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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llow Man

posted Sep 08,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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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덜란드에서 미국으로 건너와, 폭력과 섹스가 난무하는 영화로 유명해진 폴 버호벤 감독은 2000년에 투명인간을 소재로 Hollow Man이라는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이 영화는 그때까지 그가 미국에서 감독한 영화들 중에서 유일하게 처음부터 R 등급을 받은 영화였습니다. 이전 영화들은 일단 NC-17이나 X 등급을 받고, 심한 장면들을 삭제한 뒤에야 등급이 조정되곤 했었거든요. Robocop, Total Recall, Starship Troopers 등 SF 분야에서 색다른 재능을 보였던 그가 Basic Instinct, Showgirl 같은 에로틱 스릴러로부터 다시 SF로 복귀한 셈입니다. 그러나 Hollow Man은 등급만 내려간 게 아니라 영화의 짜임새나 신선미도 한 계단 낮아졌다는 점이 아쉽죠. 결론부터 말하자면, Hollow Man에서 칭찬이 아깝지 않은 부분은 특수효과 뿐입니다.


    Hollow Man은 과거에 보던 영웅적인 투명인간들과는 달리, 실험에 성공한 후 점점 더 도착적이고 변태적이며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과학자를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마블 코믹스보다는 지킬과 하이드 류에 뿌리를 둔 이야기라고 할까요. 투명인간에 대한 상상력은 본질적으로 엿보기(voyeurism) 같은 도착적 심리와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영화는 흥미로운 반영웅의 비극을 그려낼 수 있는 잠재력을 지녔습니다. 영화의 전반부는 - 고릴라 실험장면 같은 놀라운 특수효과를 포함해서 - 큰 기대감을 선사합니다. 그런데 그만 후반부로 가면서 13일의 금요일 같은 슬래셔 무비 흉내로 전락하고 말죠.


    주인공 세바스쳔 케인 박사 역을 맡은 케빈 베이컨은 연기의 폭이 넓은 배우입니다. 게리 올드먼이나 키퍼 서덜랜드만한 카리스마는 없지만, 그는 우리 주변에 정말 있을 법한 악당 역할을 잘 소화합니다. 그런가 하면 선량한 역할도 잘 어울리죠. 1958년생인 그는 스무살에 배우로 데뷔해서 지금까지 60여편의 영화 및 TV 드라마에 출연했습니다. 착실히 성장한 주연급 배우 치고도 상당히 많은 영화에 출연을 한 거죠. 60여편이라는 출연 편수는 거의 클린트 이스트우드(1930년생)와 맞먹는 숫자거든요. 현존하는 최고령 주연급 배우라고 할 수 있는 커크 더글러스(1916년생)의 출연작도 90편이 채 되지 않습니다.


    "케빈 베이컨 이론"을 들어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영화에 함께 출연한 관계를 1단계라고 했을 때, 모든 할리우드 배우들은 케빈 베이컨과 여섯 단계 이내로 연결된다는 겁니다. 로버트 레드포드는 Out of Africa에서 메릴 스트립과 주연을 맡았고, 메릴 스트립은 케빈 베이컨과 River Wild에 함께 출연했으므로 로버트 레드포드는 케빈 베이컨과 2단계 만에 연결되는 겁니다. 찰리 채플린도 그와의 거리는 3단계에 불과합니다. www.cs.virginia.edu/oracle에서 한번 실험해 보시죠. 박중훈이 The truth about Charlie에 출연하면서 충무로 배우들을 할리우드와 연결하는 가교가 되었기 때문에, 상당수 우리 배우들도 케빈 베이컨 이론에 들어맞습니다.


    케빈 베이컨 6단계 이론(six degrees of Kevin Bacon)의 주인공이 왜 하필 케빈 베이컨이 되었는지는 분명치 않습니다. 90년대 인터넷 뉴스그룹이 농담처럼 시작한 놀이였으니까요. 50만명 이상의 배우와 30만편 이상의 영화가 등록되어 있는 미국 영화계 네트워크를 수학적으로 분석해 보면, 공동출연이라는 기준만 가지고 보자면 모든 배우들과의 평균거리가 가장 가까운 배우는 크리스토퍼 리라고 합니다. 이 기준으로 보면 케빈 베이컨은 순위가 1049등에 불과하다는군요. 앤소니 퀸, 찰톤 헤스톤, 진 헤크만, 숀 코너리 등도 그보다는 순위가 높습니다. 소위 ‘수학적 중심배우’에 해당하는 크리스토퍼 리가 출연한 영화는 무려 257편이나 됩니다. 그러나 출연 편수가 많다고 저절로 영화 네트워크의 중심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벅스 버니의 성우였던 멜 블랑은 공식 출연 편수만 709편이라니까요. 참고로, ‘베이컨 수’의 평균은 2.957이라서, 대부분의 배우들은 그와 6단계는 커녕 3단계 미만으로 연결이 되는 셈입니다.


