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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꿈꾸는 첨탑들의 도시

posted Jan 15,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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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스퍼드 한복판에 있는 Magdalen College 앞에서 길을 막고 ‘막달렌 컬리지’가 어딘지 물어봐도 아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다. ‘막달렌’이 아니라 ‘모오들린’이라고 읽기 때문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 C.S. 루이스(1898-1963)는 모들린 컬리지의 교수였다. 그의 삶과 사랑을 소재로 한 영화가 있다. 1993년 리처드 아텐보로 감독이 만든, 안토니 홉킨즈와 데브라 윙거 주연의 <Shadowlands>.

때는 1950년대의 어느 해다. 루이스 교수는 동생과 함께 우아하고 단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의 주변 사람들은 꼭 그가 살고 있는 도시의 풍경처럼 예의 바르고 말수가 적다. 그런 그의 삶 속으로 조이 그레셤과 그녀의 아들 더글라스가 뛰어든다. 그녀는 미국인이고 (그러니까 직선적이고), 시인이며 (그러니까 당돌하고), 아들을 둔 이혼녀이고 (그러니까 조신한 처녀처럼 굴 필요를 못 느끼는데다), 미국에서 공산주의 운동을 한 전력도 있는 열혈 여성이다. 이 여성이 옥스퍼드의 질서에 조금씩 익숙해져가고, 루이스 교수가 그녀에게 익숙해져 가는 과정에서 둘 사이에는 깊은 사랑이 싹튼다. 다소 생뚱맞을 수도 있는 이 연애가 설득력 있게 보이는 것은, 이것이 엄연한 실화라는 사실과, 두 명배우가 용케도 빚어내는 아름다운 화학작용 덕분이다.

조이 그래셤이 영국에 체류할 수 있도록, 루이스 교수는 그녀와 서류상으로 결혼한다. 그런데 그녀가 암 진단을 받고 죽음을 향해 시들어가면서, 그의 사랑은 거꾸로 불타오른다. 이렇게만 놓고 보면 더 이상의 신파극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위장결혼이 진정한 사랑으로 변한다는 이야기는 <깊고 푸른 밤> 이래 <파이란>, <댄서의 순정> 등 우리 영화에서도 숱하게 보았던 소재다. 그래도 우리는 이 영화들을 보며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우리 인생이란 것이 한 편의 신파극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드라마는 멜로드라마라는 어쩔 수 없는 진리를, <Shadowlands>는 다시 한 번 우리에게 증명해 준다. 진부한 줄거리를 관객에게 진정성 있게 전달하는 영화가 바로 좋은 영화다.

사실 이 영화에서 안토니 홉킨즈가 연기하는 인물이 C.S. 루이스라는 사실이라든지, 루이스가 어떤 작품을 쓴 사람이라는 사실은 그리 중요치 않다. 독신으로 살아가는 노 교수와 시한부 삶을 사는 여류 시인의 사랑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배경이 옥스퍼드라는 사실은 꽤나 중요하다. 영국인 신사와 미국인 열혈 시인의 만남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옥스퍼드의 고색창연한 도시를 배경으로 삼았기 때문에, 데브라 윙거가 연기하는 조이 그레셤은 꼭 이상한 나라에 온 앨리스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그녀가 발음하는 미국 억양의 영어는 마치 방송국에서 혼자 사투리를 쓰는 아나운서처럼 안쓰럽게 들린다. 그런 그녀가 마치 잔잔한 연못에 바윗돌을 던진 것처럼, 루이스 교수의 삶에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다.

조이 그래셤의 역할을 잘 소화한 덕분에 데브라 윙거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받을뻔’ 했던 1994년, 나는 옥스퍼드에 살고 있었다. 1993년 여름, 임신 8개월이던 아내와 함께 난생 처음으로 국제선 비행기를 타고 유학을 와서 어설픈 살림을 꾸린 곳이 옥스퍼드 대학의 기혼자 기숙사였다. 런던에서 친구의 차를 얻어 타고 두 시간 반쯤 달리니 옥스퍼드로 들어섰다. 그때 차창 밖으로 처음 본 풍경의 경이로움을 나는 잊지 못한다. 첨탑을 가진 중세의 건물들이 즐비한 거리. 그 사이사이를 자전거로 누비는 학생들. 이곳에 일 년간 살면서 나는 첫 아들을 얻었고, 이 도시를 사랑하게 되었다.

옥스퍼드의 별명은 ‘꿈꾸는 첨탑들의 도시(The City of Dreaming Spires)'다. 컬리지라고 부르는 유서 깊은 대학들이 도시를 이루고 있고, 여러 개의 컬리지들이 한 데 모여 옥스퍼드 대학(Oxford University)을 이루고 있다. 학생들은 시험 때와 컬리지 만찬 때 검은 가운을 입도록 되어 있다. 시험 날이 되면 옥스퍼드의 거리는 펄럭이는 가운을 나부끼며 자전거를 타는 학생들로 가득하다. 옥스퍼드에도 퍼브(Pub)라고 부르는 주점이 있는데, 문 닫을 시간이 되면 주인이 손에 든 종을 딸랑딸랑 울리며 손님들 사이로 뭐라뭐라 외치며 돌아다닌다. 신기한 것은 그 외쳐대는 말이 라틴어라는 점이다.

