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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posted Jun 29,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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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

- 2005, 복거일, 삼성경제연구소

 

    복거일(卜鉅一) 선생은 소설가다. 그는 한국에서 대체역사소설의 장을 열었고, 한국 과학소설의 선구자이며, 그의 소설들은 독특하고도 뛰어난 작품성을 인정받아 왔다. 그러나 90년대말 어느 시점부터인가 그를 소설가로만 소개하는 것이 얼마나 타당한 일인지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그의 글쓰기는 소설이라는 장르에 갇혀있지 않기 때문이다. “예이츠의 시들에 대해 절망적인 사랑을” 느낀다는 그는 기업체에 근무하는 동안 <현대문학>에 시를 추천받았었고, 문학과 지성 시인선에 두 권의 시집을 출간한 시인이며, 영어 공용화론이나 식민지사 재조명 같은 논쟁적 이슈에 불을 지르기 두려워하지 않는 경제학자이고, 철학자이며, 사회평론가이기도 하다. 그는 품위를 갖춘 지식인이되 비겁하지 않다는 점에서 두드려져 보인다. 그의 힘찬 글들은 과거 두려움을 모르는 꼿꼿한 지식인의 전형이던 ‘선비’가 구전 속에만 존재하던 관념적 인간상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위안을, 또는 확신을 준다. 그가 처음 저술한 사회평론서 <현실과 지향>의 목차가 18년이 흐른 오늘도 우리 사회에서 우선적 논의를 필요로 하는 현안이고 그가 쓴 내용이 빛을 잃지 않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통찰력에 대한 감탄과 우리 사회의 더딘 진보에 대한 한탄의 심정을 동시에 갖게끔 만든다.

 

    1946년 충남 아산에서 출생한 그는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은행과 제조 회사·무역 회사 등에 근무했고 기업체 근무중에 노동조합 운동에도 참여한 바 있으며, 1983년 직장 생활을 그만두고 4년간 소설 <비명을 찾아서> 집필에 몰두한 끝에 1987년 혜성과 같이 문단에 데뷔했다. <비명을 찾아서>는 식민지 한국이 해방을 맞지 못한 채 현대를 맞이했다는 가정하에 ‘반도인’인 주인공의 삶과 고민을 추적한다. 이 책을 처음 읽던 당시에는 선연히 느끼지 못했지만, 저자의 문제의식이 80년대 한국인의 정신이 처해 있던 맥을 얼마나 잘 짚어내고 있었는지는 지금 와서 오히려 또렷이 드러난다. 우리 정신의 어떤 부분은 아직도 진정한 해방을 맞지 못하고 있으며, 해방 이후의 역사를 직시하기 두려워하고, 식민지적 그늘이라고 부를 수 밖에 없는 외국인혐오증(Xenophobia)를 벗어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문제의식은 21세기의 친일 문제를 다룬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에서 구체적인 형상을 갖추고 드러난다. 그는 일본의 조선에 대한 지배가 철저하고 혹독했지만, 공식적이고 실질적이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운다. 우리는 마치 임의로 역사의 일부를 지워버리는 것이 가능한 일인 것처럼, 흔히 사용하는 수사처럼 잘못 끼웠지만 풀어버릴 수 있는 “첫단추”인 것처럼 스스로를 속여 왔다는 사실을 그는 깨우쳐 주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하게도, 이 땅에서는 아직 어떤 역사학자도 차마 나서서 말하지 못하는 ‘불편한 진실’이다. 궁극적 소수자인 죽은 사람들을 변호하기로 나선 것은 저자 자신이 밝혔듯이 그가 “작가이기 때문일 터이다.” 작가적 호기심과 순수함, 억척스레 쌓아올린 지식과 잘 벼려진 통찰력, 선비의 용기를 함께 갖춘 사람은 흔치 않으니, 그는 (폴 새뮤얼슨이 밀튼 프리드먼을 일컬어 그렇게 불렀듯이) “만일 우리 곁에 없었다면 만들어내기라도 했어야만 할” 그 누군가에 해당한다.

 

    그는 쉼 없이 글쓰기에 임하고 있고 그의 글들은 모두 ‘인식의 돌파구’를 제시하기 때문에, 어느덧 30여권에 이르도록 늘어난 그의 저서들 중 한 권만을 소개하라고 한다면 난감한 일이다. 그래도 만일 꼭 골라야만 한다면 나로서는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라는 소책자에 손이 갈 것이다. 論理의 아름다운 裸身을 보여주는 이 조그만 책자는 지성과 용기의 합작품이다.

