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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de Runner

posted May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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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랍 신화에는 자기 작품과 사랑에 빠진 딱한 예술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피그말리온이라는 조각가는 숫기가 없는데다가 여자들에게 혐오감마저 가지고 있어서 연애와는 담을 쌓고 지내는 사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혼신의 힘을 기울여 대리석 처녀상을 만듭니다. 몇날 며칠을 자신의 걸작품만 바라보던 그는 그만 대리석 처녀의 미모와 기품에 반한 나머지 사랑에 빠지고 맙니다. 화장실에도 가지 않는 이 처녀의 모습에는 자신의 이상적인 여성상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거든요. 혼자 끙끙 마음의 열병을 앓던 그는 아프로디테 여신의 축제때 치성을 드립니다. 이를 가상히 여긴 미의 여신은 자신을 숭배하는 조각가의 마음을 헤아려 그의 소원을 들어줍니다. 축제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 보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이 얼굴을 붉히고 그를 맞아주더라는 얘깁니다. 그는 그녀에게 갈라테아라는 이름을 지어줍니다.


    남자는 다 도둑이라죠. 피그말리온의 이야기는 세상 남자들이 정도를 달리 하며 품고 있는 환상을 담고 있습니다. 남자들이란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난 대리석 처녀같이 순진하고 아름답고, 자기만 바라보는 여자를 꿈꾸는 경향을 누구나 조금씩은 가지고 있기 마련이죠. 잠자는 숲속의 미녀가 그렇고, 사람인 줄만 알았던 인조인간(숀 영)과 해리슨 포드가 사랑에 빠지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SF걸작 Blade Runner가 그렇습니다. 속편까지 만들어진 Mannequine이라는 코메디는 아예 피그말리온 이야기 자체의 각색입니다.


    숀 영이라는 배우는, 나중에 알고 보니 뭐 그렇게 까지 천상의 미를 간직한 미인은 아니었건만, Blade Runner에서 만큼은 인조인간을 만든다면 저보다 더 예쁘게 만들 수는 없을 것만 같은, 가슴 설레는 ‘화면발’을 보여줍니다. 그러고 보니, 나타샤 헨스트리지나 이영애 같은 배우들도, 웃고 떠들지 않고 무표정으로 있을 때가 훨씬 더 예쁘군요.


    아직까지도, Blade Runner보다 잘 만들어진 SF영화를 찾기란 어렵습니다. 이 영화는, 실감나는 SF를 만들려면 공들여 만든 배경이나 소품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되도록 아무 설명 없이 슬쩍 보여줘야 한다는 점을 증명한 효시 격입니다. 이후의 SF 영화들이나, 에반게리온처럼 90년대 들어 일본 오타쿠족들이 쏟아내는 아니메들이 그런 선례를 충실히 답습했다고 봅니다. 진정한 패티시스트들은 호들갑을 떨지 않는 법이랄까요. 영화가 시작되면 커다란 눈동자가 화면을 가득 메우고, 선문답 같은 대화가 오갑니다.


홀든 : 당신은 사막에 있습니다. 당신은 모래 위를 걷다가 아래를 봅니다.

레온 : 어느 사막 말이죠?

홀든 :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완전히 가정적인 이야기니까요.

레온 : 왜 제가 그런 곳에 있나요?

홀든 : 일상에 싫증이 났을 수도 있죠. 혼자 있고 싶었을 수도 있고. 당신이 아래를 보니 거북이(tortoise)가 보입니다.

레온 : 거북이? 그게 뭐죠?

홀든 : 바닷거북(turtle)은 아시죠?

레온 : 당연하죠!

홀든 : 같은 겁니다.

레온 : 바닷거북도 본 적은 없었습니다.... 하지만,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홀든 : 레온, 당신은 손을 뻗어 그 거북이를 뒤집습니다.

레온 : 홀든씨, 당신은 이런 질문을 지어내는 겁니까? 아니면 그들이 써준 것인가요?

홀든 : 거북이는 등을 땅에 대고, 배는 뜨거운 태양을 향하고 있습니다. 발버둥을 치지만 다시 뒤집어지지 않습니다. 당신의 도움 없이는 말이죠. 하지만 당신은 도와주지 않습니다.

레온 : 무슨 말입니까, 도와주지 않는다니!

홀든 : 내 말은, 당신이 도와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왜죠, 레온?