여름이 되면 옥스퍼드의 아름다움은 밝은 태양빛 아래 활짝 피어난다. 학생들은 시내를 가로지르는 처웰(Cherwell) 강변으로 가서 길쭉하고 바닥이 납작한 ‘펀트(punt)’라는 배를 타고 천천히 강물을 거스르며 햇살을 즐긴다. 펀트에 몸을 싣고  강물 위에 떠있노라면, 시간이 홀연 느린 속도로 흘러간다. 펀트는 얼핏 보면 베네치아의 곤돌라(gondola)와 흡사해 보이는데, 곤돌라는 노를 저어 가지만 펀트는 긴 막대기로 얕은 강바닥을 찍어 밀면서 간다.

옥스퍼드에서 가장 인기가 있는 건축물을 세 개만 꼽아보자면, 크라이스트처치 컬리지(Christ Church College)와 래드클리프 카메라(Radcliffe Camera), 그리고 성처녀 메리 교회(University Church of Saint Mary the Virgin)를 들 수 있겠다. 크라이스트처치 컬리지는 옥스퍼드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건물과 정원을 가지고 있다. 영화 해리포터에 등장하는 호그와트 마법학교의 그레이트 홀은 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의 학생식당을 베낀 것이다. 보들리언 도서관(Bodleian Library)의 일부인 래드클리프 카메라는 그 독특한 외관으로 주목을 끌기 때문에 <Shadowlands>는 물론, <The Saint>(1997), <An Education>(2009) 등 옥스퍼드를 배경으로 사용하는 영화에는 반드시 등장한다. 이 건물에서 사각모를 쓰고 졸업식을 했을 때, 내 마음은 잘 구워진 빵처럼 부풀어 올랐었다.

영어가 ‘English’라고 불리고 있다는 사실이 웅변적으로 말해주듯이, 영국식 영어는 미국 영어에 비해서 훨씬 더 기품이 있게 느껴진다. 그 중에서도 표준어로 치는 것이 바로 ‘Oxford English’다. 미국 사람들도 옥스퍼드에 오면 이 도시가 상징하는 역사와 전통 앞에서 주눅이 드는 모양이다. 1938년 MGM이 만든 <A Yank at Oxford>라는 영화가 있었다. ‘30년대의 톰 크루즈’였던 로버트 테일러가 주인공이고, 비록 조역이지만 <Gone with the Wind> 출연 이전의 비비언 리도 등장한다.

미국의 고향에서 만능 운동선수 겸 우등생인 리 쉐리던(로버트 테일러 분)은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로 유학을 온다. 런던에서 옥스퍼드로 오는 기차 안에서 만난 옥스퍼드 학생들에게 잘난 체를 한 덕분에, 그는 도착한 날부터 가짜 환영식으로 골림을 당한다. 비비언 리는 나이 많은 서점 주인의 아내이면서 젊고 잘 생긴 학생들을 유혹하는 엘자라는 유부녀 역할을 맡았다. 그녀가 잘난 청년을 꼬드기는 말은 매번 한결같다. 쉐리던이 옥스퍼드에 도착하던 첫날부터 그와 앙숙이 된 폴이라는 영국 청년이 있다. 쉐리던은 폴의 누이에게 연정을 품고, 폴은 엘자와 밀애를 나눈다. 그러다가 폴과 엘자의 부적절한 관계가 발각될 위기에 놓이는데, 쉐리던은 자신이 오해를 받으면서도 입을 다물어 퇴학을 당할 위기에 처한다. 때마침 잘난 아들을 만나러 미국에서 건너온 쉐리던의 아버지가 발휘한 기지 덕분에 모든 사람이 위기를 넘기고, 쉐리던과 폴은 나란히 보트 경주대회에 출전해 숙적인 케임브리지대를 이긴다.

이 영화는 지금 보면 어수룩한 유머가 포함된 미국식 얄개전이라고 할 만 하다. 옥스퍼드에 온 양키 쉐리던은 자기만의 방식대로 큰소리를 치며 학교 생활을 해 나가는데, 이 영화에서 로버트 테일러의 이미지는 그가 영화에서 보여준 가운데 가장 활기차고 야성적인 모습이 아니었을까 싶다. 영화 속에서 쉐리던이 주눅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거꾸로 미국인들이 영국에 대해서 가지는 자격지심을 보여주는 것만 같아서 흥미롭다. 실은 <A Yank at Oxford>라는 제목 자체가 마치 ‘촌놈 상경기’같은 냄새를 풍긴다. 옥스퍼드는 무릇 그런 도시다. <A Yank at Oxford>는 1984년에 로브 로우와 알리 쉬디가 주연하는 <Oxford Blues>로 개작이 되었다는데, 아직 보지는 못했다. 1984년의 옥스포드 풍경이 궁금해지면 그때 가서 찾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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