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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The Host)

posted Jan 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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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다르다/틀리다


    잘못 쓰이는 우리말은 많습니다. 그 중에서도, ‘다르다’와 ‘틀리다’가 섞이는 현상은 걱정스럽고, 또 거슬립니다. ‘다르다’는 ① 같지 않다, ② 한 사물이 아니다, ③ 특별히 표나는 데가 있다는 뜻이고, ‘틀리다’는 ① 맞지 않다, ② 사이가 틀어지다는 뜻입니다. “우리 애는 확실히 틀려요”라는 말은 그 집 아이가 뭔가를 올바로 못한다는 뜻으로 새겨야 할 텐데, “특별하다”는 의미로 소통하는 거죠. 이런 혼동은 넓고 깊어서, “확실히 틀려요”라는 표현은 사석에서 뿐 아니라 TV 진행자나 광고에서도 자주 쓰이고 있는 지경입니다.


    정답과 “다른” 답을 고르면 “틀린” 답이 됩니다. 실수로 “다른” 전화번호를 누르면 그건 “틀린” 전화번호가 되죠. 그러나 다른 것이 곧 틀린 것인 예는 그런 정도 뿐입니다. 다른 것은 다를 따름이고, 그것이 틀린 것이 되려면 틀린 이유가 따로 입증되어야 합니다. “틀리다”를 “다르다”는 뜻으로 쓰는 한, 우리는 획일주의에 물들어 있다는 혐의를 벗기 어렵습니다. 놀랍지 않게도,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달라지기를 두려워합니다. 드라마든 음식이든 복식이든 뭔가가 유행하면 그 열병은 일순간에 전국을 강타하죠. 예컨대 영화 <괴물>에 1천4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린 현상은 영화팬의 입장에서 봐도 과연 건강한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우리는 전국민의 삼분지일에 해당하는 수의 관객들이 한 영화를 극장에서 관람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디테일에 강해서 별명이 봉테일이라는 봉준호 감독은 대단한 장점을 가졌습니다. 그는 다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패기를 보여주었고, 달라도 틀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증명할 역량을 갖추었습니다. 범인이 잡히기는커녕 등장하지도 않는 범죄영화 <살인의 추억>을 그만한 긴장감과 유머와 비애(pathos)를 유지하도록 빚어낸 것은 특출한 재능입니다. <괴물>도 장르영화의 코드를 지키면서, 그러나 어느 괴수영화에서도 보지 못한 새로운 시도를 곁들여 만들었습니다. <괴물>이 성취한 사소한 차별화는, 실은 쉽지도 작지도 않은 성취입니다.


    첫째, 영화 초반부터 백주대낮에 괴물이 전신을 드러내며 야외를 뛰어다니는 괴수영화를 저는 처음 봤습니다. <괴물>을 보고, 괴물들을 감질나게 등장시키는 관행이 제작자의 욕심일 뿐 관객에 대한 서비스는 아니라는 심증을 굳혔죠. 둘째, 평범한 주인공이 괴물을 물리치는 설정은 장르의 약속이지만, 그 주인공이 (영화의 대략 2/3 지점쯤에서) 내면의 영웅적 면모를 발견한다는 또다른 약속도 있습니다. 봉감독은 이런 약속을 비틀어, 주인공의 희극적이고 연약한 면모를 끝까지 잘 지켜냈습니다. 셋째, 현서가 죽습니다. 장르영화에서 이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파격입니다. 참고로, 저는 어린아이를 불필요하게 죽이는 영화를 몹시 싫어합니다만, 현서는 자기보다 어린 아이를 보호하는 의로운 죽음을 택했고, 그녀의 희생은 중심테마로서 괴물이라는 영화 전체와 맞먹는 무게를 갖습니다.


2. 관계없다


    외국어에서 미안하다거나 고맙다는 말에 대한 대꾸는 대체로, 별 일 아니라든가, 그런 말은 필요 없다든가, 나도 마찬가지라든가 하는 표현이 주종을 이룹니다. 하필이면 유독 한국, 중국, 일본 세 나라가 “관계없다”라는 표현을 괜찮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점은 흥미롭습니다.(沒關係, 關係が ない) 관계가 없다니? 네가 고마워하는 일과 내가 한 일 사이의 인과관계는 없다는 의미에서 유래된 표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관계를 중시하는 한자 문명권의 심리적 특성을 보여주는 한 자락 증거라고 한다면 견강부회일까요? 중국에서 사업하시는 분들이 한결같이 말씀하시더군요. “„œ시(關係)”가 중요하다고.


    <괴물>도 가족이라는 ‘관계’에 관한 영화였습니다.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를 가족애와 그 확장에 관한 영화로 만들었습니다. 강두가 남의 아이 세진이와 호젓한 저녁상에 마주앉은 마지막 장면은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줍니다. 그렇군요. 괴물 같은 역사의 수레바퀴에 상처 입은 우리 민족은 다 한 가족인 것입니다. 그러나, <괴물>에서 확장되는 ‘관계’가 그렇게 좁게 테두리 지어진 것은 아쉬운 부분입니다. 영화 속에서 미군은 독극물을 방류합니다. 2000년 주한미군 군무원이 방부처리용 포름알데히드를 하수구에 버리도록 지시했던 것은 엄연히 사실이죠. 그러나 영화에서 미국이 한강주변 상황을 무력으로 통제하면서 맹독성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대목에 이르면, 여기서부터는 불편해 집니다. 작은 나라 사람처럼 구는 사람은 영영 작은 나라 사람인 겁니다.


