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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ip to Bountiful

posted Feb 2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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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말(言語)이라는 것은 재미있습니다. 쓰는 사람에 따라 뜻이 조금씩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말과 말 사이에는 늘 말로 설명될 수 없는 틈이 생겨납니다. 의미의 공백이랄까요, 말의 무늬 또는 결이라고 할까요. 그런 틈새의 공간을 파고들어 꾸며주는 것이 詩입니다. 그런 점에서, 詩語들은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는 난(蘭)이나 에델바이스같은 화초들입니다.


    두 사람이 마주보고 같은 주제에 관해서 말할 때에도, 둘의 생각을 빈틈없이 주고받기란 어렵습니다. 부부간에 맞고스톱을 쳐도 돈이 비게 마련이라는 세간의 농담처럼, 말로는 정확히 옮겨지지 않는 ‘말의 잔돈’들은 항상 우리의 생각 주변을 맴돕니다. 그래서, ‘개떡같이 얘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는’ 말벗의 존재는 그토록 즐겁고 귀한 것입니다. 저의 가장 소중한 재산은 그런 知音之友들의 존재입니다.


    인공지능에 관한 탐구에서 선구적이던 SF 작가 아이삭 아시모프도 이런 ‘말의 틈새공간’을 보았습니다. 로빈 윌리엄스가 주연한 Bicentennial Man(1991)의 원작이었던 그의 소설 ‘양자인간(The Positronic Man)’에서, 주인공 로봇인 NDR-113은 양자두뇌 회로의 불확정적 특성 덕분에 뜻하지 않게 ‘배움’을 거듭합니다. 친절한 주인들로부터 앤드루 마틴이라는 이름까지 선사받은 그는, 어느날 자신에게 완벽한 문법과 어휘 프로그램이 내장되어 있는데도 인간들처럼 언어를 소통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속어와 반어법, 역설법 등이 그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죠.


    로봇 앤드루는 어느 날 변호사 사무실을 찾아갔다가 로봇이 자리를 비운 안내 데스크를 보면서 ‘unmanned'라고 해야 할지, ’unroboted‘라고 해야 할지 망설입니다. 충원한다는 뜻의 ’man'은 여성에게도 쓰니까 로봇에게도 써야 하는 것일까? 라고 말이지요. 그는 속으로 생각합니다. “인간이 발명하고 인간이 사용하는 인간의 언어는 그런 식의 사소하지만 다루기 힘든 복잡성으로 가득차 있다.”


    앤드루에게 위안이 될 만한 사실은, 인간에게도 말은 언제나 다루기 힘들고 복잡하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가 하면, 속에 뼈가 있기도 하고, 발이 없이도 천리를 가지만, 곱게 오려면 곱게 가야 한다는 말이란 것은, 오로지 생각의 근사치만을 표현하고 전달하고 기록하는 도구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될 수 없는 생각이란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생각은 말의 몸을 입어야 비로소 꼴을 갖추게 됩니다. 말로 표현되지 않는 한, 사람은 자기가 생각하는 것이 무슨 생각인지 분명하게 알 길이 없습니다.


    글머리에 저는 詩가 말과 말의 틈에서 자란다고 적었습니다만, 실은 모든 예술의 원산지는 말과 생각의 이러한 틈새입니다. 생각해낼 수는 있지만 표현할 수는 없는 것을 표현하려는 노력, 명확히 생각하기는 어려운 것에 어떻게든 형태를 입혀보려는 노력의 다른 이름이 예술입니다. 그러니까, 아도르노의 말처럼, “사유 앞에서 모든 것을 드러내는 것을 예술이라고 할 수 없”는 거겠죠.


    하지만, 표현될 수 없는 영역에 너무 깊이 매혹되면 반지성적인 태도에 빠질 위험이 있습니다. 지식을 찾는 여행자는 표현되지 못하는 것들의 아름다운 노래에 귀를 막고 돛대에 몸을 묶어야 합니다. 지식은, 말과 생각의 틈새를 가꾸면서 거기 머무는 대신, 그것을 메워 없애려는 노력입니다. 플라톤이 자신의 공화국에서 시인들을 추방하고 철인들을 우대하려 했던 것도 아마 그런 생각에서가 아니었을까요.


