전해줌으로써 주연배우들이 서로에 대한 미묘한 감정상태속에 있도록 조장했다고 합니다. 킴 베이싱어는 영화 촬영이 끝난 후 감독의 이런 행동에 진절머리를 냈다더군요.


    라인 감독은 이런 식으로 배우들을 진이 빠지게 만들면서, 죽어도 영화 내용과 동일한 시퀀스로 촬영해야 한다고 주장하여(보통은 앞뒤로 왔다 갔다 하며 찍습니다) 배우들이 감정적으로 지쳐가는 것을 카메라에 담아냈답니다. 주인공들이 넌더리를 낼 법도 하죠. 그들이 그 뒤로는 이 때만한 연기력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키 루크의 경우는 좀 더 심각합니다. 80년대 후반 전세계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게 만들던 그는 90년대에 돌연 어린 시절 익혔던 권투를 하겠다며 영화계를 떠났습니다. 자기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아 떠나는 그에게 박수를 보낼 마음이 제게는 있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인기절정에 있던 탤런트 최재성씨가 권투를 하기 위해 연예계를 떠났을 때도, 연극 에쿠우스에서 보여준 그의 폭발적인 연기력이 채 못다 피는 것을 안타까와 하면서도 갈채를 보냈듯이.


    그런데 미키 루크는 권투로 완전히 망가진 얼굴을 해 가지고 다시 연예계로 복귀했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아쉬운 일에 해당하겠습니다만, 정말 비극은 그가 ‘꿈을 뒤쫓다가 망가진 얼굴’을 훈장처럼 그냥 두지 않고 수 십번의 성형수술로 아예 눈뜨고 바라보기 어려운, 괴상망측한 지경으로 만들어놨다는 데 있습니다. 최재성씨가 그 정도로 망가지지 않고 복귀한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입니다. 꿈을 찾아서 현재의 영광을 미련 없이 박차고 떠났다가 뒤늦게 예전의 자리로 복귀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는 일은 뭐랄까요, 탈옥한 빠삐용이 다시 붙잡혀 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는 동료죄수 드가의 심정만큼이나 서글픈 것입니다.


    대학생 시절에 신촌의 재개봉관에서 친구들과 Nine 1/2 Weeks를 보면서, 저는 에이드리언 라인 감독이 혹시 화가 출신이 아닐까 궁금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의 화면들은 매력 있었습니다. 폭우가 몰아치는 뒷골목에서 벌이는 정사장면이라든지, 음식을 먹는 행위가 저토록 선정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상기시켜준 두 주인공의 ‘음식장난’ 장면들이 특히 그러했습니다. 냉장고 앞에서 두 사람이 먹을 것을 가지고 장난치는 장면은 이제 영화 에로티시즘의 고전적인 아이콘이 되어버렸을 정도지요.


    하지만, 이 영화에서 제 기억에 가장 깊이 남은 것은 정작 에로틱한 장면들이 아닙니다. 화랑 주인인 엘리자베스(킴 베이싱어)는 전시할 작가를 물색하다가 판즈워드라는 화가의 작품을 접하고 감동을 받습니다. 화가를 직접 찾아가 전시를 권유하기로 한 그녀는 그의 작업실로 찾아갑니다. 이 무렵 그녀는 점점 변태적으로 변해가는 존(미키 루크)과의 성적 일탈에 대해 회의를 품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이 지점까지 영화는 지극히 세련되고 값비싼 도회적 풍경과 인공조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멀리 떨어진 교외의 호수가에 고즈넉히 자리잡은 노화가의 작업실 풍경은, 관객들에게 놀이동산의 롤러코스터에서 막 내려 땅을 밟은 것 같은 현기증을 전달해 줍니다. 아크릴화 그림들 사이에 달랑 한 점 내걸린 수채화 같은 이 장면을 통해서, “내 삶이 너무 추잡한 것은 아닐까”라고 느끼는 엘리자베스의 느낌이 굳이 대사 없이도 전달되어 오는 것이죠.


    썩 내켜하지 않는 판즈워드씨를 설득하여 전시회가 개최되던 날, 개막행사는 성대하고 요란하게 치러집니다. 뉴욕 바닥의 온갖 위선적인 예술애호가들이 샴페인잔을 들고 떠들어대는 갤러리의 한쪽 구석에서 불편하고 당황해하는 화가 판즈워드씨를 멀찍이 바라보던 엘리자베스는 죄책감과 자기연민이 뒤섞인 시선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개막식에 모인 선남선녀들중 아무도 그 눈물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당연합니다. 하지만 긴 설명 없이도, 관객들은 그 눈물이 뜻하는 바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인공의 흉중에서 소리 없이 일어나는 심리상태의 변화에 관객을 동참시키는 시퀀스로서, 저는 이보다 더 모범적인 사례를 아직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많은 영화의 주인공들이 그저 저혼자 웃고, 저혼자 울지요.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예술이 상업화되는 것이 얼마나 안타깝고 역겨운 일인지를 이 만큼 시각적으로 강렬하게 드러내 보여준 영화도 없었습니다. 역설적이지만, 이 영화가 본질적으로 에로물이었기 때문에 그 메시지는 더더욱 강렬합니다.


    사설이 길었는데, 제가 정말 하려던 이야기는 이런 것이었습니다. 존이나 엘리자베스처럼 화려무쌍한 성적 모험이 없더라도, 우리를 옭아매고 있는 일상은 한 발 벗어나 밖에서 들여다보기 전에는 그것이 얼마나 유치하고 천박한지를 알아채기가 어려운 잡답(雜沓)입니다. 좀 더 요즘 아이들 식으로 얘기해 볼까요? 붉은 알약을 먹고 깨어나는 결단을 내리기 전에는 메트릭스(Matrix)가 가짜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장자의 호접몽(胡蝶夢)을 ‘시뮬라크르와 시물라시옹’이라는 인식론의 범주에서만 바라보는 습관은 현대철학의 폐단입니다. 윌 듀란트가 불평한 것처럼, 오늘날 인식론은 철학의 몸뚱아리 전체를 유괴해가 버린 셈이죠. 장자가 나비 꿈을 꾼 것은 그가 자연과의 물아일체(物我一體) 경지를 경험한 것을 상징합니다. 장자처럼 자연과의 우주적 일체까지를 경험하지는 못하더라도, 좀 더 넓은 맥락 속에서 자신을 내려다 볼 때, 부족한 자신의 모습은 더 확연히 잘 보입니다. 영화를 관람하는 일은, 이런 연습을 하기에 제법 좋은 취미인 것 같습니다.


    9 1/2 Weeks라는 에로틱 멜로영화의 격조를 단숨에 높여주었던 ‘판즈워드의 작업실’ 장면은 제 머리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습니다. 덕분에, 사소한 문제로 미간이 찌푸려질 때, 편두통 환자가 두통약을 삼키듯이 저는 눈을 감고 이 장면을 떠올립니다. 은퇴한 뒤에도 한참 더 살 수 있다면, 모르긴 해도 저는 물가에서 개를 키우며 낚시를 하면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물감값을 조달할 수만 있다면 서툰 그림도 좀 그려보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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