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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라이언

posted Feb 25,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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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roy는 최상의 사극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칭찬받을 만한 데가 있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칭찬받을 영화로 만든 공로자를 딱 한명만 고르라면 누구를 고를 수 있을까요.  볼프강 페터슨 감독을 꼽을 사람도 있고, 브래드 피트나 다른 배우를 꼽을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리처드 라이언이라는 무술감독을 꼽고 싶습니다.


    영국태생 무술감독인 그의 기여가 없었다면, Troy는 많이 보던 배우들이 많이 본 이야기를 값비싼 스케일로 보여주는,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영화가 되어버렸을 것이 틀림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Troy의 집단전투장면이나 일대일 격투장면은, 주관에 따라서는 아름답지 않을 수는 있겠습니다만, 전에 보지 못한 새로운 스타일이라는 점은 부인하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물론, 기억에 남을 전투장면들을 만든 공로를 무술감독 혼자 독차지할 일은 아닙니다. 영화라는 공동작업이 늘상 그러하듯이, 잘 다듬어진 부분들은 감독의 재능과, 스탭의 독창성과, 배우의 장점이 잘 어울어진 우연의 산물입니다. 그런 우연이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기대치를 넘지 못하는 뻔한 장면들만을 보게 될 뿐이겠죠. 무술감독 리처드 라이언의 입장에서 말한다면, 장엄하면서도 유려한 화면을 담아내는 촬영팀이나 브래드 피트 같은 배우를 만난 것은 그의 행운이었던 셈입니다.


    영화 초반에 오디세우스가 말을 타고 다가올 때, 아킬레스가 발로 튕겨 올린 창을 공중에서 잡아채고 던지는 약 2초간의 장면이 있습니다. 이 장면을 안무하면서 라이언 무술감독은 창의 무게중심을 찾아내느라 여러 번 창을 떨어뜨리고, 팔꿈치나 뒤통수에 부딪혀가며 동작을 만들어냈다고 합니다. 그런 다음 그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브래드 피트에게 가르쳐 주었는데, 브래드 피트는 창을 차올려 잡아내는 동작을 처음에 제대로 해 내고, 두 번째도, 세 번째도 실수 없이 했답니다. 라이언 감독은 속으로 “오, 제발. 최소한 한번쯤 놓치기라도 해라”고 빌었다지요.


    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인 아킬레스와 헥토르의 격투장면이 멋들어지게 만들어 진 데는 브래드 피트와 에릭 바나의 궁합이 잘 들어맞았던 덕도 있었던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래도 저는 칭찬의 더 큰 몫은 안무가에게 돌아가야 한다고 믿습니다. 여간해서 무술감독의 이름을 찾아낼 수 없길래 투덜댔더니만, 뉴욕의 친구가 ‘The Fight Master’라는 계간지에 실린 리처드 라이언의 인터뷰 기사를 보내주었습니다. 그 기사 중에서 소개하고 싶은 재미난 이야기가 몇 가지 있습니다.


   페터슨 감독은 영화에서 신들의 역할을 배제했지만, 아킬레스의 몸놀림에는 어딘가 모르게 신의 이미지에 수렴하는 초인성을 불어넣기 원했답니다. 라이언 무술감독이 생각해 낸 것은 빠르고 우아한 몸놀림, 날개달린 발을 가진 머큐리 신의 역동성, 멀리 뛰면서 3단 도약하는 칼 루이스의 이미지였다고 합니다. 그의 팀 중에는 보통사람보다 세 배는 더 높이 뛸 수 있는 킥복싱 챔피언 출신 스턴트맨이 있어서 그가 브래드 피트의 대역으로 붕붕 날아다니는 아킬레스의 형상을 찍을 수 있었다는군요. 칼 루이스의 이미지가 차용되었다는 것은 영화 도입부에서 아킬레스가 거인 보아그리아스를 척살하는 일대일 전투장면을 보면 얼른 납득이 됩니다. 전혀 힘을 들이지 않고, 별로 빨라 보이지도 않는데, 얼마나 빠른지 깨달았을 때는 이미 끝나버리는, 넓이뛰기 육상시합 같은 칼싸움 한판이 벌어집니다.


    라이언 감독은 아킬레스의 격투자세를 고안하면서, 그리스군의 승패의 책임이라는 부담감을 한 몸에 진 아킬레스가 지구를 짊어진 아틀라스와 어딘가 유사한 데가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가 어깨죽지 위로 높직하게 방패를 매도록 한 것은 거기서 착안한 것이라네요. 아킬레스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 어깨를 구부린 채, 마치 지구를 어깨에 짊어진 아틀라스처럼 숙인 자세에서 출발합니다. 그의 이런 자세가 탄력을 받는 속도전으로 이어지도록 하기 위해, 라이언 감독은 스피드 스케이팅 선수의 이미지도 빌려왔다는군요.


