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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thers

posted Feb 0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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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 키드먼. 제가 그녀를 만난 것은 99년 2월, 찬바람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일요일 오후 맨하탄 48가 Cort 극장 앞에서였습니다. 극장의 쪽문을 열고 나온 그녀는 제게로 성큼성큼 걸어왔습니다. 저는 방긋 웃는 그녀와 악수를 하고 몇 마디 대화를 나눴습니다. 니콜은 화면에서 보던 것보다 키가 작았고 (톰 크루즈는 대체 얼마나 작단 말인지?) 그냥 키가 작은 것이 아니라 눈, 코, 입, 얼굴, 손, 할 것 없이 보통 사람을 85%쯤 축소복사해 놓은 것처럼 전부 올망졸망 작더군요.


    니콜과의 만남은, 솔직히 자백하자면, 만남이라고 부를 만한 것도 못되었습니다. 89년에 헐리우드에 데뷔한 후 불과 몇 년 사이에 초대형 스타가 된 그녀는 몹시도 연기력을 인정받고 싶었던지, 98년 12월부터 석달간 브로드웨이에서 The Blue Room이라는 연극의 주인공으로 출연했습니다. “극장의(theatrical) 바이아그라”라는 평을 받았던 이 연극에서, 그녀는 때로는 전라로 때로는 반라로 무대 위에서 옷을 입었다 벗었다 하면서 1인 5역을 열연합니다. 저는 마침 그때 뉴욕에서 지내면서 이 연극을 놓칠 수 없었던 (놓칠 것이 따로 있지) 수많은 사람들 중 하나였을 뿐입니다.


    저와 아내는 주말 오후에 아이들을 베이비시터에게 맡겨 두고 연극을 관람했던 것이었습니다. 연극은 상상했던 것보다도 훌륭했습니다. 과연 브로드웨이는 헐리우드 스타가 벗고 달려든다고 무조건 문을 열어주는 곳은 아니구나 하고 감탄했습니다. 보모에게 아이들을 맡겨본 것이 처음이었던 우리 부부는 조바심이 나서, 출구가 혼잡해지기 전에 커튼콜이 진행되는 동안 극장을 살금살금 빠져 나왔습니다. 마침 극장 앞에 공중전화가 있더군요. 아이들은 잘 있으니 걱정 말고 놀다 오시라는 베이비시터의 음성을 듣고 수화기를 내려놓은 저는 돌아서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극장에서 꾸역꾸역 나오는 관객들 거의 전원이 우리 뒤로 와서 줄을 서는 게 아니겠습니까.


    긴 줄의 맨 앞에 서는 경험은 일부러도 좀처럼 하기 어려운 것이다 보니, 졸지에 영문도 모르고 일등이 된 저는 제 뒤에 선 아줌마에게 무슨 일인지 물었죠. 설명인 즉슨, 잠시 후면 배우들이 공중전화 옆의 저 문으로 나와서, 팜플렛(Playbill)에 사인을 해준다는 겁니다. 좀 춥긴 했지만 그냥 갈 일은 아닌 것이죠. 30분쯤 기다렸나? 주변이 갑자기 훤해지더니 니콜이 나타나서는 맨 앞에 선 제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던 것이죠. 그녀와 나눈 “깊은” 대화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 : (악수하며) 대단한 연기였습니다.

   니콜 : 고마워요. (손을 내밀어 내 팜플렛을 받아든다.)

   나 : (황급히 필기구를 찾다가, 열쇠고리로 쓰던 소형 스위스칼 속의 볼펜심을 꺼내서 건넨다. 이것은 내가 애용하는 비상용 볼펜이다.)

   니콜 : (특유의 경쾌하고 높은 목소리로) 이게 뭐죠?

   나 : 필기구요.

   니콜 : (깔깔 소리내어 웃으며) 오, 이런. 이건 아마 세상에서 제일 작은 필기도구일 것 같네요.

   나 : (실없이 킬킬 마주 웃으며) 우연의 일치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웃지 마시길. 이런 인연도 있고 해서, 니콜 키드먼은 한동안 제가 가장 좋아하던 여배우였습니다. 적어도 그녀의 보톡스 중독이 그 환한 미소를 망가뜨리기 시작하던 Moulin Rouge! 무렵까지는. 어쨌거나, 니콜은 저와의 ‘만남’ 이후로도 승승장구하여 오스카 여우주연상에 빛나는 히로인으로 성장했으니, 그녀를 속으로 성원해 마지않던 저로서는 보람 있는 일입니다. 그녀의 출연작들 중 제가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The Others입니다. 제가 막상 The Others를 좋아하는 이유는 영화의 독창성과 장점이 마음에 들어서입니다. 영화 속에서 니콜 키드먼의 매력이 돋보였던 것으로 치자면, 다른 영화들을 얼마든지 있죠. 두 편만 골라 본다면 저는 To Die For와 Birthday Girl을 꼽겠습니다. 특히 Birthday Girl에서 악역을 맡아 러시아 억양을 완벽하게 구사하던 그녀는 멋졌습니다.