    당최 뭔 얘긴지 알 수가 없는 이런 질문은, 사실은 대상을 감정적으로 자극하여 인조인간을 판별해 내는 시험입니다. 이 문답 시퀀스는 영화가 시작하자마자, 그것이 인조인간 식별 실험이라는 것이 밝혀질 때까지의 짧은 시간 동안, 매우 효과적으로 관객들을 낯선 세계에 내동댕이쳐진 겁먹은 관찰자의 시점으로 옮겨놓습니다. The Hunger, Black Rain 등에서 보듯이, 리들리 스콧 감독의 장기는 섬세한 화면에 있습니다. 그가 만든 Alien(1 편)은 도처에 숨이 멎을 만큼 섬세한 미장센(mis-en-scene)을 담고 있습니다. (우주공간이 배경이라서 “숨이 멎을 만큼”이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군요.) 그의 동생 토니 스콧도 CF 감독출신답게 화려한 영상에 치중하는 경향이 있지만, 리들리의 유려함을 따라잡지는 못합니다.


    영화 Blade Runner가 담고 있는 인간성에 대한 깊은 성찰은 소설가 필립 K. 딕의 몫입니다. 필립 딕은 이 영화의 원작인 “안드로이드는 전자 양의 꿈을 꾸는가?”를 비롯하여, Total Recall의 원작인 “우리가 당신을 대신해 기억할 수 있다”, “마이너리티 리포트” 등을 썼습니다.


    생물의 개체는 유전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수레(vehicle)에 불과하다는 것이 현대 진화생물학의 결론입니다. 생식을 마친 개체가 예외 없이 시들어가고, 뚜렷한 이유 없이 죽음을 맞는 것이 그 한 증거죠. 그러나 영장류의 진화과정은 뇌기관을 고도로 발달시킴으로써, 인간이라는 종은 유전자의 명령에 항거할 수 있는 지성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육체의 반란이라고나 할까요. 인류의 진화과정은 이제 유전자와 문화가 함께 경쟁하고 협력하며 진화하는 형국으로 접어들었습니다. 생물학적 진화의 단위를 유전자(gene)이라고 하듯이, 리처드 도킨스는 문화적 진화의 단위를 밈(meme)이라고 불렀습니다.


    집단적 전통이나 민족주의 같은 밈들은 유전자의 이익에 봉사하지만, 노인과 장애자 보호 같은 밈들은 유전자에 대한 개체의 반란의 표식입니다. 유전자의 이익에 반해, 인간들은 평균수명을 인공적으로 연장시키고 있고, 그것이 성공하는 사회들에서 출산율은 비례적으로 낮아지고 있습니다. 유전자가 자기 복제의 전략으로 개체라는 더 큰 조직체를 발명했듯이, 인간은 인터넷과 세계화라는 수단을 통해 공동의 지능을 집적하고 있죠. 상상컨대, 마치 유전자가 개체의 뇌를 진화시켰듯이, 어쩌면 인간 육체의 반란은 인공지능의 창조로 그 절정을 맞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Blade Runner에서 인조인간들은 복제물(replicant)이라고 불려집니다. 복제가 유전자가 아닌 개체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날, 수십억년간 휘날리던 진화의 깃발은 마침내 내려져야 할지도 모릅니다. 어쩌면 머지않은 미래에.


    단편집 <태평양횡단특급>으로 한국 SF의 성취의 현주소를 보여준 듀나에 따르면, SF는 별 수 없이 그냥 SF라고 불러야지, 공상과학소설이라는 명칭은 옳지 못하다고 합니다. SF는 환상소설도 끌어안고 있고 대체역사소설도 아우르는 너른 장르이기 때문입니다. 환상소설과 SF를 별개로 분류하고 과학을 넓은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국내 SF소설의 개척자 역할을 한 소설가 복거일의 표현을 빌려 ‘과학소설’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습니다. 뭐라고 부르든, SF는 SF만의 방식으로, 다른 방식으로는 할 도리가 없는 이야기들을 해냅니다. 그 과정에는 늘 인식의 돌파구가 마련되죠. 그것이 제가 이 영화를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입니다. 첫 번째 이유요? 숀 영이 예뻐서라니까요.


    Blade Runner란, 불법 인조인간을 파기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입니다. 인조인간을 사랑함으로써 좋건 싫건 저절로 퇴역 Blade Runner가 된 데커(헤리슨 포드)는 신화 속의 피그말리온처럼 자신의 갈라테아를 쟁취합니다. 순종적이면서도 독립적인 여자라는 모순된 존재는 남자들의 환타지 속에만 존재합니다. 섬세하면서도 터프한 남자들이 여자들 머릿속에만 존재하듯이 말이죠. 이 영화에서 자연광은 딱 한번, 라스트씬에만 등장합니다. 햇볕 쏟아지는 숲 위를 날아가는 비행기 속의 인조인간 숀 영의 얼굴을 좀 더 진짜 인간처럼 보이게 만들려고 리들리 스코트가 아프로디테처럼 피운 재주겠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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