 

    자본주의에 대한 견해를 물으면, 공부를 웬만큼 한 사람들로부터도 놀랄 만큼 획일적인 반사적 반응이 돌아온다. 그것은 대체로 부익부 빈익빈, 황금만능주의, 물신숭배, 재벌, 착취, 인간소외 등등의 상투적 관념들로 이루어진 반감 어린 반응이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복거일 선생은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외로운 변론을 펼친다. 닐 퍼거슨이나 로버트 카플란이 제국이라는 용어를 담담하게 사용하듯이, 복거일은 굳이 ‘시장경제’라는 완곡어법 뒤로 숨지 않고 자본주의의 이름을 당당히 부른다.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을 변호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는 자본주의가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며 정의로운 체제임을 간명하게 설명하면서도, 자유의 본질과 시장의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직관에 반하는 지성적 통찰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러한 변론이 지식인의 외로운 과업이라는 사실을 잘 이해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그의 저서 중 한 권의 제목이 가리키듯) ‘조심스러운 낙관’을 잃지 않는다. 그의 노고는 함박눈이 내리는 저녁에 홀로이 집앞의 눈을 쓸어내는 사람을 연상시킨다. 사람들은 비웃을 지도 모르지만, 내일 아침 실족하는 사람은 그의 덕분에 줄어들리라.

 

    유심히 살펴보면 그는 소리 없이 많은 추종자와 후학과 제자와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런 뜻에서, 그가 혼자 힘으로 한국사회에 기여한 바는 겉으로 얼른 드러나는 것보다 크다. 워낙 다방면에 걸친 탓으로 그의 관심은 넓고 얕은 것처럼 착각될 수도 있지만, 그의 일련의 작업은 저 옛날 아테네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그랬듯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미신을 걷어내고 진실의 껍질을 걷어내려는 일관된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의 얕은 직관에 부합하기 때문에 손쉽게 퍼져나가는 ‘밈’(생명-문화 복합체의 복제단위)의 그릇됨을 폭로하는 것이 그가 스스로 떠맡은 과업이다. 그래서 그는 민족주의 사관이 자긍심과 향수를 강요하다시피 우리를 세뇌시킨 조선시대가 실은 철저하고도 처절한 노예제사회였다는 점을 지적했고(그는 진정한 진보주의자다!), 신토불이와 식량안보 논리가 세상을 뒤덮고 있을 때 식량은 무기가 될 수 없음을 주장했고, 농업은 본질적으로 환경파괴적임을 설파했으며, 남북대치 현실을 직시하기 꺼리는 대세 속에서 유화정책이 가지는 문제점을 짚었고, 페미니즘이 사안의 본질을 흐리는 호주제와 같은 사안에서 생물학적 통찰을 요구했다. 하기사, 이 땅에서 친일파라고 불렸던 사람들을 스스로 나서서 변호했다면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할 것인가. 돌이켜 보면 하이예크든 프리드만이든 자유주의의 스승들은 모두 눈보라 속에서 묵묵히 눈을 치우던 사람들이었다.

 

       여기 실린 글들은 거센 파도에 의해 씻겨나갈 바닷가의 야트막한 모래 언덕과 같다. 논리를 따지며 설득하려는 목소리는 간결한 구호나 거친 야유에 맞서기 어렵다. 그러나 그런 설득의 목소리가 마냥 헛된 것은 아니다. 파도에 씻겨 나감으로써, 모래 언덕은 파도의 거센 힘을 조금은 줄여서 그 뒤의 땅이 덜 패게 한다.(<동화를 위한 계산> 책머리에)

 

   <정의로운 체제로서의 자본주의>를 몇 군데 요약해 둔다.

 

      자본주의는 효율적이지만 정의롭지 못하다는 인식이 널리 퍼졌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그른 생각이다. 자본주의는 정의로운 체제다. 실은, 그것은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어떤 체제보다 정의롭다. 불행하게도, 자본주의가 정의로운 체제라는 사실을 밝히는 일은 쉽지 않다. 자본주의 사회들에서 사람들이 풍요와 자유를 누리지만, 공산주의나 국가사회주의 사회들에선 사람들이 풍요는 말할 것도 없고 자유와 법의 보호를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을 만큼 명백하다. 따라서 자본주의가 일단 공산주의나 국가사회주의와 같은 체제들보다 정의롭다는 결론은 피할 길 없다. 그러나 자본주의와 그것을 떠받치는 이념인 경제적 자유주의가 정의롭다는 것은 직관적으로 또렷하지 않고 길고 어려운 설명이 따라야 비로소 밝혀질 수 있다. 반면에, 평등을 내세우는 주장들은 직관적으로 옳게 여겨진다. 자본주의의 반대자들이 자본주의의 변호자들보다 늘 목청이 높았고 훨씬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렸다는 사정이 이상하지 않다.

