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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teen Conversations about One Thing

posted Apr 04,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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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만한 영화들에 관한 얘기지만, 차근차근 해 보죠. 로버트 알트만이라는 감독은 06년에 작고했습니다. Mash를 제외하면, 저는 그의 영화들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닙니다. 하지만 개성을 그만큼 일관되면서도 세련되게 유지하는 작가가 많지는 않다는 점에서, 그는 높은 평점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The Player(‘92) 무렵부터, 그는 수많은 스타급 배우들이 등장하는 자잘한 이야기들을 모아 큰 그림을 완성하는 식으로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만년의 알트만의 작품들은 그의 명성이 헐리우드에 가지는 영향력의 전시장이기도 했죠. 작게 조각난 이야기들이 모여 전체를 이루는 서사구조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자연스레 그의 이름이 제일 먼저 떠오릅니다.


    90년대초, 천재급 왕수다 떠벌이 감독 한명이 나타납니다. 고교를 중퇴했지만 아이큐가 160을 넘는다는 퀜틴 타란티노는 Reservoir Dogs로 주목받기가 무섭게 Pulp Fiction으로 94년 칸느에서 황금종려상을 거머쥡니다. 비디오 가게에서 점원노릇을 하며 드라마투르기를 익혔다는 그의 이력은, 그의 영화를 보면 대번에 실감이 납니다. 그의 영화는 온갖 싸구려 영화(B-movies) 특유의 상투성이 잡종교배하듯이 뒤섞여 새로운 뭔가를 만들어내거든요. Pulp Fiction은 총잡이 둘, 권투선수, 건달의 아내와 강도들의 이야기를 조각그림 맞추듯 진열한 하드보일드 액션물이었습니다. 이 영화에는 몇 가지 두드러진 특징이 있죠. 저급한 상투성이 재인용과 복제를 거쳐 포스트모던한 개성을 지닌 등장인물로 재생되었다는 점, 주류영화에서 과거 볼 수 없던 수준의 폭력을 버젓이 담고 있다는 점, Memento나 <박하사탕>처럼 시간의 진행을 허무는 비선형(non-linear) 진행구조라는 점 등입니다. 다 재미있는 특징입니다만, 제가 하려는 이야기는 이런 것들에 관한 것은 아닙니다.


    Pulp Fiction은 전혀 상관없어 보이는 여러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엇비슷한 비중으로 풀어놓았다는 점에서 알트만의 방식을 언뜻 떠오르게 하는, 그런 특징도 가지고 있거든요.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이내 드러납니다. 알트만의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주요한 사건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반응’하는 군상들입니다. 감독이 하려는 이야기는 정해져 있고, 이들은 그것을 여러 방식으로 보여주는 도구들인 것이죠. 그런 의미에서 알트만 영화의 등장인물들과 줄거리가 맺는 관계는 다대일 함수적이고, 서사구조는 연역적이며, 결말을 향해 닫힌 구조입니다. 반면, Pulp Fiction의 등장인물들을 서로 엮어주는 사건은 우연에 불과하고, 이들은 본질적으로 완전한 남남입니다. 이들이 서로 맺는 관계는, 혼돈스럽고 우연하다는 점에서 프랙탈적이고, 이들의 행동은 귀납적이면서, 허탈할 만치 열린 서사구조 속에 있다고 할까요. Pulp Fiction이 보여주는 삶은 어디로 굴러갈 지 예측할 수 없어서, 관객들은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기괴한 사건들의 연속을 목격하게 됩니다.


    최근에는 심심치 않게 ’조각그림식 서사구조‘를 가진 영화들이 눈에 뜨입니다. 조만간 식상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자주 말이죠. 그런 생각을 하던 터라, 저는 Crash가 06년 아카데미 작품상을 탔을 때 좀 실망했고, 07년 후보작에 올랐던 Babel에까지 상을 안겨주기는 어려울 거라고 짐작했었습니다.


    조촐한 제작비로 만들어져 작품상이라는 대박을 터뜨린 Crash는, LA에서 이틀간 여러 사람들이 겪는 사건들을 날줄과 씨줄로 엮습니다. 약물에 찌든 모친과 범죄자인 동생을 둔 흑인 형사, 친구와 함께 자동차를 훔치는 그의 동생, 아시아인을 함부로 대하는 히스페닉 여형사, 정치적 야망을 가진 백인검사, 유색인종을 혐오하는 그의 아내, 흑인들에게 치를 떠는 백인경찰, 그에게 수모를 당한 흑인 영화감독 부부, 영어가 서툰 이란계 이민자, 그의 자물쇠를 수리해준 히스페닉 수리공과 그의 어린 딸 등등. Crash가 이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하나의 줄거리로 엮어내는 솜씨는 뛰어납니다. 하지만, 이 영화에 담겨 있는 인종적 편견은 농도가 좀 지나쳤죠. 저는 이 영화의 등장인물이 보여주는 정형화(stereotype)가 역겨울 만큼 단세포적이라고 느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선악과 편견이 뒤섞이고 등장인물의 복잡한 성격이 드러나는 클라이맥스 대목은 한편으로는 뜬금없고, 또 한편으로는 잘난 체하며 관객들을 가르치려는(patronizing) 태도처럼 느껴지더군요.


