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Welcome Page
    • drawing
    • photos
    • cinema
    • essay
    • poems
    • music
    • toons
    • books
    • mail

자전거 여행

posted Jul 17, 2008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수정 삭제

bike.jpg

 

 

자전거 여행

- 2000, 김훈, 생각의 나무

 

    스타인벡이 미국을 횡단하며 자신의 자동차에게 ‘로시난테’라는 이름을 붙였듯이,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자전거에게 ‘풍륜’이라는 이름을 선사하고 1999년 가을부터 2000년 여름 사이에 전국 방방곡곡을 여행했다. 하지만 미국을 재발견하려던 스타인벡과는 달리, 김훈은 자신의 내면을 다시금 읽어내고 싶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다 보니 이 책에 담겨진 나르시즘의 농도가 다소 짙어지긴 했지만, 김훈의 <자전거 여행>은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로 쓰여진 여행기에 해당한다고 감히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책의 프롤로그는 자전거에 지금껏 바쳐진 산문들중 가장 멋지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세상의 길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온다. 강물이 생사가 명멸하는 시간 속을 흐르면서 낡은 시간의 흔적을 물 위에 남기지 않듯이, 자전거를 저어갈 때 25,000분의 1 지도 위에 머리카락처럼 표기된 지방도, 우마차로, 소로, 임도, 등산로 들은 몸 속으로 흘러 들어오고 몸 밖으로 흘러나간다. 흘러오고 흘러가는 길 위에서 몸은 한없이 열리고, 열린 몸이 다시 몸을 이끌고 나아간다. ...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일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 갈 때의 오르막이 올 때는 내리막이다. 모든 오르막과 모든 내리막은 땅 위의 길에서 정확하게 비긴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비기면서, 다 가고 나서 돌아보면 길은 결국 평탄하다. 그래서 자전거는 내리막을 그리워하지 않으면서도 오르막을 오를 수 있다. ... 땅 위의 모든 길을 다 갈 수 없고 땅위의 모든 산맥을 다 넘을 수 없다 해도, 살아서 몸으로 바퀴를 굴려 나아가는 일은 복되다.”

 

    <칼의 노래>와 <남한산성>으로 널리 알려진 작가 김훈은 1948년 서울에서 소설가 김광주의 2남3녀중 셋째로 태어났다. 김광주는 우리 무협소설 1세대 작가로 <비호>의 작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한겨레 기자이던 김훈은 2005년 선친의 작품 <비호>를 재출간하면서 감회 어린 서문을 썼던 적이 있다.

 

    “소년 시절에 병석에 누운 아버지의 구술을 받아서 무협지 원고를 대필했다. 그것이 내 문장 공부의 입문이었다. 가난은 가히 설화적이었다. 그 원고료로 밥을 먹고 학교도 다녔고 용돈을 타서 술도 마셨다. 그 아이가, 그 아버지의 나이가 되도록 늙어서 다시 그 책을 펴내니 눈물겹다.”

 

    선친으로부터의 문장 수업이 헛되지 않았던지, 그는 보기 드문 경지의 미문을 구사한다. 한글이 문학의 도구로 사용된 역사는 아직 짧다. 한글로 구사할 수 있는 표현의 영역을 넓혀나가는 일이 작가들의 몫이라면, 김훈은 분명 그 최전선에 자리 잡고 있는 셈이다.

 