 

      자본주의가 정의롭다는 사실은 그것이 자연스럽다는 사실과 깊은 관련이 있다. ... 사회주의는 그런 자연적 질서가 인공적 과정을 거쳐 바뀐 뒤에야 비로소 들어설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의 성립에 동원된 강제력과 자원이 줄어들면, 사회주의 체제는 이내 허물어져서, 그 사회는 자본주의 체제로 돌아간다. 사정이 그러하므로, 자본주의는 ‘자연적 체제’다. ‘디지털 시대’에 보다 어울리는 표현을 쓰면, 자본주의는 ‘디폴트 스테이트(default state)’이다. ... 디폴트 스테이트이므로, 자본주의는 사회적 선택들과 교정적 기구들에 대한 의존도가 다른 체제들보다 훨씬 작다.

 

      재산의 소유 관계를 밝히는 재산권은 사람들의 삶에 가장 근본적 수준에서 작용한다. 아주 넓게 정의하면, 그것은 개인적 자유와 실질적으로 뜻이 겹친다. 위에서 살핀 것처럼, 한 사람의 몸 자체가 그의 재산의 핵심이고 다른 재산들은 그의 몸이 만들어낸 것들이며 몸과 재산은 또렷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런 상태에서 예견할 수 있는 것처럼, 재산권은 흔히 인권이라 불리는 것에 필수적이며 핵심적이다. ... 몸과 재산이 그렇게 밀접하므로, 재산권과 계약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경제학자들 가운데엔 사람의 자유와 권리를 재산의 관점에서 살피는 이들도 있다.

 

      종들의 진화가 개체들의 생존 경쟁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개체들의 생존 경쟁에서 둥지와 영역과 같은 재산들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므로, 재산과 관련된 욕구들, 본능들 그리고 행위들은 우리의 심성과 행태의 가장 본질적 부분을 이루었을 것이다. 자연히, 그런 원초적 재산권은 개체들의 행위들을 인도하는 가장 중요한 원친들 가운데 하나였고, 재산권의 침범은 무엇보다도 큰 분개(indignation)를 불렀을 것이다. 그리고 재산권과 관련된 그런 분개가 지금 우리가 지닌 잘 발달된 정의감으로 진화했다는 추리는 합리적이다.

 

      주목할 것은 상호적 이타주의의 수단이 본질적으로 재산이라는 사실이다. 다른 사람에게 잘해주려면, 누구나 자신의 시간과 정력과 구체적 재산을 들여야 한다. 그것을은 모두 기회비용을 뜻하며, 그런 뜻에서 이타적 행위는 자신의 재산을 상대에게 제공하는 일이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추리를 요약하면, 상호적 이타주의는 양 당사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을 서로 제공하는 것을 뜻하고, 그런 재산의 상호 제공 약속을 어긴 사람들에 대한 도덕적 분개가 사람들이 지닌 정의감의 본질이자 원초적 형태였다.

 