    좀 더 최근 영화인 Babel은 무대도 넓습니다. 모로코, 미국, 멕시코, 일본을 넘나들며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우연한 오해가 우리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줍니다. 테러사건으로 규정되어 버리는 총기오발사고, 멕시코로 여행 갔다가 재입국에 곤란을 겪는 미국인 등, 이 영화는 9-11사건 이후 변해버린 세상을 그려내고 싶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너무 야심적이었던 걸까요? 한 편의 영화가 응당 가져야 할 응집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미완성 단편영화의 짜깁기처럼 느껴집니다. 특히 일본의 이야기는 구색을 맞추려는 것처럼 겉돕니다. 지루한 영화는 아니지만, 영화를 보다 보니 왜 이 이야기들을 한 편의 영화에 쓸어 담으려고 했는지 궁금해지더군요. Babel은, 이런 식의 서사구조가 그리 만만한 방식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해 주는 영화입니다.


    76년생 그레그 막스가 감독한 11:14는 훨씬 더 치졸한 오락영화지만, 더 짜임새 있게 이런 방식을 활용했습니다. 치기가 넘친 나머지 작위성이 너무 드러나는 게 흠이긴 한데, 이 영화는 목에 힘을 주거나 영화제를 겨냥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아서 오히려 별로 흠잡고 싶은 생각은 안 들더군요. 제 친구라면 저에게, 너 임마 레이첼 리 크룩이 나오니까 너그러운 거 아니냐고 따질 법도 하겠으나, 그런 건 아니올시다. 이 영화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시신을 둘러싸고 여러 인물들이 펼치는 이야기가 밤 11시 14분이라는 시간을 정점으로 한 곳으로 모이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고 느꼈던 것은,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비선형구조와 조각그림식 내러티브가 어느새 27살 새내기 감독이 익숙하게 사용할 만큼 낡은 유행이 되었구나 하는 점이었습니다.


    조각그림 같은 구조를 가진 영화들 중에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철학을 전공한 신예 여류감독 질 스펜서의 01년 영화 Thirteen Conversations about One Thing입니다. 출세가도를 달리는 변호사(매튜 메커너히), 인생을 바꾸고 싶은 보험회계사, 물리학 교수, 직장동료를 시기하는 회사원, 남편을 의심하는 여성, 기적을 바라며 힘겹게 살아가는 낙천적인 청소부 등의 삶을 담은 영화입니다. 이들의 내밀한 일상을 쫓다 보면 어느덧 이들의 삶은 우연의 끈으로 연결되어 있고, 우리 인생을 좌지우지하는 것은 바로 이 우연이라는 이름의 불확실성임이 드러납니다.


    우리를 타인의 삶과 연결했다가 또 어느 순간 그 연결을 거칠게 뚝 끊어버리기도 하는 우연이라는 괴물의 실체를, Thirteen Conversations about One Thing은 차분한 솜씨로 그려냈습니다. 이 영화는 특이한 서사구조 덕분에 우연의 불확실성에 관한 것으로 읽히기도 하고, 정반대로 인연의 질긴 끈에 관한 것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서양에서 운명의 여신은 운명의 실타래를 엮어 옷감을 짜는 모습으로 묘사되죠. 이 영화는 여러 인생의 가닥으로 참하게 짠 한 폭의 장식용 직물(Tapestry)같은 느낌입니다. 너무 소란하지 않지만 깊은 슬픔을 담은.


    이 영화에서 결정적인 우연은 자동차 사고입니다. 우연히도, 영어에서는 사고도 accident고 우연도 accident죠. 어쩌면 모든 우연은 사고와 흡사한 건지도 모릅니다. 언젠가, 탤런트 김혜자씨가 사랑은 자동차 사고 같다고 말한 기억이 나네요. 차사고가 나이나 상대방을 가려가면서 일어나 주는 게 아니라는 의미였을 텐데, 그녀 자신의 절절하고 남모를 인생경험이 묻어나는 비유처럼 느껴져 감탄하며 기억의 옷깃에 적어 두었더랬습니다. 만일, 우연이 정말로 불행한 사고 같기만 하다면, 조심하며 지내는 사람에게 슬픈 우연은 덜 찾아오는 건지도 모릅니다. 제발 그렇기라도 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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