    “‘숲’이라고 모국어로 발음하면 입 안에서 맑고 서늘한 바람이 인다. 자음‘ㅅ’의 날카로움과 ‘ㅍ’의 서늘함이 목젖의 안쪽을 통과해나오는 ‘ㅜ’ 모음의 깊이와 부닺쳐서 일어나는 마음의 바람이다. ‘ㅅ’과 ‘ㅍ’은 바람의 잠재태이다. 이것이 모음에 실리면 숲 속에서는 바람이 일어나는데, 이때 ‘ㅅ’의 날카로움은 부드러워지고 ‘ㅍ’의 서늘함은 ‘ㅜ’ 모음 쪽으로 끌리면서 깊은 울림을 울린다. 그래서 ‘숲’은 늘 맑고 깊다. 숲 속에 이는 바람은 모국어 ‘ㅜ’ 모음의 바람이다. 그 바람은 ‘ㅜ’ 모음의 우림처럼, 사람 몸과 마음의 깊은 안쪽을 깨우고 또 재운다. ‘숲’은 글자 모양도 숲처럼 생겨서, 글자만 들여다보아도 숲 속에 온 것 같다. 숲은 산이나 강이나 바다보다도 훨씬 더 사람 쪽으로 가깝다. 숲은 마을의 일부라야 마땅하고, 뒷담 너머가 숲이라야 마땅하다.”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 집이다. 그것이 그 건물의 전부이다. 그 서당은 한옥이 건축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만을 가지런히 챙겨서 가장 단순하고도 겸허한 구도를 이룬다. 그 맞배지붕과 홑처마는,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浮華)를 용납지 않는 자의 정신의 삼엄함으로 긴장되어 있고, 결핍에 의해 남루해지지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써 온화하다. 그 서당 안에서 퇴계의 공부방은 2평을 넘지 않는다. 인간이 지상에 세우는 물리적 구조물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의 절박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도산서당의 구조는 말해주고 있다.”

 

    김훈이 구사하는 미문은 냇물 속의 조약돌처럼 아름답지만, 그런 문장들로만 가득 찬 책 한 권은 삼키기엔 너무 뻑뻑한 국물 같은 면이 없지 않다. 그의 문장들은 거의 언제나 분명한 주의주장보다는 비스듬한 자세로 서서 회의하는 시각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는 종종 美文主義者라는 혐의를 받는다. 글은 어떻게 쓰느냐보다 오히려 무엇을 쓰느냐가 더 중요하겠으므로, 미문은 좋은 것이로되 미문주의는 미덕이 될 수가 없을 터이다.

 

    김훈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고, 시사저널의 편집장을 역임했으며, 일종의 필화로 시사저널을 떠난 뒤 국장급 경력과 50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한겨레신문의 사회부 평기자로 다시 기자 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그는 다시 홀연히 신문사를 떠나 <칼의 노래>로 “우리 문단에 벼락처럼 떨어진 축복”이라는 호평을 받으며 소설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한겨레에서 그의 직속상사 노릇을 했던 30대 중반의 권태호 기자가 2006년에 블로그에 올린 “김훈이 한겨레를 떠난 이유”라는 두 편의 글은 김훈이 어떤 사람인지를 손에 잡힐 듯이 보여준다.

(http://blog.ohmynews.com/hankis/135190 , http://blog.ohmynews.com/hankis/135215)

 

    “김훈이란 사람은 사물에 대한 깊은 성찰이 돋보이긴 하나 그 내면은 마치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 김훈을 잠시나마 겪은 저의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떨 때는 삶을 관조하는 듯한 그가 작은 일(우리가 생각하기에)에도 화를 참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 김훈과 홍세화는 참 사람이 이렇게도 다를 수 있구나 할 수 있을 정도로 극과 극입니다. 김 선배는 겉으론 강하지만 속은 너무도 부드러운 아이 같은 감성을 지닌 사람이고, 홍 선배는 겉으로는 한없이 부드럽고 인자하지만, 속은 강철같아서 이세상 사람들이 다 변할 때까진 전혀 흔들리지 않을 사람입니다. 그래서 저는 김 선배는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귀엽고, 홍 선배는 무섭습니다.”(권태호 기자)

 

    아름다움에 집착하다 보면 유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게 마련인 것일까? 때때로 쇼펜하우어를 연상시킬 만큼, 김훈에게서는 세상을 떠나려는 염세적 의지를 고의로 껴안고 싶어하는 안간힘이 보인다.

 

    “갈대는 빈약한 풀이다. 바람 속으로 씨앗을 퍼뜨리는 풀은 화려한 꽃을 피우지 않는다. 그것들은 태어날 때부터 늙음을 간직한다. 그것들은 바람인 것처럼 바람에 포개진다. 그러나 그 뿌리는 완강하게도 땅에 들러붙어 있다. ... 4월의 빛나는 산하에서는 겨울을 난 갈대숲이 가장 적막하다. 모든 씨앗들이 허공으로 흩어진 뒤, 묵은 갈대숲은 빈 껍데기로 남아서 그 껍데기까지도 바람에 불려간다. 손으로 만지면 먼지처럼 바스라진다. 바다로 불려간 씨앗들은 다 죽고, 갯벌 위로 떨어진 씨앗에서 어린 갈대 싹들이 돋아나 다시 바람에 포개진다. 이제 갈대 줄기가 쓰러질 차례다.”