      평등은 좀처럼 모습을 또렷이 드러내지 않는 개념이다. 그래서 그것은 정의하기가 무척 어렵고 쓰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것을 뜻한다. 그런 혼란을 줄이려면, 먼저 평등을 기술적으로 쓰는 경우와 당위적으로 쓰는 경우를 구별하는 것이 필요하다. 즉 사람들의 특질이 평등하다는 얘기와 사람들은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얘기를 구별해야 한다. 그렇게 가려서 쓰더라도, 평등이라는 개념이 또렷해지는 것은 아니다. ... 실제로는 기회의 평등도 조심스럽게 추구되어야 한다. 그것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정책이 부딪히는 문제들은 결코 작지 않다. 로버트 노직은 <무정부, 국가, 그리고 이상향>에서 “기회의 평등에 대한 권리”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존재하는 것은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특정한 사람들의 특정한 권리들 뿐이라는 얘기다. 이것은 기회의 평등의 정당성에 대한 강력한 반론이다.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이 재산에 대한 권리의 결정적 요소라는 원칙은 자연스럽고 정의로운 것으로 널리 받아들여진다. 그런 원칙은 인류 사회들에서 보편적 원칙이었으며, 원시적 사회들과 어린아이들까지도 그렇게 여기고, 심지어 다른 종들까지 그 원칙을 따른다. 이런 사실이 한번 받아들여지면, 자본주의의 정의로움에 대한 논의는 크게 다른 모습을 띠게 된다. 즉 재산의 형성에 대한 공헌을 재산권의 기준으로 삼고 재산권을 적극적으로 시행하는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정의로운 체제임이 또렷이 드러난다. 자연히, 평등에 관한 논의는 본질적으로 자연스럽고 정의로운 체제에서 나오는 이차적 문제들에 대처하는 일러싼 논의 가 된다. 아울러 ‘성장 대 분배’라는 오래된 논쟁도 본질적 문제에 관한 논의가 아니라 대체적으로 효율에 관한 논의임이 드러난다. 효율에 관한 한, 자본주의는 다른 어떤 대안 체제들보다 뛰어나다. ... 자본주의 체제가 다른 대안적 체제들보다 더 풍요로울 뿐 아니라 더 평등한 소득 분포를 보인다는 사실엔 또 하나의 까닭이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선 다른 대안적 체제들에서보다 권력이 훨씬 널리 분산되므로, 민주주의가 훨씬 튼튼하게 뿌리를 내린다. 민주적 사회에선 가난한 사람들도 투표권을 지녔으므로, 집권한 정치 집단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복지를 늘리는 데 마음을 쏟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한 것처럼, 보통선거는 아주 강력한 평등실현자(equalizer)였다. 반면에 대안적 체제들에선, 공산주의든 국가사회주의든, 에드워드 윌슨이 “평등과 이념과 야만적 강제의 편리한 동거(the easy cohabitation of egalitarian ideology and savage coercion)”라 부른 질서가 탄생했고, 그 질서는 사람들을 잡아먹는 괴물임이 드러났다.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것은 재산권이 역사적으로 약자들을 위한 장치였다는 사실이다. 잠시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는 이 주장이 당연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법이 없는 곳에선 힘이 궁극적 심판자가 되고, 자연히, 약자들은 늘 강자들에게 지배되고 수탈당한다. 그래서 무법보다는 악법이 늘 낫다. 재산권도 그러하니, 비록 요즈음 우리 사회에선 재산권이 재산을 많이 가진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민중주의적 인식이 널리 퍼졌지만, 역사적으로 재산권은 인민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해 나왔다. 에르난도 데소토는 ... 이런 역사적 사실들에 바탕을 두고서 그는 재산권을 약자들이 쟁취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재산 소유에서의 불의’를 들어 자본주의 체제를 비난하는 사람들에게 불의의 시정이 어렵다는 사정을 들어 맞서는 것은 그들에게 도덕적 고지를 내주는 일이고, 자연히, 우리 체제를 제대로 변호할 수 없다. 다행히, 자본주의는 ‘재산 소유에서의 불의’ 주장에 맞서 자신을 변호하는 데 충분한 실적을 이미 쌓았다. 자본주의에선 다른 대안 체제들에서보다 재산 획득과정에서의 불의가 덜하다. 그런 대안 체제들은 청사진으로는 그럴듯하지만, 그래서 무지한 사람들을 열렬한 추종자들로 거느리지만, 실제로 시행되면, 청사진과는 너무 다르고 체제로서 오래 존속하기엔 너무 억압적이고 비효율저거이고 불평등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자본주의의 진화와 사회주의의 가능성에 대해 오랫동안 깊이 성찰한 조지프 슘페터는 그 역설이 본질적으로 자본주의의 진화에서 필연적으로 나온 것이며, 그래서 자본주의에는 “자기 파괴의 경향(a tendancy toward self-destruction)”이 내재한다고 주장했다. ... 게다가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의 증가엔 또 하나의 강력한 힘이 작용한다. 바로 대중매체의 점증하는 영향력과 그것에 힘입은 민중주의의 득세다.

