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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pendence Day

posted May 20,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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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 시절 고문(古文)선생님께서는 “역사는 공인된 허구(History is a falsehood agreed upon)”라는 멋진 격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저는 그 가르침을 접한 뒤로, 역사적 기록을 접하면 언제나 그것을 기록한 사람의 모습도 찾아보려고 애쓰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역사가 공인된 허구가 될 수 있는 까닭은, 그것이 기록되기 때문입니다. 기록되는 것이 역사만은 아니죠. 제가 생각하기에, 영화야말로 공인된 허구입니다. 적어도 세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영화는 눈속임(illusion)입니다. 우리가 은막 위로 보는 동영상은 실은 1초당 24 프레임씩 바뀌는 정지된 그림에 불과합니다. 어리숙한 우리 시력 덕택에 殘像現狀이라는 즐거운 착각을 누리는 거죠. 굳이 이름 붙이자면 기술적 허구라고나 할까요. 1895년 뤼미에르 형제가 기차의 도착을 동영상으로 보여주자 혼비백산했던 관객들은 100년이 넘도록 발전해온 눈속임의 기술에 꾸준히 적응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속고, 여전히 놀랍니다. 마술 같은 환영에 속아 넘어가는 재미를 찾아 오늘도 극장에 가는 거죠. 관객들이 과거 한국영화에서 못 보던 규모의 특수효과를 구경하려고 기꺼이 돈을 내고 <디워>의 상영관을 찾는다면, 그들을 바보로 취급할 자격을 가진 영화평론가란 있을 수 없습니다.


    둘째, 영화는 가공의 이야기(fiction)입니다. 서사구조상의 허구라고 하겠습니다. 실존 인물이 등장하는 다큐멘터리도 있긴 하죠. 그러나 어떤 현실도 일단 영화로 만들어지면 특정한 의도로 편집되고 착색됩니다. 60년대 미국의 다이렉트 씨네마, 프랑스에서 유행하던 시네마 베리떼 같은 사실주의 사조의 존재는 오히려 드라마가 영화의 본류임을 반증하는 가냘픈 항변에 지나지 않습니다. 같은 사건도 시각에 따라서, 또 그것을 기억하는 사람에 따라서 전혀 딴 이야기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멋지게 보여준 영화로, 쿠로자와 아키라의 <라쇼몽(羅生門)>과 홍상수의 <오! 수정>이 있었죠. ‘편집된 현실’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닙니다. 최근 마이클 무어가 Fahrenheit 9/11 같은 다큐드라마로 유명세를 타기도 했지만, 실존 인물의 동영상과 뉴스화면들을 짜깁기한다고 해서 그것이 주관적 진실의 한 가지 번안본(version) 이상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건 아닙니다. 경우에 따라, 그런 시도는 오히려 진실과 가장 먼 선전물을 낳을 수도 있죠. 무어의 Bowling for Columbine이라는 영화를 본 관객은 거기에 재연한 장면과 끼워 넣은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채기 어렵습니다.


    셋째, 영화는 작품(art)과 상품(product)의 혼성물(hybrid)이라는 구조적 허구를 지니고 있습니다. 영화는 공동작업의 산물이요, 관객집단의 관람행위를 전제로 하기 때문입니다. 진지한 영화감독들이 작가(auteur)로 대접받게 된 20세기 후반부터, 타르코프스키나 벤더스, 트뤼포 같은 감독들은 예컨대 바그너나 헤세처럼 당당한 예술가로 취급됩니다. 상업영화를 만든 채플린이나 히치코크 같은 감독들조차 그 대열에 끼었죠. 하지만 작곡가나 화가, 소설가와는 달리, 골방에서 홀로 영화를 만드는 영화감독은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영화를 감상하거나 평할 때, 이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영화는 예술작품인 동시에 기획상품입니다. 소비자를 완전히 배제한 순수예술로서의 영화도, 창작행위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거래물품으로서의 영화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영화제작집단은 예술가와 장사치의 중간에, 관객들은 비평가와 소비자의 중간에 놓이게 됩니다. 이렇게 어정쩡한 구조적 틈에서 비롯되는 다의적 긴장관계는 좋은 영화란 무엇인지 규정짓는 것을 퍽 어려운 일로 만듭니다.


