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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ocop

posted May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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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은 잔인합니다. 세상이 잔인하다기 보다는 사람들이 잔인하다는 것이 맞는 말이겠지요. (영화 <넘버쓰리>에서 검사역할을 맡은 최민식의 대사처럼, 죄가 무슨 죄가 있냐, 죄를 짓는 뭣 같은 넘들이 나쁜 넘들이지...) 위대한 시인 T.S. 엘리어트가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것은 4월이 너무 아름답기 때문이었습니다. 세상은 부조리하고 황무지처럼 망가져만 가는데 어째서 너 4월은 그토록 화사한 라일락을 피워내느냐 하는 것이 엘리어트의 詩心이었을 터입니다. 진정한 재생은 없이 공허한 추억으로 고통을 주는 봄. 그러면서도 재생을 가장하고, 그러면서도 재생을 요구하는 4월. 봄은 왔으나 봄이 아닌 것이지요.


    한(漢) 원제(元帝) 시절, 궁녀로 입궐했으나 프로필 그림첩을 작성하는 畵工의 농간으로 황제에게 간택되지 못하고 흉노의 우두머리에게 선사되어 추운 땅으로 보내어진 왕소군이라는 절세 미녀가 있었습니다. 그녀가 읊었다는 싯구가 바로 胡地無花草 春來不似春(오랑캐 땅에는 꽃도 풀도 없으니 봄이 왔으되 봄이 아니로구나)입니다. (JP가 지은 시가 아닙니다!) 왕소군은 자신의 황무지에서 엘리어트처럼 봄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이 또한, 그녀가 기억하는 봄 역시 처절하게 아름답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양의 동서나 시의 고금을 막론하고, 아름다운 것들에서 잔인함을 발견하는 것이 시인입니다. 내가 하나가 될 수 없는 아름다움, 돌아갈 수 없는 고향, 이런 것들이 띄는 잔인함을 시적인 잔인함이라고 부르는 것이 허락된다면, 창살 밖으로 내다뵈는 만과 곶 위로 아름다운 샌프란시스코가 보이게끔 만들어 놓았던 알카트라즈 감옥이 구현하고 있는 잔인성이 바로 그런 시적 잔혹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영화는 시인들만 보러 오는 것이 아니므로, 잔인성에 관해 다른 접근을 하는 중입니다. 가지지 못할 아름다움을 탄식하기 보다는, 아차하면 벌어질 수도 있는 추한 모습과 잔인함을 가급적 여과 없이 자세하고 실감나게 묘사하는 쪽으로 내닫고 있는 것이죠. 영화는 현재 사용가능한 기술의 도움을 최대한 활용함으로써 이 일을 점점 더 잘 해내고 있습니다. 80년대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Rambo, Commando, Robocop 같은 영화들은 가히 ‘콜로세움’ 장르라고 불러도 좋을 영화적 대량살상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거대한 원형 경기장에 투사들을 몰아넣고, 무사들끼리 혹은 짐승들과 죽음의 게임을 벌이게 하고 그것을 오락으로 삼았습니다. 거기서는 실제로 사람과 동물들이 죽어 나갔고, 오늘날의 영화에서는 죽는‘척’을 할 뿐이라는 차이가 있지만, 그런 차이만을 가지고 고대인들을 야만시하기에는, 그 두 가지 오락이 관객에게서 분비시키려고 하는 호르몬의 종류가 너무나도 똑같은 게 아닐런지요.


    오히려 오늘날 영화 속의 대량살상 속에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담겨 있습니다. 브레히트가 ‘소격효과’라는 것을 발명해야 했을 만큼, 관객들은 본질적으로 영화 속의 인물과 내러티브에 ‘참여’하는 존재들입니다. 앞서 말한 오락영화 속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은 대체로 죽어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은 관객에게 자신의 처지나 동기나 세상살이의 고달픔 같은 것을 하소연할 기회를 갖지 못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정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는 점에서, 고대인들보다 훨씬 거대규모로 유통되는 잔인성의 도락을 심리적 부담 없이 즐기고 있는 셈이죠. 인류가 문화적 진화를 거듭해 나가면서 인권의 보호나 권력의 제한 같은 위대한 ‘진보’를 실현해 온 이면에는, 오히려 예전보다 짙고 커져가는 잔인성의 그림자가 숨어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키가 커지면 그림자도 길어지는 것이 세상 이치랄 수도 있겠습니다만.