    2002년 KAIST 물리학과 정하웅 교수는 하이텔 영화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된 8천여명의 한국 영화배우의 네트워크를 조사했습니다. 2002년 말 현재 우리나라에는 6402편의 영화와 7906명의 배우가 등록되어 있었다는군요. 최다 출연 편수를 자랑하는 배우는 신성일입니다. 그는 무려 492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2등인 김지미의 335편을 큰 낙차로 따돌립니다. 한편, 함께 출연한 배우가 가장 많은 배우는 조연 전문배우 이석구입니다. 하지만 정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한국 영화네트워크의 허브는 신성일도 이석구도 아닌 박용팔이라고 하죠. 참고로 박용팔 수의 평균은 2.06이고, 평균거리에서 안성기가 8등, 신성일이 9등이라더군요.


    케빈 베이컨 게임은 ‘작은 세상 이론’을 활용한 놀이입니다. 일견 허황되어 보이는 이 ‘작은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이 실은 인간의 두뇌가 사용하는 네트워크의 방식이라고 하는군요. 60 년대 헝가리의 괴짜 수학자인 에르도쉬는 그래프이론을 이용해서 ‘사소한 연결이 존재하기만 해도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을 수학적으로 보였습니다. 이론상 일인당 24명씩의 사람들만 알더라도 지구상의 60억 인구가 모두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이죠. 그 직후 미국 하버드대학 사회심리학 교수이던 스탠리 밀그램은 실험을 통해서 인간사회가 서로 연결되어 작동하는 방식이 짧은 단계로 연결된 작은 세상의 네트워크라는 사실을 설명하는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의 이론은 세상에 ‘6단계 거리(Six Degrees of Separation)’라는 별명으로 알려졌습니다.


    다시 몇 년 후, 존스홉킨스 대학의 그라노베터 교수는 사회 네트워크가 강한 연결(strong ties)보다 오히려 약한 연결(weak ties)에 의해서 원활히 작동한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쉽게 말해서 누군가 직장을 구할 때, 그와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강한 연결 관계에 있는 사람들은 정작 대부분 그와 동일한 정보를 공유하고 있는 반면, 어쩌다 아는 사이인 약한 연결 관계에 있는 사람들로부터 더 실용적인 정보와 도움을 받게 된다는 것이죠.


    특히 우리나라에서 ‘작은 세상’ 이론은 생각보다 훨씬 더 잘 작동합니다. 인구의 상당수가 대학교, 군대, 대기업처럼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이루어진 조직에 가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전산 IT 망이 세계에서 가장 빠르고 조밀하게 연결된 나라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어느 날 무작위로 만난, 비슷한 연배의 사람과 서너 다리를 건너도 함께 아는 사람이 걸리지 않기란 퍽 어렵습니다. ‘친구의 친구’가 아닌 사람을 만나기가 어쩌면 정말 그리도 힘든지에 대해서라면, 맞선을 자주 본 사람들로부터 실감나는 경험담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혹시 그래서 인연이란 말은 우리 사회에서 더 질기게 들리기도 하고, 때론 그래서 더 덧없이 느껴지기도 하는 걸까요?


    케빈 베이컨이 투명인간으로 나오는 Hollow Man을 보면서 저는 두 가지 생각을 떠올렸습니다. 첫째, 인간의 내면에는 보이지 않는 추악한 충동들이 숨어 있다는 것이고, 둘째, 그런 인간들이 좁은 세상에서 바글거리며 너나 할 것 없이 서로 연결되어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세바스쳔은 거울 앞에 서서 동료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거 알아?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되면 어떤 놀라운 일을 저지를 수 있게 되는지?” 결국 우리 모두는, 서로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인 셈입니다. 17세기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은 이렇게 노래했었죠. “인간은 누구도 섬이 아니며, 혼자서 완전할 수 없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요, 본토의 일부분일 뿐이다.... 나는 인류의 일부이므로, 그 누구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조종이 울리는지 묻지 말라. 그대를 위해 울리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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