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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posted Jul 2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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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2014 문학동네, 김연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쓴다. 쓸 뿐만 아니라, 글 쓰는 일로 먹고 산다. 그러면서 자기 직업이 ‘글 쓰는 일’이라는 사실을 모르거나, 무시하거나, 과소평가하거나, 일부러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핑계는 일단 겸손이다. 에이 제가 뭐, 문인도 아니고 기자도 아니고... 좀 더 깊이 생각해보면 진짜 이유는 게으름이다. 나는 ‘글의 프로페셔널’이 아니니까 개떡같이 써도 남이 찰떡같이 알아들어주면 그걸로 된다, 라는 쪽에 더 가깝다. 그 결과는 품질 낮은 글의 양산으로 이어진다.

한글전용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흔히들 그것이 우리 ‘민족문화’의 정수인 것처럼, 거기에 우리 공동체의 혼이 담겨 있는 것처럼 주장한다. 일단 ‘민족’이라는 것이 허구에 가깝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지만, 그건 또 긴 논증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니까 일단 넘어간다. 이런 주장이 지닌 더 큰 허점은 한글이 우리 공동체의 생활을 지배한 세월이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이다. 우리 말의 역사는 수천 년이 넘겠지만, 우리 글은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자들이 한글을 창제한 뒤로도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지성적인 내용을 담기에는 부족한 ‘언문’으로 멸시되었다. 그래서 한글로 의미 있는 지적 저작물들이 쌓인 기간은, 일반적인 말글의 시간감각으로 볼 때는 잠깐에 불과하다. 한글을 폄훼하려는 게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한글이 논리와 지성을 저장하고 전달할 수 있도록 잘 가꾸는 일이 흔히 생각하기보다 훨씬 더 중요한 과제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은 것이다.

아쉬운 사연으로, 아쉬운 시기에 직장을 그만둔 직장선배가 이 책을 내게 권해주었다. 뭐라고 이유를 딱 꼬집어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쉬는 동안 읽으면서 위안을 많이 받았다고 헀다. 그게 진심이 아니었다면 선배가 내게 굳이 이 책을 선물하기까지는 않았을 것이다. 읽어보고 나서 이해가 갔다. 그 이유는 나도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배와 내가 직장에서 해왔던 일도 근본적으로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분투였다는 사실이 떠올랐고, 그 일을 치열하게, 잘 해내기 위해 고민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소설가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은 소설도 아니고, 자기계발서도 아니다. 문학강좌라고 하기에도 좀 그렇고, 굳이 분류하자면 수필이라 해야겠다. 성석제를 연상시키는 그 문장의 발랄함이 즐겁고, 자기 일을 잘하기 위해 깊이 고민한 흔적은 그만큼 깊이 고민하거나 공부하지 않은 독자에게 유익한 지혜를 제공한다. 소설가다운 페이소스는 덤이다. 이태준의 <문장강화>, 안정효의 <영어 길들이기> 이후 이런 느낌은 오랜만이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한다. 경찰에게는 경찰의 방식이 있고, 어부에게는 어부의 방식이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재를 경험한다. 독자에게 과거란 어떤 책을 읽지 않은 상태를 뜻하고, 미래란 어떤 책을 읽은 상태를 뜻하겠지. 그렇다면 독자에게 현재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상태다. 다들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으면 우리는 독자인 셈이다. 그건 소설가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물론 과거에,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나는 어떤 소설도 쓰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의 나는 어떤 소설을 쓴 사람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현재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 상태를 뜻해야만 한다. 방금 '뜻해야만 한다'고 쓴 것에 주목하시길. 그건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상당히 많다는 걸 암시하는 서술어가 되겠다. 앞에서 말하지 않았던가. 말로 세운 계획, 마음만 먹는다고 다 이뤄진다는 나는 이미 세계를 정복했을 것이라고.” pp11-12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읽고 있으면, '지금 뭔가를 쓰고 있다는 그는 소설가'라는 그 문장의 질감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프루스트 씨는 그때 뭔가를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내용이 뭐든, 내가 이해하든 순식간에 잠에 빠져들든, 그는 뭔가를 썼고, 그의 시간은 11권의 책으로 남았다. 소설가의 일생이란 그런 것이다. 그 일생 앞에서는 다작이라는 말도 무의미하고, 수면용 소설이라는 말도 무의미하다. 그저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된다.” p12

“상점들이 즐비한 역전 제과점의 아들로 자랐기 때문에 나는 자영업자의 삶이 어떤 것인지 잘 안다. 그들에게는 일의 반대가 휴식이 아니라 손해다. 그래서 그들은 휴일에도, 심야에도 가게 문을 닫지 않는다. 일을 계속할 수 있다면 당분간 큰 문제는 생기지 않는, 그러니까 매일 일하는 삶이다.” p16

“여자 시인인 에드나 세인트 빈센트 밀레이는 ‘책을 출간하는 사람은 마음먹고 팬티를 내린 채 대중 앞에 나서는 것과 같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는데” p27-29