    한 가지 신기한 점은, 선악의 구분이 단순하게 명료한 영화들을 즐기면서도, 현대인은 선과 악의 상대성을 깊이, 또 맹렬히 신봉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입니다. 인류의 고대와 중세를 지배했던 절대주의 정신의 회초리 자국이 그만큼 아프고 깊었던 것인지, 근대 이후(post-modern age)를 사는 사람들은 선악의 절대성에 관해 말하려면 지적으로 덜떨어진 사람 취급을 받을 각오를 해야만 합니다. 심지어, 예컨대, 교회를 열성적으로 다니는 사람들도 어떤 사안을 선악의 관점으로 보기를 꺼리는 ‘근대정신’의 소유자인 경우가 많습니다.


    대체로 우리 시대에 가장 안전하게 받아들여지는 유행은 양비론과 양시론이 아닌가 합니다. 마치 용궁으로 가면서 육지에 떼어놓은 토끼의 간처럼, 현대인의 권선징악은 우리가 여가 시간에 즐기고 환호하는 오락영화들 속에, 밀리언셀러가 되는 해리포터나, 수 십년 만에 다시 붐을 일으키는 반지의 제왕 속에나 고이 간직되어 있는 셈이죠. 하지만 절대악은 분명히 존재합니다. 다만, 악을 벌하는데 있어서 철저할 필요는 있지만 잔혹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1987년 Robocop이 상영되었을 때, 헐리우드에서 만들어진 주류 액션영화 중에서 이 영화만큼 폭력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그려 보여준 영화는 일찍이 없었습니다. 전통적으로 헐리우드는 섹슈얼리티의 표현에 비해 폭력에 대해서 비할 수 없이 너그러웠습니다. 거꾸로 말하면, 섹슈얼리티에 대해 좀 우스울 만큼 엄격했다고도 할 수 있죠. 그러나 Robocop 정도 쯤 되면, 90년대 이후 놀라울 만치 커지고 있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표현의 자유에 추월당하기 싫은 폭력의 표현 부류가 한층 더 분발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폴 버호벤 감독은 자신의 다음 작품 Total Recall에서도 피 튀기는 격투장면을 껌 씹듯 아무렇지도 않게 보여줍니다.


    네덜란드 태생 감독 폴 버호벤이 인간사회를 얼마나 더럽고 천박하고 잔인하고 폭력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지는 1985년 그가 감독한 첫 영어 영화인 Flesh & Blood에서 좀 더 잘 드러나 보입니다. 이 영화는 상당히 독특하기 때문에, 좋고 싫음을 떠나서, 일단 보면 잘 잊혀지지 않습니다. 말 타고 다니는 騎士들을 소재로 한 영화들은 많고도 많지만,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그 중에서 저에게 가장 특이한 인상으로 남아 있던 영화는 존 부어맨 감독의 1981년작 Excalibur 정도였습니다. Flesh & Blood가 묘사하는 중세의 풍경은 아무런 신화적인 색채조차 입지 않은 채, 두드러진 서사구조도 없이 인간의 추잡함을 그리고 있길래, 저는 순진한 마음에 왜 저런 영화를 애써 만들었을까가 심히 궁금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 영화는 아마도 The Princess Bride처럼 작위적으로 아름다운 동화들의 완전한 대척점에 자리를 매김직한 영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폴 버호벤 감독은 영화를 만들 때 자신이 어릴 적에 겪었던 2차대전의 경험들을 떠올린다고 합니다. 그가 연출한 폭력장면을 보면서 우리가 찔끔하고 느끼게 되는 그 어떤 느낌은, 어쩌면 귀청이 먹고 유리가 산산조각나는 공습과 폭격을 겪으며 죽음과 삶의 기로에서 그가 느꼈던 공포가 우화의 옷을 입고 되살아나 불러일으키는 반응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빨갛고, 날카롭고, 뭉클하고, 원초적(Basic)이고, 본능적인.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나 그 이후의 국지전의 비극을 직접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는 저 같은 세대들에게, 그런 가공할 규모의 공포를 은막 밖에서는 경험하기 어렵다는 현실은 한없이 다행스러운 것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오늘 누리는 평화를 감사히 여기는 법을 익혀야 마땅합니다. 무사하다는 것은 재미없고 따분한 일이기에 앞서서, 다행한 일이니까요. 어떠십니까? 그래도 혹시 그대의 들판은 여전히 황무하고, 그대의 봄은 잔인하기만 한지. 將蕪한 그대의 田園에서 떨치고 일어나 歸去來할, 따뜻한 마음의 집은 아직도 찾고 계신 중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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