    The Others의 독창성에 관해 설명하면, 영화보다 저의 허접한 글을 먼저 읽게 될 분들에게 너무 결정적인 스포일러가 될 것이기 때문에 세세한 설명은 자제하겠습니다. 아메나바르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공포영화가 신체절단이나 피범벅 없이 암시만 가지고도 충분히 무서울 수 있다는 사실을 훌륭히 증명했습니다. 키드먼의 연기도 좋긴 했지만, 자칫 유치한 반전으로 전락할 수도 있었던 발상을 품격 있게 영상화한 공로는 감독의 몫이었다고 봅니다.


    영화는 타인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하는 독특한 오락입니다. 특히, 연기자 시점 장면(point-of-view shots)이 보여주는 타인의 시야는 소설이 흉내 내기 어려운 영상의 직접화법입니다. 랠프 파인즈가 주연한 Strange Days라는 영화에는 인간의 중추신경을 직접 복사해서 기억과 감정까지 전해주는 SQUID라는 불법 녹화장치가 등장합니다. 이미 1932년에 올더스 헉슬리가 쓴 Brave New World에도 “현실보다 더 현실적인” 느낌을 재생시켜주는 feely라는 장치가 등장했었죠. 하지만 이런 기계들이 나오기 전까지는, 영화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매체들 중에서 남의 감각의 근사치를 가장 즉물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수단입니다. 그것을 가장 잘 기록하고 전달하는 매체는 아니더라도 말이죠.


    대게의 영화들은 작가인 감독의 눈을 통해 색다른 세상을 ‘들여다 보는’ 기회를 줍니다. 그것도 즐거운 일탈에 해당합니다만, The Others처럼 극중 인물이 획득하는 각성을 통해서 전혀 다른 세상을 - 마치 거울 속에서 거울 밖을 바라보듯 - ‘내다보게’ 해 주는 영화들도 있는 겁니다. The Others 류의 설정이 아메나바르 감독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그는 특이하게 느린 긴장과, 조용한 공포감, 관점의 도치를 결합함으로써 이 영화를 “타자성(otherness)의 두려움”에 관한 독보적인 알레고리로 만들었습니다. 남이 나에게 남이라는 것은, 내가 남에게 남이라는 것만큼이나 무서운 것이지요. 남에게 남인 내가, 나에게만은 영영 남이 아닐 거라는 법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폴란드 태생 안드레이 줄랍스키가 89년에 만든 Mes nuits sont plus belles que vos jours(나의 밤은 너의 낮보다 아름답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소피 마르소가 소녀티를 벗고 성인 연기를 시작한 영화로 소개되곤 하는 영화죠. 그러고 보니, 저는 소피 마르소와도 인사를 나누고 대전 시내를 함께 거닐었던 적이 있군요. 대전 엑스포에 참석한 미테랑 대통령 등 삼십여 명의 귀빈들을 안내하던 저를 그녀가 기억할 리는 만무하지만서도.


    이 영화의 남자주인공 루카는 불치의 병으로 서서히 기억을 상실하면서 광기에 휩싸입니다. 광기를 주제로 한 영화들은 많지만, 줄랍스키 감독은 이 영화가 광기에 ‘관한’ 것이기 보다는 광기에 ‘의한’ 것이 되게끔 만들었습니다. 해변의 리조트에서 블랑쉬(소피 마르소)와 함께 보내는 루카의 생애 마지막 며칠간은 특히 뒤죽박죽인데, 저는 이 영화가 점점 광기를 더해가는 주인공의 눈으로 바라본 바깥세상의 묘사라고 느꼈습니다.


    천사의 시각으로 베를린 시내를 헤집고 다니며 관찰한 빔 벤더스의 영화도 이런 대열에 포함시킬 수 있겠군요. 영화를 통해서가 아니라면 언제 우리가 광인이 되어보고, 천사가 되어보고, 유령이 되어보겠습니까. 극장 밖의 일상 속에서도 나 아닌 다른 누군가, 또는 무언가가 되어보는 것은 중요합니다. 易地思之는 세상 모든 도덕의 황금률이기도 합니다. 상대방의 입장에 자신을 놓고 어떤 일을 다시 한 번 바라보는 것은 도덕적 감성만 가지고 해낼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실은 그것은, 영화적 상상력도 필요로 합니다.


■ 그녀들


    은막에서 경력을 시작하는 여배우들 중에 제가 기대감을 가지고 지켜보았던 유망주들은 예전에도 많았습니다. 언젠가 좋아하는 여배우들의 이름을 주워섬겼더니 저의 한 친구는 “넌 입술 얇은 여자들을 좋아하는구나” 그랬었던 기억이 납니다. 글쎄요, 제가 좋아하던 기준은 입술의 두께 같은 것은 아니었는데, 하긴 그렇다고 해서 그녀들의 연기력이 기준이었던 것도 아니긴 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80년대 TV 연속극에서 스타가 되었던 Morgan Fairchild는 치졸한 드릴러인 Seduction으로 스크린에 진출하더니만, 영화다운 영화는 찍어보지도 못하고 어느새 Friends의 챈들러 엄마 같은 TV 연속극 게스트 스타로나 등장하는 한물간 유명인이 되어버렸습니다.