    반면, 헥토르는 과시욕이 없고 책임감이 강한 전사로서, 비록 아킬레스에게 패하기는 하지만 아킬레스와 비교되더라도 실력이 형편없는 것처럼 보여서는 곤란하다는 조건이 라이언 감독에게 주어진 숙제였습니다. 라이언 감독은 헥토르를 ‘임기응변에 능한 전사’로 만듦으로써 이 어려운 과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때 그때 주변에서 펼쳐지는 상황에 빠르고 과감하게 대응하고 이용하는 싸움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인데, 영화를 보신 분들은 무슨 뜻인지 알아차릴 수 있을 것입니다. 라이언 감독의 인터뷰 기사에 따르면, 그는 아킬레스의 동작을 안무하면서 화려한 복서 무하마드 알리를 떠올렸던고, 경제적이고 직설적인 동작을 특징으로 지녔던 에반더 홀리필드를 헥토르의 이미지로 삼았다고 합니다. 에릭 바나 자신이 인터뷰에서 홀리필드를 참조한 것이 도움이 되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무적의 아킬레스와의 결투에서 헥토르가 죽는 장면도 헥토르가 자신의 장기였던 임기응변에 역습당한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이런 일관성은 무술감독 팀이 공을 들인 흔적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헥토르는 부러진 창을 집어 들고 공격했다가 아킬레스한테 그것을 빼앗겨, 전설에서처럼 창에 찔려 죽습니다. 창은 원래 던지는 무기이지만, 전설에서처럼 둘이 멀찍이 서서 창을 한 번씩 던지는 싸움으로는 영화를 만들 수 없었을 테니까요. 이 둘의 결투 시퀀스는 헥토르가 창에 찔려 사망했다는 신화에 충실하면서도 새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그러면서도 배우들이 몸으로 그려내는 스타일의 논리적 일관성을 지키려고 애쓴 노력의 결과물이었고, 멋지게 성공했다고 봅니다.


    Troy처럼 격투가 난무하는 영화 속에서 주요 등장인물들이 서로의 스타일을 넘나들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은 관객으로서는 고마운 일입니다. 흔히, 이런 류의 영화들 속에서 싸움꾼들은 다른 영화와는 조금 다르지만 자기들끼리는 다 똑같은 식으로 싸우거든요. 리처드 라이언 감독은 이런 현상을 일컬어 영화 속에 “극중 인물은 보이지 않고 무술감독만 보이는” 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일찍이 빌 홉스라는 선배로부터, “영화를 다 본 후에 싸움의 테크닉이 아니라 극중인물(character)이 기억에 남아야만 성공한 무술감독”이라는 가르침을 받아서 가슴에 새겼다고 합니다.


    참고로, 그는 파리스 역을 맡은 올란도 블룸이 메넬라오스에게 떡이 되도록 터지는 장면의 안무에 대한 구상을 마치고 걱정을 했었답니다. Lord of the Rings, Pirates of the Caribbean등의 영화에서 멋진 액션스타로 자리매김한 블룸이 그렇게까지 스타일을 구기기를 원치 않으면 어쩌나 하고 말이죠. 촬영당일 설명을 들은 블룸이 묻더라지요. “이건 누가 안무하신 거지요?” 라이언 감독이 심호흡을 하고 “에.... 접니다”라고 했을 때, 성큼 다가와 악수를 청한 블룸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답니다. “이 장면은 내 캐릭터가 철저히 망가지는 대목이어서 어떻게 형상화하면 좋을지 고민중이었는데, 이 안무를 보니 이제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블룸은 그 장면을 대단히 설득력 있게 연기했을 뿐 아니라, 마지막에 메넬라오스에게 등을 보인 파리스가 형 헥토르의 발치로 달려가 그 다리를 부여잡는 부분은 블룸 자신이 고안하여 덧붙인 것이라고 합니다.


    리처드 라이언 무술감독은 화려한 개인기를 마구잡이로 펼쳐 보이기 보다는 각각의 극중인물들의 개성을 부각시키는데 더 공을 들였던 것인데, 그 덕에 영화의 설득력을 높이면서도 오히려 자제력이 강한 무술감독의 재능과 존재감을 객석에서 강하게 느끼게 해 준 셈입니다. 프로 정신이 잘 작동하는 것을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정말로 날고 기는 싸움꾼들이라면 정말 현실에서도 저렇게 싸웠을 것만 같다는 느낌을 제가 영화에서 느껴본 것은 <장군의 아들> 이후로 Troy가 처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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