 

    “진화가 생명의 운명이라고 믿는 사람들은 도요새가 중생대 백악기의 어느 갯가에서 그 종족의 독자성을 완성한 것으로 보고 있다. 수억만 년의 시공을 그것들은 해독되지 않는 높은 옥타브로 울면서 연안에서 연안으로 퍼덕거린다. 수억만 년 전에 이미 멸절된 종족의 직계 후손으로 이 연안에 내려온 새들은 또다시 수억만 년 후의 멸절을 향하여 필사적으로 날아간다. 지나간 멸절과 닥쳐올 멸절만이 그것들의 고향이고, 그것들은 이 세상의 모든 연안을 나그네로 떠돌며 고향으로 가고 있다. 그러므로 <종의 기원> 속의 새들은 창조주께서 보시기에 좋았던 낙원의 새들보다 덜 아름답지 않다. 다만 불우하다. 이승의 연안에 내리는 다윈의 배고픈 새들은 멸절과 멸절 사이의 시공을 울면서 통과하는 필멸의 존재로서 장엄하다.”

 

    “봄볕이 내리쬐는 남도의 붉은 흙은 유혹적이다. 들어오라 들어오라 한다. 부드럽게 부풀어오른 붉은 흙 속으로 들어가 누워서 백골을 가지런히 하고 쉬고 싶다. 가끔씩 죽는 꿈을 꾼다. 꿈에 내가 죽었다. 죽어서 병풍 뒤로 실려갔다. 병풍 뒤는 어두웠다. 칠성판 위에 누웠다. 병풍 너머에는 나를 문상 온 벗들이 모여서 소주를 마시며 떠들고 있었다. 나는 죽은 지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아직도 살아서 떠드는 이승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취한 벗들은 병풍 너머에서 마구 떠들었다. 내가 살았을 때 저지른 여러 악행이며, 주책이며, 치정을 그들은 아름답게 윤색해서 안주거리로 삼고 있었다. 취한 벗들은 정치며, 문학이며, 영화며, 물가를 이야기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세련된 서비스를 받을 수 있는 술집이며, 이발소에 관한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다.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내 귀에는 취한 벗들의 떠드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아, 저 한심한 자식들. 아직도 살아서 저런 헛소리들을 나불거리고 있구나. 이 자식들아. 너희들하고 이제는 절교다. 절교인 것이다. 아, 다시는 저것들을 상종 안 해도 되는 이 자리의 적막은 얼마나 고귀한 것인가. ... 저 캄캄한 흙구덩이 속으로 들어갈 일을 생각하니, 발버둥이쳐졌다. 그러나 발버둥이는 쳐지지 않았다. 나는 발버둥이쳐지지 않는 발버둥이를 버둥거리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식은땀이 등판을 적셨고 아내는 돌아누워 잠들어 있었다. 마당에서 개 짖는 소리가 났다. 나는 개 짖는 소리에 매달려 다시 이승으로 돌아왔다. 써야 할 원고의 마감시간이며, 글의 방향 같은 것들이 다시 내 머릿속에 떠올랐다. 나는 어둠을 쳐다보면서 땀에 젖은 요 위에 누워 있었다. 나는 문상 왔던 병풍 너머의 벗들이 그리워서 어둠 속에서 울었다. 나는 죽지 않았던 것이다.”

 

    속세의 단내 나는 고단함을 멀리 하고픈 기자 김훈이 써서 인기를 끌었던 한겨례신문의 <거리의 컬럼>이 마치 베를린 시내를 떠돌면서 사람들을 관찰하던 빔 벤더스의 천사들의 시선처럼 국외자적인 정서를 담고 있던 건 어쩌면 필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속세와 묘한 거리를 두는 그의 낯선 시선이 담겨진 아름다운 단문들은 원고지 3매 분량의 이 짧은 컬럼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났었다. 그의 염세주의는 ‘성향’이라기 보다는 고의로 완강하게 고수하는 일종의 ‘벽(癖)’처럼 느껴진다. 그의 문장들은 우리에게 사춘기 시절에 겪던 우울감의 아련한 추억을 되살려준다.