“작품과 작가는 동시에 쓰여진다. 작품이 완성되는 순간, 그 작가의 일부도 완성된다. 이 과정은 어떤 경우에도 무효화되지 않는다. 만약 국가가 한 작가의 작품을 모두 불태운다고 해도 그 작품을 쓰기 전으로 그를 되돌릴 수는 없다. 한 번이라도 공들여 작품을 완성해본 작가라면 그 어떤 비수에도 맞설 수 있는 힘의 원천을 안다.” p28

“릴케의 말이 맴돌았다. ‘글을 쓰지 않고도 살 수 있을 거라 믿는다면, 글을 쓰지 마라’” p29

“아일랜드 작가 브랜던 비언이 한 말이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길. 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비평가들이란 하렘의 환관과 같다. 매일 밤 그곳에 있으면서 매일 밤 그 짓을 지켜본다. 매일 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 자신은 그걸 할 수가 없다.’” p31

(캐릭터 +욕망) /방해물 = 이야기
(보고 듣고 느끼는 사람 + 그에게 없는 것) / 세상의 갖은 방해 = 생고생(하는 이야기)

“가지지 못한 것들이 우리를 밀고 가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낸다는 이 사실을 이해하면서부터 나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더 많이 원하자고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도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고 마음먹었다. 왜 안 되겠는가? 어쨌든 결말은 해피엔딩이 아니면 새드엔딩이다. 원하는 걸 가지거나, 가지지 못하거나. 그게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엔딩이 찾아오면 이야기는 완성된다. 이야기는 등장인물이 원하는 걸 얻는지 얻지 않는지에 대해선 신경을 쓰지 않는다. 인생 역시 이야기라면 마찬가지리라. 이 인생은 나의 성공과 실패에는 관심이 없다. 대신에 얼마나 대단한 걸 원했는가, 그래서 얼마만큼 자신의 삶을 생생하게 느꼈으며 또 무엇을 배웠는가, 그래서 거기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겼는다, 다만 그런 질문만이 중요할 것이다.” p41

“생고생(하는 이야기)은 그 사람이 누구이며, 무엇을 사랑하는지 말해준다는 걸 문학이론에서는 '성격적 결함'이라는 용어로 부른다. <햄릿>은 한 남자의 '성격적 결함'이 그를 어떤 생고생으로 밀어넣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 성격적 결함은 양가적이다. 만약 면접을 보로 온 햄릿에게 면접관이 일 분 동안 자신의 장점에 대해서 말해보라고 한다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어떤 일이 생겼을 때, 무척 신중하게 접근하는 게 저의 장점입니다.’ 대개 장점과 단점은 같은 말이다.” p46

“어떤 사람을 둘러싼 세계에서 원인과 결과의 연결고리를 제거하면 그는 무기력해진다.” p52-53

“백스토리와 디테일을 갖추면, 그 어떤 인물도 악한이 될 수 없다.” p60

“가만히 놔두면 안 좋게 변하는 건 운명이나 팔자 탓이 아니라 이 세상이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과학에서는 이걸 '엔트로피의 법칙'이라고 말한다. 가만히 놔두면 내 책상은 지저분해지고, 수염은 제멋대로 자라고, 바닥에는 지우갯가루가 흩어져 있게 되는데, 이건 우리가 사는 우주가 그런 곳이기 때문이다. 이 우주에 인생이 풀리지 않는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까닭도 이 때문이다. 어딘가에는 가만히 놔두면 시간이 갈수록 방이 점점 깨끗해지는 우주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 생은 글렀다. 그런 우주로 가려면 지금의 나는 죽은 뒤 또다른 나로 다시 태어나는 수밖에 없다. 목숨이 아깝다면,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이 우주를 생긴 그대로 받아들여야만 한다.” p74

“소설과 비소설의 차이는 이 핍진성에 있다. 비소설에서 진실이란 실제로 벌어진 일을 뜻하지만, 소설에서 진실이란 반박할 부분이 한 곳도 없는 완벽한 이야기를 뜻한다. 물론 소설을 써보면 알겠지만, 반박할 부분이 한 곳도 없는 이야기를 쓰고 나면 실제로 그런 일이 현실에서 벌어졌거나 나중에 벌어지는 걸 확인할 때가 있다. 서설 쓰다가 신 내린 게 아니라 핍진성 있게 쓴다는 말이 워낙 그런 뜻이기 때문이다.” p81

“사람들은 악이 선만큼이나 대단한 것처럼 여기지만, 사실 악은 선의 결여일 뿐이다. 선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행위가 바로 악행이다. 선을 행하기 위해서는 아주 기나긴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을 알아내기 위해서 한나 아렌트 같은 철학자들이 몇천 년에 걸쳐서 연구했지만, 여전히 선을 행하는 건 힘들다. 하지만 악을 행하는 논리는 너무나 빈약하거나 없다. 그저 선을 행하지 못하는 자들의 행위라고 말하면 충분하다. 악행의 근거로 한나 아렌트처럼 정교한 철학서를 쓴 위대한 악인을 나는 본 적이 없다. 왜냐하면 악인은 너무나 하찮은 존재라 그렇게 정교한 논리를 펼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생략) 악을 저지르고도 자신이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모르는 자들은 다른 사람들도 모두 자신처럼 생각한다고 여긴다. 그래서 감옥에 갇혀 있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을 불쌍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이코패스의 피해자 코스프레는 그래서 벌어진다. 나와 남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몰라 타자의 관점에서 사유할 수 엇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우리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사이코패스의 관점에서도 사유하려고 한다.” p157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들 뿐이다'라는 건 니체의 말이지만”

