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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은 간다(2001)

posted Feb 08,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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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변한다 -


좋은 영화에도 결점은 있다. 뒤집어 말하면, 흠이 없다는 점이 반드시 훌륭한 영화를 만드는 조건은 아니라는 뜻도 되겠다. 설사 그렇더라도, 흠 잡을 데가 없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는 보기 드물게 흠잡을 데를 찾기 어려운 영화다.


치매에 걸린 할머니와 아버지, 고모와 함께 살고 있는 청년 상우(유지태)의 직업은 이런저런 소리를 녹음하는 이른바 ‘사운드 엔지니어’다. 상우가 모시고 사는 할머니는 날마다 마루에 앉아 밖을 내다보며, 오래 전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마중하러 역에 가야겠다고 넋두리를 하신다. 강릉방송국의 라디오 프로듀서인 은수(이영애)는 겨울을 맞아 자연의 소리를 채집해서 틀어주는 프로그램을 준비한다. 업무상 처음으로 만난 상우와 은수는 강원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자연의 소리를 녹음한다. 둘은 자연스레 서로에게 호감을 품는다. 쑥맥 총각 상우에게, 은수는 결혼은 이미 한 번 해봤다고 아무렇지 않게 말한다. 방송국 복도의 소파에 앉아, 그녀는 뜬금없이 묻는다. “소화기 사용법을 알아요?”


녹음 작업이 끝나고 그들이 헤어지게 되는 날, 은수는 심드렁하게 묻는다. “라면 먹고 갈래요?” 자기 집에서 라면을 끓여주며, 그녀는 마치 껌 하나 씹겠냐는 말투로 다시 묻는다. “자고 갈래요?” 이렇게 해서 소년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계절이 바뀌면서 은수는 점점 더 심드렁해 보인다. 은수에게 상우는 자기 부모님께 인사를 시켜드리고 싶다고 말한다. 은수는 더 차가와진다. 상우는 따져묻는다.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 돌연 상우를 찾아와 하룻밤을 함께 지낸 은수는 다시 그에게 한 달간 헤어져 있자고 말한다. 사랑싸움에서 지기 싫은 상우는 이번에는 자기가 먼저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는다.


그러나 은수를 잊지 못하는 상우는 서울과 강릉을 오가며 그녀의 주변을 맴돈다. 그녀의 곁에는 새로운 남자가 있다. 은수는 그 남자에게도 묻는다. “소화기 사용법을 아세요?” 사랑의 열병을 앓는 많은 남자들이 그러듯, 이제 상우는 스토커처럼 못난 모습을 연출한다. 그녀의 차에다가 열쇠로 길게 흠집을 남기기도 한다. 그는 잊혀질까봐 괴롭고, 애당초 그녀에게 잊혀질만한 의미조차 없었을까봐 괴롭다. 그 두 가지는 별반 다르지 않으므로 그의 눈물은 편집증이다. 모처럼 제정신을 찾은 듯한 할머니께서 상우에게 타이른다. “떠나간 버스랑 여자는 잡지 않는 거야.”


또 계절이 바뀐다. 상우는 여전히 괴로와한다. 이제 그는 잊으려고 애쓰고, 잊을까봐 몸부림친다. 그 두 가지의 차이는 크므로 그의 괴로움은 분열증이다. 그러나 천천히, 그는 자신의 열병을 이겨낸다. 시간은 그렇게 잔인한 것이다. 할아버지를 만나야 한다며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집을 나가신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그의 아픔을 어루만져주시던 할머니의 영정을 들고, 상우는 장례버스에 앉아 우두커니 밖을 내다본다. 잔인한 시간이 다시 흐른다.


상우와 은수가 길에서 우연히 만난다. 은수는 반색을 하고, 상우는 난처한 미소를 짓는다. 둘은 어색한 인사를 나눈다. 은수가 상우에게 다시 만나자고 한다. 상우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한다. 이제 그의 안색에 열병의 흔적은 없다. 마지막 씬, 갈대밭에서 눈을 감고 바람의 소리를 녹음하며 상우는 참 편안한 미소를 짓는다.


긴 여름이 오고 간다는 것은, 지구의 다른 편 내가 모르는 어딘가에서는 봄날이 가고, 또 온다는 뜻이겠다. 어디선가 누군가는 다른 누군가를 기억하기 마련이지만, 지나간 한 철의 사랑은 누구나 다 잊는다. 미안하지만, 사랑은 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의 봄날을 일생동안 딱 한 번만 맞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이 아닐까? 다시 찾아온다고 해도, 떠나지 않고 머무는 봄날은 없을 터이다.


사족


 

내가 배우 유지태를 좋아하는 건, 그가 시카고 사는 내 막내동생과 비슷하게 생겨서이기도 하다.

내가 아는 한, 이 영화에는 이영애가 보여준 최고의 연기가 담겨 있다. 그녀의 본모습이 은수와 아주 비슷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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