 

    그런 그가 자신의 짜라투스트라를 이순신에게서 발견한 것 또한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무릇 이순신 장군은 한국인에게 특이한 존재다. 그는 난세에서 나라를 건진 호국의 영웅이기도 하지만, 자신이 부당한 핍박을 받고 있다고 믿는 모든 사람들의 수호성인과도 같다. 김훈은 자신의 이순신에게 자신의 허무주의를 투영한다. 그래서 그의 이순신에게서는 죽음의 냄새가 짙게 피어오르는데, 그 죽음은 결연히 감수되는 그런 죽음이라기보다, 김훈이 꿈 속에서 반갑게 맞이했던 병풍 뒤의 죽음 같은, 그런 염세적 탈출이다. 이 책에 실린 짧은 이순신에 대한 글은 후일 <칼의 노래>로 소설이 된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칼이었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삼엄한 단순성에는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 ... 한바탕의 전투를 치르고 바다에서 돌아온 날 저녁마다, 또는 전 함대를 전투 배치한 출정의 새벽마다 몸에 병이 깊은 그는 요가 젖도록 식은땀을 흘리며 기진맥진하였다. 절망에 맞서는 그의 마음의 태도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고 거기에 일체의 정서를 개입시키지 않는 방식이다. ... 그는 절망을 절망으로 긍정하는 죽음의 힘으로 이 아수라를 돌파한다. 그는 죽음 앞에서 대안을 설정하지 않았다. 그는 달아나는 부하들은 붙잡아놓고 그 대안 없음을 가르쳤다. 이 아수라 속에서 살길은 애초부터 없는 것이다. 싸우다 죽든지, 달아나다 죽든지, 군율에 죽든지 죽음의 방식만이 선택의 길이다. ... 이순신의 죽음이 ‘의도된 전사’였으며, ‘위장된 자살’이었다는 주장은 매우 신빙성 있는 정황 증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그에게는 전후의 권력 재편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김훈의 탁월한 문장력이 때때로 진솔한 소통을 가로막듯, 그의 독특한 정서는 그의 자산이기도 하고 작가로서의 한계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김훈은 그저 미문을 구사하는 문장가만은 아니다. 긴 세월 동안 자신의 주변을 현미경처럼 관찰하는 기자로서 혹독한 훈련을 받았던 흔적들은 그의 글들의 튼실한 뼈대가 되어준다. 소설가로서 그는 그 자산을 소중히 불려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날짜 조회 수 추천 수
67 <새 폴더를 열면서> 아들들에게 권하는 책들 2008.02.07 972 36
66 <회복된 세계>에 관하여, Kurt Campbell 2021.02.22 93 0
65       →감사합니다. 2013.10.09 425 32
64     →우연히 흘러들어 글과 그림 잘 구경하고 갑니다 2013.10.09 482 41
63     →최인호의 성탄편지 (중앙일보) 2013.12.30 509 18
62     →키신저의 의미 - 닐 퍼거슨 (Foreign Affairs Aug 18, 2015) 2016.02.14 5396 17
61   → * 참고 * Robert Kagan의 article 2008.09.14 1205 105
60   →Re, 가슴 뛰는 우리글의 향연 2008.04.29 865 62
59   →[참고] 번역가 안정효 추천 영어도서 100권 2008.03.26 1325 70
58   →논어의 발견 2016.02.04 207 6
57   →답장 2016.07.29 171 8
56   →만들어진 신 (The God Delusion) file 2008.03.10 914 60
55   →복거일 저서 2008.06.29 1008 77
54   →재미있게 읽었어요 2012.01.19 944 84
53   →최선생님, 하늘나라에서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2013.09.26 629 53
52   →헨리 키신저을 위한 변론 - 로버트 카플란 (May 2013, Atlantic Monthly) 2013.07.05 994 66
51 13.67 file 2016.07.17 226 10
50 2015년, 몇 권 2016.02.02 632 6
49 From Beirut to Jerusalem / Longitudes and Attitudes file 2008.05.25 837 44
48 Guns, Germs, and Steel : The Fate of Human Societies 2008.05.31 833 42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Next
/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