    John Travolta의 부인인 Kelly Preston은 엄청나게 많은 주류영화에 조연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주연으로서는 아직도 B급 영화(B-Movie) 스타의 울타리를 넘어 서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주연을 맡은 영화중에는 그나마 데뷔작인 청춘물 Mischief가 개중 나은 편입니다. 조연으로서의 인기는 좋지만, Twins에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의 애인이나 Jeffy Maguire에서 톰 크루즈 애인이 그녀였다고 말해줘도 사람들이 잘 기억 못할 정도로, 그녀는 자신의 존재감을 키우지 못했습니다.


    Virginie Ledoyen 같은 신예가 제가 미처 팬 노릇을 해주기 전에 너무 일찌감치 유명해져서 좀 아쉬웠던데 비하면, 오래 전 Demi Moore는 St. Elmo's Fire부터 Ghost 이전까지 팬들이 많지 않던 기간 동안 그녀의 스타성을 미리 점치고 기대감을 걸어볼 기회가 있었더랬습니다. 한동안 잘 나가는가 싶더니, 아아, 그녀는 저의 오랜 성원의 보람도 없이 갈수록 이상한 아줌마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Star Trek, The Next Generation의 Dauphin이라는 에피소드로 데뷔해서 Twin Peaks에 웨이트레스로 나왔던 Madchen Amick이나, Ferris Bueller's Day Off에서 눈에 확 띄는 신선한 모습으로 등장했던 Mia Sara도 어쩐 일인지 배우경력 10년이 넘도록 대여용 비디오 전용영화처럼 생긴 영화들에서만 얼굴을 볼 수 있습니다. Maria Pitillo라는 배우는 White Palace에서는 몰라도 Godzilla에서는 제법 인상적이었는데도 극장영화에는 섭외를 못받고 있는 모양이고, 재능 있어 보이던 Penelope Anne Miller도 97년 Relic쯤서 부터는 뒷심 없이 이렇다 할 후속작에 얼굴을 못 내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제가 일찌감치 성원했던 배우들 중에 여우주연상감으로 성장한 Rosanna Arquette, Jennifer Connelly, Charlize Theron 등도 있습니다. Rosanna Arquette의 경우는 인형처럼 예쁜 얼굴도 아니고 당초부터 저예산 영화에서 그로테스크한 역할을 많이 맡았었지만, Jennifer Connelly가 Requiem for a Dream으로, Charlize Theron이 Monster로 망가지는 걸 봐야 했던 것은 고역이었습니다. 예쁜 덕분에 일찍 주목받은 배우들이 진정한 연기자로 인정받으려면 폭삭 망가져야만 하는 것이 요즘 풍토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겠습니다만.


    최근에도 실패와 성공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분투하고 있는 신예들 중 제가 관심 있게 지켜보는 여배우들이 있습니다. 한동안 온갖 잡지표지를 장식했던 Gretchen Mol은 조만간 돌파구를 찾지 못한다면 B-Movie 선배들의 전철을 밟을 조짐이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The Notorious Bettie Page에서 60년대 유명 핀업 걸이던 베티 페이지 역할을 맡은 것이 그녀의 승부수였던 것 같은데, 글쎄요, 행운을 빕니다.


    Sienna Guillory가 Superstition에서 보여준 모습은 근래 보기 드물게 가슴 속의 예민한 부위를 건드리는 설렘을 담고 있어서 기대가 컸습니다. 하지만 그 뒤로는 그녀도 아직 Helen of Troy나 Resident Evil 속편의 여전사 등 싱거운 역할을 맡고 있어서, 아직 자기 자산을 충분히 활용할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Rachael Leigh Cook의 경우는 소녀 이미지가 너무 강해서 그런지 성년배우로서는 히트작을 못내고 있지만, 아직 나이가 어리니 기회가 있을 거라고 기대해 봅니다. 듀나의 SF소설 ‘태평양 횡단특급’에는 배우로서의 Rachael Leigh Cook에 관한 근사한 단편이 포함되어 있더군요. 그녀를 지켜보는 게 저 혼자만은 아닌 것 같아서 적잖이 반가왔습니다.


    97년 Jurassic Park 앞부분에서 작은 공룡에게 물려 다치던 꼬마애로 나왔던 Camilla Belle이 어느새 훌쩍 커가지고, The Chumscrubber에서 조숙하면서도 생각이 복잡한 소녀의 매력적인 모습으로 눈에 쏙 뛰어들어 와서 놀랐습니다. 그녀는 최근 When a Stranger Calls라는 써스펜스 드릴러의 주연을 맡긴 했는데, 자신의 흡인력을 잘 키워갈 수 있을지 어떨지, 아직은 너무 어리니까 좀 더 지켜봐야 할 듯 합니다.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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