    실은 우리나라는 이제 작은 나라가 아닙니다. 국토의 면적에 속지 않고 밖을 내다보면 우리의 경제규모가 세계 10위권 언저리에 있고, 그에 걸맞는 기여를 해야 한다는 숙제가 놓여 있습니다. 이 숙제를 해내려면 우리 시야를 넓혀야 할 터입니다. 그런 점에서, 관객동원기록을 세운 잘 만들어진 영화가 하필이면 우리의 외국인혐오증과 피해의식을 담고 있는 것은 아까운 대목입니다. 외세에 대한 혐오와 투철한 민족사랑이 만나면 어떤 불길한 일들이 생겨나는지 30년대의 독일역사는 잘 보여줍니다. 나라의 힘이 안팎으로 커가는데도 우리는 언제나 당하고만 산다는 체념어린 한을 품는 것은 무책임합니다. 그런 국민이 큰 국력을 가지게 되는 것은 세계를 더 편안하고 안전하게 만드는데 별 도움이 되지 못할 터입니다. 우리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으려면 사해동포적 심성과 국제정치에 관한 엄정한 식견을 더 길러야 할 것입니다. 봉준호 감독처럼 재능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감독이 소중한 ‘관계’의 틀을 좁게 정의하는 것은 재능을 낭비하는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3. 모르다


    저는 우리말 말고는 ‘모른다’는 낱말을 가진 언어를 못 봤습니다. 대부분 ‘알지 못한다’는 부정형 표현을 쓰죠. 영어의 ignorant가 있지만, 동사가 아니라서 무지의 상태 쪽에 무게를 두는 표현인데다, 구체적 사실보다는 전반적 정황에 대해 어둡다는 뉘앙스가 강합니다. 영어의 unless, lest, nothing, dispense 처럼, 부정이나 부작위의 의미를 지닌 낱말들이 있죠. 이처럼 우리말에서 부작위나 부정을 포함하는 낱말은 - 否/不/勿/無 등과 결합된 복합한자어를 제외한다면 - 제가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은 ‘모르다’와 ‘없다’ 뿐입니다. (우리말에는 nothing에 해당하는 명사가 없고, 영어에는 ‘없다’라는 동사가 없으므로, “Nothing comes from nothing”같은 문장의 어감을 번역해내는 일은 본질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왜 우리말에만 유독 모른다는 동사가 있을까요? 공부가 얕아서 잘 모르겠지만, 무지를 긍정형으로 표현하는 언어관습이 무지에 대해 상대적으로 긍정적인 태도와 관련된 것이 아니기만 바랄 따름입니다. 모른다는 낱말에서 파생된 ‘남몰래’, ‘나몰라라’, ‘모르쇠’ 등의 독특한 표현들이 은밀한 책임전가를 편리하게 표현하도록 도와주고 있다는 점이 내심 불길한 거죠.


    영화 얘기로 돌아가, 괴수영화를 포함한 호러물이라는 장르는 일반적인 도덕관념에 기초한 바르고 그름을 모릅니다. 알아야 하는데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몰라야’ 장르의 코드에 충실한 거죠. 이런 장르영화의 약속은, 괴물과 괴물의 창조자는 ‘악’이고, 주인공은 ‘선’이며, 그 사이에서 주인공을 따르지 않는 인물들은 ‘악’과 함께 몰락해도 싼 ‘어리석음’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괴수영화 얘기를 하면서 정색을 하고 정치적 인식을 논하는 것이 이상해 보일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르고 그름을 몰라야 마땅할 장르물의 ‘악당’ 자리에 하필 주한미국과 미국정부를 놓는 것은, 우리 사회에서 가장 논쟁적인 주제들 중 하나인 반미정서를 장르영화의 값싼 코드에 실어 나르는 선택이었습니다. 그런 선택은 언뜻 생각하기보다 훨씬 불건전합니다. 무엇보다, 영화의 품격을 떨어뜨리죠. 열성팬들이 괴물이 불타는 CG 장면의 어색함이나, 양궁시합장의 시간적 불일치 등을 옥의 티로 열심히 골라내는 모양입디다만, 제가 생각하는 <괴물>의 옥의 티는 섣부르고 손쉬운 자세(stance)를 골랐다는 점입니다. 민족주의적 정서는 우리 사회에서 발화점이 가장 낮아서 쉽게 불붙는 쟁점이므로, <괴물>은 적어도 이 부분에서만큼은 일상적인 관념의 허를 찌르는 대신 손쉽고 게으른 해결책을 택했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장르영화는 옳고 그름을 모르지만, 저는 봉준호 감독이 현실의 엄혹함과 도덕적 감성의 섬세한 결을 ‘모르기’는 바라지 않습니다. 다르면서도 틀리지 않을 수 있음을 보여준 영화의 결정적인 발디딤(stance)에서, 그가 ‘다른’나라 사람들을 ‘틀린’ 것으로 미리 정해버리는 값싼 결정을 했다는 점은 아쉬운 대목입니다.

 

추신 : 이 영화의 영어 제목이 The Host라는데 대해서 불평을 했더니 뉴욕 사는 친구가 영화 속에서 괴물의 몸에 기생하는 물고기들이 나오는 장면을 짚어주었습니다. 그렇네요. 그 물고기는 괴물에 기생(parasite)내지 공생(sysbiosis)하고, 괴물은 걔한테 숙주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괴물이 물고기의 숙주 노릇을 한다는 설정은 영화속에서 제목이 될만한 무게를 지니지 못한다는 생각은 여전히 듭니다. 영화 제목이 ‘숙주’가 되려면 그것은 괴물이 사람들(적어도 주인공들)과 맺는 관계의 중요한 측면과 관련된 특징이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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