“쓴다. 토가 나와도 계속 쓴다.” p200

“다른 글은 모르겠으나 소설의 경우에는 아는 게 많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문장을 잘 쓰기란 여간 어렵지 않다. 왜냐하면 소설을 쓸 때는 무엇을 아는지 아는 것보다 무엇을 모르는지 아는 게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p203

“한국어 문장에서는 제일 먼저 서술어 부분을 손본다는 말을 하기 위해 너무나 멀리 돌아왔다. 한국어는 서술어 부분을 다양하게 변화시키는 게 특징인 말이다. 예를 들어 '나는 술을 마신다'라고 할 때, '나는'과 '술을'은 크게 바뀌지 않지만(예컨대 개껏해야 '본인은'과 '필자는', '참이슬을'과 '글렌피딕 12년산을'등으로), '마신다' 부분은 다양하게 바꿀 수 있다. 마셨다, 마실 것이다, 마시고 싶다, 마셨으면 한다, 마시는 것이다, 마시는 것이 아닌 것이다, 마셔주었으면 하고 바라 마지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등등등. 그 리스트는 끝도 없다. 이건 교착어의 특성인데, 너는 누구의 편이냐고 묻는 전짓불 앞에서는 참으로 유용한 특성이기도 하다. 담임선생님이 여고생에게 묻는다. "너 요즘 행복하니?" 그럼 여고생이 대답한다. "행복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요." 이건 무슨 뜻일까? 행복하다는 뜻일까? 이 문장에서 동사는 '하다'인 것 같지만 이건 가짜 동사다. 진짜 동사는 명사처럼 들어간 '생각'이다. 그러니까 여고생이 하는 건 '생각하다'다. 하지만 이것도 질문의 정확한 대답은 아니다. '같다고 생각한다'가 더 옳을 테니까 이 부분을 '추측한다'로 바꿔보자. 그럼 하고 싶은 말은 '행복하다고 추측한다'가 될까? 이것 역시 답은 아니다. '가끔 행복하다'고 말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어쩌면 더 정확한 대답은 '전혀 행복하지 않아요'일지도. 이쯤이면 여고생의 저 대답은 그저 선생님이 물어보기에 예의상 답하는 척하지만, 사실을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말이다. 한국어는 이런 문장을 만드는 데 유용하다. 뒤집어서 말하면, 정확한 문장을 쓰기 위해서는 한국어의 이런 특성을 최대한 줄여야만 한다. 그래서 문장을 손볼 때는 서술어 부분을 최대한 줄이는 일부터 시작한다. 제일 먼저 명사처럼 쓴 동사를 정리한다. 예를 들면 '하다'를 독립적으로 쓰지 않는 식이다. 대개 문장에서는 위의 '생각을 하다'처럼 쓰여지는데, 결국 이때 우리는 '하는' 게 아니라 '생각한다'. '~을 하다'는 모두 '~하다'고 바꾼다. '것'도 마찬가지다. '나는 그녀에게 선물을 했던 것이다'라는 문장에는 서술어 부분이 명사처럼 보이는 게 '선물'과 '것' 두 개나 있다. '선물'이 진짜 동사고 '하다'는 가짜다. 당연히 이 문장은 '나는 그녀에게 선물했다'로 줄여 진짜 동사를 드러내야 한다. 가능하면 동사(혹은 형용사)와 시제만 남게 서술어 부분을 단순하게 만든다. '선물하였다'도, '선물해봤다"도, '선물해줬다'도 모두 '선물했다'로 줄인다는 뜻이다.” pp209-210

“소설의 문장에는 묘사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도 들어간다. 내가 열일곱 살 소녀를 주인공으로 서설을 쓴다고 치자. 소설을 쓰겠다고 책상 앞에 안자봐야 당연히 나는 한 줄도 못 쓴다. 일단 그 소녀의 삶에 대한 감각적인 디테일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친구와 제일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일까? 모르겠다. 열일곱 살 소녀는 붉게 물든 단풍나무를 보며 이떤 일들을 떠올릴까? 모르겠다. 솔직히 붉게 물든 단풍나무에 관심이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이런저런 취재를 거쳐 디테일을 알아낸다고 해도 문장은 쉽게 안 나온다. 십대 소녀들은 감상적이기만 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내가 가졌다면, 디테일을 알아냈다고 해도 아직 잘 모르는 셈이니까. 이 시점에 이르면 빨리 쓴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건 자기도 잘 모르는 것을 쓴다는 의미니까 오해나 선입견을 피할 수 없다. 오해야 선입견으로 점철된 글을 읽고 싶은 독자가 어디 있을까? 제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라도 첫 문장부터 동의할 수 없다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기가 어렵다.” p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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