 

      복제가 쉽고 전파력이 큰 밈들을 살피면, 그것들은 모두 사람들의 직관에 맞는 것들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직관을 통해서 세상을 살피고 직관에 비추어 옳고 그름을 판별한다. 그래서 직관으로 이내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생각들이나 직관을 거스르는 생각들은 사람들의 뇌들에서 복제가 어렵고, 자연히 전파력이 약하다. 불행하게도, 직관은 세상의 움직임을 깊이 이해할 힘이 없다. 그래서 흔히 그르다. 사람의 뇌가 일상적 현상들에 대처하도록 진화한 기구이지 세상의 움직임을 총체적으로 깊이 파악하기 위해서 나온 기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직관에 의존하여 형성된 밈들은 거의 언제나 그르다. 천동설은 누구에게나 직관에 맞는 이론이지만, 지동설은 지금도 아주 어려운 지적 작업 뒤어야 받아들일 수 있다. 사회적 논점들 가운데, 이 점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보호주의와 자유무역주의의 대립에서다. ... 노동조합에 관한 생각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약한 노둥자들이 뭉쳐서 강한 자본가들에게 대항하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은 사람들의 직관에 맞는다. 그러나 노동조합이 노동자 전체의 복지를 늘릴 힘은 없고, 노동조합은 다만 약한 노동조합에 속하거나 노동조합의 보호를 아예 받지 못하는 노동자들로부터 강한 노동조합에 속한 노동자들에게도 소득을 이전하는 효과만 지녔고, 실제로는 노동조합이 누리는 노동 공급에서의 독점적 지위는 사회의 소득을 줄이고, 사회 전체의 일자리들이 고정되었다는 생각은 그러며, 노동자 전체의 복지를 궁극적으로 보장하는 것은 시장의 가격기구라는 사실을 설명하기는 어렵고 듣는 사람들이 그것을 이해하기는 더욱 어렵다.

 

      하이에크가 지적한 대로, 경쟁은 “발견절차”다. 시장 경제의 높은 효율은 바로 그런 발견에서 나온다. 그리고 정부는 경쟁에서 처진 사람들을 사회안전망을 통해서 돕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사회 전체는 최대한의 복지를 누리며, 불운하거나 가난한 사람들도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소득을 얻는다. 이러한 경제는, 비록 불완전하지만, 인류가 지금까지 생각해낸 경제 체제들 가운데에선 가장 낫다. ... 그러나 시장 경제는 대부분의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지 못한다. 실은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미워한다. ... 시장에 적대적인 이념을 그것의 추종자들에게 매력적이고 자명하게 만드는 것은 본질적으로 생물적 요인이다. 사람의 마음은 자신의 처지를 다른 사람들의 처지와 늘 비교하며, 자연히, 부러움으로 가득 찼다. 사람의 그러한 행태는 시장 경제에 호의적이 아니다. ... 개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사회의 전반적 복지가 아니라 자신들이 사회의 위계에서 차지하는 자리였다.

 

      대안 공동체에 대한 그렇게 비현실적인 호감과 기대 너머엔 문명에 대한 잘못된 시각이 자리잡고 있다. 문명과 야만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대체로 단순하고 상투적이다. 그래서 흔히 야만이라 불리는 상태가 실은 원시적 문명이며, 문명과 야만 사이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이라는 사실은 흔히 잊혀진다. 그래서 문명과 야만을 지나치게 대립시킨다. 그런 생각을 품은 사람들은 대체로 문명에 대해 지나치게 비판적이고 야만에 대해 비현실적인 호감을 보인다. 그들은 현대 사회가 지나치게 경쟁적이고 사람들을 비인간적으로 만들며, 반면에, 문명이 덜 발전했던 원시 사회나 고대 사회는 사람들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고 여긴다. 이것은 순수한 환상이다.

 

      경쟁은 누구에게나 힘들다. ... 사람들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를 두려워하고 배척하는 가장 큰 까닭이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치열한 경쟁이라는 사실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 그러면 자본주의와 시장 경제의 치열한 경쟁을 누그러뜨릴 길은 없는가? 불행하게도, 그런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근본적 까닭은 자본주의가 자연스러운 체계라는 사실이다. 자연이 바로 경쟁에, 실제로는 전혀 사정이 없는 싸움에, 바탕을 둔 체계이기 때문이다. ... 재산의 형성에 공헌한 사람들에게 소유권을 주는 것을 원칙으로 삼은 자본주의가 근본적으로 정의롭다는 사실과 바로 그 사실에서 자본주의의 효율성이 나온다는 사실은 늘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저자의 육성을 들어보고 싶다면 자유기업원 웹사이트에 그와의 대담이 게재되어 있다.

http://www.cfe.org/generic/mBoard/Board_Cont.aspx?b=BOARDmn2007104133914&run=&page=&searchtype=&searchstr=&ID=9083&mode2=&yesno=&tplco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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