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식의 품격

posted Sep 24,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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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식의 품격 - 맛의 원리와 개념으로 쓰는 본격 한식 비평

이용재, 반비, 2017

 

갑자기 나타났다. 허공에서 뚝 떨어지듯. 이용재라는 한식 비평가.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건축가 출신 작가다. 500페이지가 넘는 그의 저서 <한식의 품격>을 집어들었을 때 큰 기대는 없었다. 한식을 뚜렷이 정의하기 어려운 이유가 과연 뭔지 닥치는 대로 단서를 얻고 싶은 정도의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여기저기서 접해본 한식에 관한 글은 대략 세 부류 중 하나였다. 본인의 글솜씨를 신뢰하는 ‘셰프’가 음식 자체보다는 음식이 놓인 사회적 맥락에 관해서 쓰는 글. 제시되지 않는 근거와 따라가기 어려운 논리를 동원해 한식의 우수성을 동어반복적으로 논한 글. 재치있거나 감성에 치우친 표현으로 1인칭 시점의 식사 경험을 묘사하며 한식을 추켜세우거나 냉소하는 글.

 

요리사 박찬일은 <한식의 품격> 글머리의 추천사에 이용재가 “익숙한 화법과 주례사 같은 칭송을 버리고 음식과 식당이 비평의 대상이라는 걸 입증했다”고 적었다. 이용재 자신은 신문사와의 인터뷰에서 “맛을 빼놓고 하는 한식 담론이 싫어 '밥상'을 뒤엎는 것”이라고 했다. 그의 글이 얼마나 도발적이냐를 논하기에 앞서, 그가 글을 통해 뜻을 전달하는 일에 능하다는 점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좀 거칠게 말해, 그는 자기가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를 안다. 음식에 관해 쓰는 다수의 저자들은 그것을 모르거나, 아니면 마치 알지 못하는 것처럼 글을 쓴다. 그래서 그가 돋보인다. 책을 조금만 읽어보아도, 왜 요즘 여러 신문에 그의 컬럼이 보이는지 이해할 수 있다. 다소 치기 어린 비유들 틈바구니에서도 치열한 그의 용어 선택은 빛을 발한다.

 

한식의 정체성과 독자성, 그리고 그 장래에 관해 애정과 염려를 지닌 사람이라면 반드시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이다. 관심과 애정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걸 갖기 위해 읽어야 할 책이다. 특히, “검증된 서양 문법을 적극 차용해, 재료의 특성이나 맛의 개념을 바탕으로 재료를 치환할” 것을 제안하는 그의 일관된 주장은 멋지고, 또 값지다. 원리와 개념으로 접근할 때, 한식은 비로소 발전적 진화를 경험할 것이라는 데 강하게 동의한다.

 

흠이 없지는 않다. 싸움을 불사하겠다는 각오가 앞선 탓일까. 부정적 평가가 객관성을 넘어서는 지점들이 보인다. 문체 탓일지도 모른다. 좀처럼 50자를 넘지 않는 단문들로 이어진 그의 글은 속도감이 크다. 이렇게 내달리는 문장은 주관적인 평가도 단언하는 어투로 맺곤 한다.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이라도 말은 이보다 훨씬 더 느리고 조심스러울 수도 있지 않을까. 스타일만 놓고 보면 스타카토가 많은 그의 문체는 설명과 논리로 돌파하는 두터운 책보다는 신문 컬럼에 더 잘 어울리는 것처럼 보인다. 문장을 정성껏 매만진 티가 역력함에도 그의 글이, 그가 비판하는 한식의 세태처럼 여유롭고 다채로운 맛의 표정(flavor profile)을 보여주지 못하는 점은 조금 아쉽다. 글을 자주 쓰는 작가니 발전도 빠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