    저는 지식을 경외하지만, 설명될 수 없는 것들에 자주 미혹되어 주저앉다 보니, 아마 플라톤의 공화국에는 입국금지당할 부류에 속할 겁니다. 하지만 저는 합리적 이성의 세례도 받았으므로 不可知의 도원경에 제 짐을 다 풀어놓고 영주할 수 있는 처지도 아닙니다. 예술분야들 중에서도 연극, 영화, 소설처럼 내러티브 중심의 텍스트로 현실을 모사(simile)하는 것들은 말과 생각의 두 세계를 이어주는 매체(medium)의 성격이 짙습니다. 저 같은 유랑객들에게는 마치 중간휴게소 같은 장르들인 것이죠.


    어두운 극장 속에서, 말의 나라와 생각의 나라는 서로 다투는 대신, 하나가 됩니다. 말로 설명될 수 없는 것들이 영상에 차곡차곡 탑재됩니다. 그것들이 없다면, 우리는 굳이 극장을 찾아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극장 문을 나서면서 나비 꿈을 깬 장자처럼 내가 속한 속세를 멀찍이서 한번 굽어보게 되는, 그런 느낌 말입니다. 개중에도, 우리의 전신을 휘감아 유난히 내밀한 생각의 나라로 데려가는 영화들이 있습니다. 잠을 깨고 나서도 기억나는 꿈들처럼.


    1986년에 제럴딘 페이지에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The Trip to Bountiful이라는 영화가, 제게는 그런 영화들 중 하나입니다. (이 상은 여덟 번 후보에 지명되었던 페이지가 62세에 탄 첫 오스카 주연상이었습니다.)


    캐리 와츠 여사(제럴딘 페이지)는 휴스턴의 아파트에서 아들내외와 함께 살면서 말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녀의 소원은 죽기 전에 어릴 적 고향인 바운티풀을 가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아들내외는 바쁜 일상과 빠듯한 살림에 쫓겨 여행을 떠날 엄두를 못내는 소시민들입니다. 공처가인 아들은 소심한 효자이기도 해서 건강이 염려스러운 어머니가 혼자 여행하도록 허락하지도 않습니다. 매달 몇 푼 안되는 노인생활보조금 수표가 올 때마다 여행을 꿈꾸던 캐리는 어느 날 고향을 향한 탈출을 감행합니다. 흔히 로드무비는 성장과 깨달음에 관한 영화이기 일쑤지만, 캐리가 자신의 여행을 통해서 얻는 것은 재활이고, 꿈의 성취입니다. 그 꿈은, 연어의 마지막 회귀 여행처럼 용감하고 보람차면서, 동시에 서글프고 가여운 것이기도 합니다.


    한 나라의 말에도 틈새가 있거늘, 하물며 다른 나라의 말을 완벽하게 번역하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컨대, 우리말의 ‘가족(사람)’과 ‘집(장소)’의 중간에 놓인 ‘가정’은 장소보다는 사람에 더 무게가 쏠린 느낌이고, 영어의 ‘Family(사람)’와 ‘House(장소)’의 중간에 놓인 ‘Home’은 사람보다는 장소에 더 치중한 표현인 것처럼.


    그래서일까요? 사람들 사이의 질긴 정을 그린 영화는 길소뜸이나 친구 같은 우리 영화가 더 끌리고, 추억 속의 장소가 체화하고 있는 그리움을 드러내는 영화는 The Trip to Bountiful, Marianne de ma jeunesse, Waterloo Bridge 같은 서양 영화들이 오히려 더 절절한 것 같습니다. 하긴, 눈이 핑핑 도는 경제성장의 여파로 우리에게는 불과 십여년 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고향’조차 드물어진 탓도 있겠군요.


    캐리 할머니는 휴스턴의 멀쩡한 집에 살지만, 그녀가 ‘Home’이라고 부르는 곳은 언제나 바운티풀을 가리킵니다. 쇠락한 모습으로나마 옛집이 줄곧 그 자리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캐리는 행복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다시 찾아간 어린 시절의 녹번동도, 이문동도 옛 집의 흔적을 찾기는 커녕 동네를 알아볼 길조차 없을 정도로 변해 있더군요.