    Independence Day는 롤랜드 에머리 감독의 1996년 영화입니다. 외계인의 침공을 소재로 삼은 이 영화는 그때까지 영화산업이 집약해온 최고 수준의 현란한 눈속임(illusion) 솜씨를 자랑했죠. 비약적으로 발전한 특수효과는 더 이상 영화의 ‘특수한’ 보조장치가 아니라 중심적 기술이라는 점을 이 영화는 보여줬습니다. 과장을 조금 보태면, 거의 백년 내내 서사구조 중심으로 발전해 온 영화산업이 이제 다시금 뤼미에르가 영화를 처음 만들었던 시절처럼 단순한 ‘구경거리’에 해당하는 영화들에도 작지 않은 자리를 내 주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런 현상의 신호탄이라고 부를 만한 영화들을 고른다면, Independence Day는 그 대열에 끼워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서사구조를 짐짓 심각하게 분석하는 일이 가지는 뜻은 작을 것입니다. 개봉되던 무렵 이 영화는 너무 노골적인 소영웅주의와 애국주의, 미국중심주의로 화제에 올랐습니다. 이 영화는 세계적 종말을 초래할 외계의 침공을 몇몇 미국인들의 영웅적 희생과 승리의 이야기로 축소시켰고, 미국이라는 공동체의 안위를 지키는 것이 그 영웅들의 사명이었던 것이죠. 비슷한 시기의 Deep Impact(1998), Armageddon(1998)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005년 영화 War of the Worlds에서는 주인공이 자기 딸만 힘겹게 구할 뿐, 정작 지구의 미생물이 외계인을 물리치는 것을 구경만 하고 있는 것과는 대비가 됩니다.


    Independence Day는, 이 영화가 개봉된 지 불과 5년 후 뉴욕에서 9-11 테러사건이 발생했을 때,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묘한 기시감(deja-vu)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미국의 적대세력에 의해 최초로 미국 본토에 가해진 사상 최악의 테러공격은 특히 미국인들에게는 외계인의 침략만큼이나 낯선 충격이었을 터입니다. 결과적으로 Independence Day는 2001년 직후였다면 만들어지지 못했을 영화의 반열에 올라버렸습니다. 몇 해가 더 흐른 지금 이 영화의 서사구조를, 당시 미국 영화시장의 상황과 연관지어 생각해 보면 두어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보입니다.


    90년대 내내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테러는 증가추세에 있었습니다. 세계무역센터 폭파시도는 93년에도 있었고, 25만명의 살상을 노리던 이 시도는 실패해서 여섯 명의 사망자와 천여 명의 부상자를 낳았었죠. 98년에는 미국 전함 콜호가 폭탄공격을 당했고, 2000년에는 탄자니아와 케냐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 동시에 폭탄공격을 당했습니다. 미국의 새로운 적은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미국이 98년 오사마 빈 라덴을 향해 78기의 크루즈 미사일을 발사한 것은 전술적 효과를 기대하기는 어려운 군사행동이었지만 하나의 상징성을 띱니다. 그것은 사상 최초로 국가가 개인을 상대로 치른 전쟁을 상징합니다. 이런 상황은 세계화 현상의 부산물이었고, 세계화는 갈수록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제 와서 돌아보니, 영화 Independence Day는 90년대말의 불안한 안보정서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예언적인 흉몽과도 같았던 셈이죠.


    Independence Day와 그 이듬해에 만들어진 Air Force One은 공통적으로, 적들이 걸어오는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군인출신 미남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삼고 있습니다. 씩씩하고 애국적인 지도자를 그린 영화가 히트하던 현실 속에는, 언변은 뛰어나지만 국익을 행동으로 수호하는 데 조심스러웠던 병역 기피자 클린턴 대통령이 있었습니다. 그는 결국 추악한 섹스 스캔들로 탄핵재판까지 직면해야 했었죠. 앞서 제가 설명한 표현을 다시 쓰자면, Independence Day는 ‘예술품’보다는 ‘상품’에 근접한 영화였습니다. 모든 상품이 시장에 민감하듯이, Independence Day 같은 영화에는 90년대말 미국인들이 바라던 지도자의 상이 어느 정도 투영되어 있을 개연성이 큽니다. 이 영화는 미국에서 선출될 다음 지도자가 어떤 노선을 지향하게 될지를 나름대로 보여주는 지표이기도 했던 게 아닐까요. 미국정부의 국제정치노선에 대한 안팎의 비판이 커진 2005년 무렵 이후로는 이런 영화들을 볼래야 볼 수 없다는 점을 생각하면, 영화시장이라는 정치적 온도계의 민감성은 과소평가할 일이 아닙니다. 헐리우드를 꿈의 공장이라고들 하죠. “말도 안 되는 것처럼 보이는 꿈들이 종종 가장 심오한 꿈에 해당한다”고 말한 사람은 프로이드 박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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