     저의 바운티풀은 부산 용두산 기슭의 외갓집이었습니다. 초겨울 이른 볕이 따습던 잔디밭이 있고, 여름에는 뒷마당 대밭의 바람소리가 시원하던 이층집. 외삼촌 서재의 낡은 책 냄새가 좋아서 그 방에서 낮잠을 자주 청했었고, 문간방에 차려진 외삼촌의 화실은 예술을 지근거리에서 사귈 수 있는 호젓한 공간이 되어주었습니다. 방학 때마다 어머니의 처녀적으로 시간여행을 허락하던 외갓집, 그 자리에 영원히 있을 것만 같던 그 멋들어진 양옥집이 있던 자리도, 지금은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직육면체의 검고 덩지 큰 빌딩이 대신 차지하고 있을 뿐입니다.


        외가집


        소철나무 한 그루 가마득히 높아

        용두산 기슭의 외가집 마당은

        대나무 담장 아래 南國이었다.

        뒤뜰에서 끓던 추어탕 비록

        장국은 익숙해도 산초향 간질간질 낯설듯이

        동백나무 발치에 숨어 쉼 없이 소곤대던 팬지꽃들

        여기는 異國이야 남쪽 나라야


        짙은 볕 옅은 꽃잎 다 흩어지고

        사이좋던 외삼촌들 시애틀로 광안리로 용산으로

        그 아이들은 홀씨처럼 더 멀리 뿔뿔이

        흩어질 힘 있는 것 다 흩어진 뒤에도

        새벽마다 총채로 없는 먼지 털어내시며

        깔깔깔 소녀처럼 잘 웃으시던 외할머니

        치매로 고생하시는 동안 총채처럼 메마르고

        동광동 산마루의 화초들도 메말랐다


        이제 나는 다 자라 내 씨앗들을 보듬은 채

        물처럼 흐르던 시간 물처럼 고이는

        이국에서 외할머니의 메마른 부음을 받았다

        용두산을 그리워하지 않고 사는 법

        이제 거반 익혀가지만

        나도 홀씨 터칠 날을 향해 익어가지만 그래도

        흩을수록 고이는 것들이 있다


        여름 뿐인 남의 땅 南國에 와서

        나는 내가 되돌아갈 곳을 생각하지는 않는다

        외할머니의 추어탕처럼 진하고 뜨거운 이곳

        앞마당 해그늘에 잠간 쉬어 가던 높바람

        그 가늘고 기다란 바람 속의 대꽃 향기여

        자카르타의 소철이여

        한가로이 익히지 못할 깔깔깔

        웃음소리여

 



 

화사첨족 

    

1. Trip to Bountiful에서 캐리 할머니의 기차여행에 말동무가 되어준 예쁜 아가씨 쎌마 역을 맡았던 배우는 레베카 드모네였습니다. 레베카는 제가 좋아하기엔 좀 너무 드센 인상이긴 한데, 미모나 연기력에 비해서 캐스팅 운은 참 없어 보입니다. 제가 아는 한, Trip to Bountiful은 그녀의 출연작중 유일하게 영화다운 영화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2. 제랄딘 페이지는 언젠가, 자신은 브로드웨이에 자주 출연하는 헐리우드 배우가 되고 싶어했던 적은 없었고, 영화에 자주 출연하는 연극배우가 되고 싶어했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다고 합니다. 그녀가 만년에 받은 여우주연상은, 받을만한 사람한테 갔던 것 같습니다. 그때 시상식에서 발표자는 봉투를 개봉하더니 ‘영어권에서 가장 위대한 여배우에게 상이 돌아갔군요’ (또는 그 비슷하게) 말했고, 그해 Out of Africa로 같이 후보에 올랐었던 메릴 스트립은 벌떡 일어나 한참동안 기립박수를 쳤었습니다. 메릴 스트립은 2-3년에 한 번 꼴로 수상후보에 올라서, 아카데시 시상식은 그녀가 후보에 드는 해와 그렇지 않은 해로 나눌 수 있을 정도이니, 그녀는 아마 진정으로 노배우를 위해 기뻐해줄 여유를 가진 것처럼 보여서 보기 좋았습니다. 제가 메릴 스트립이었더라도 그럴 때 취할 수 있는 다른 자세는 없었겠다는 생각은 들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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