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posted Jul 02,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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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 Roger Joseph Zelazny, 2006, 김상훈 역, 열린 책들

 

    종류를 불문하고, 소설을 읽는 행위는 작가가 창조한 가상세계에 자발적으로 참여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새뮤얼 콜러리지가 “불신의 자발적 중지(willing suspension of disbelief)”라고 불렀던 행위다. 그로써 우리는 타인의 시각을 덧쓰고 인식의 감옥(cognitive prison)을 탈옥하는 체험을 한다. 특정 작가의 작품세계에 지나치게 경도되지 않고 폭넓은 독서를 하는 일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소설을 포함한 픽션 문학의 기능은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으나, 가상세계를 자발적으로 경험함으로써 개념적 돌파(conceptual breakthrough)의 희열을 맛보게 해 준다는 점에서 과학소설을 능가할 장르는 없다.

 

    개념적 돌파는 과학소설의 전유물은 아니지만, 적어도 그 주특기다. 과학소설 독서는 가까운 미래 또는 먼 미래에 대한 작가의 전망에 동참하는 독특한 경험이기 때문이다. 많은 과학소설들이 출간되어 있지만, 단일 작가의 단편집을 모아놓은 과학소설 중 로저 젤라즈니의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만큼 매력적인 책은 흔치 않다. 이 책은 미국에서 출간된 <The Doors of His Face, The Lamp of His Mouth>의 번역판에 (아마도 역자가 좋아하는 듯한) 젤라즈니의 80년대 단편 두 편이 추가되어 있는데, 나머지 단편들은 대부분 젤라즈니가 60년대에 쓴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거의 50년전에 쓰여진 미래주의적 작품들이 아직도 빛을 바래지 않고 있는 점은 놀랍다.

 

    로저 젤라즈니(1937-1995)는 60년대부터 작품활동을 시작하여 독특한 문학성으로 과학소설계에 큰 족적을 남긴 작가다. 그는 심리학 전공으로 대학생활을 시작했으나 핀리 포스터 시인상 수상을 계기로 영문학으로 진로를 바꿔 셰익스피어, 휘트먼, 만, 릴케 및 프랑스의 상징파 시인들의 시세계에 몰두한 시인이기도 했다. 컬럼비아대학에서 연극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은 그는 1962년 처녀작 <수난극(The Passion Play)>을 통해 평단, 문단, 독자들로부터 찬사를 받았고, 그 후로 신화와 환상과 과학을 결합한 지적인 작품들을 저술해 왔다. 시적이고 아름다운 줄거리, 반어적 상징, 강렬한 신화적 상상력이 그의 작품의 특징을 이룬다. 그의 대표작으로는 <앰버 연대기(The Chronicles of Amber)>가 가장 유명하다.

 

    여기 소개하는 책 <전도서의 장미> 속에 포함된 단편들의 제목은 다음과 같다.

 

12월의 열쇠 (The Keys to December)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 (The Doors of His Face, The Lamps of His Mouth)

악마차 (Devil Car)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 (A Rose for Ecclesiastes)

괴물과 처녀 (The Monster and the Maiden)

이 죽음의 산에서 (This Mortal Mountain)

수집열 (Collector's Fever)

완만한 대왕들 (The Great Slow Kings)

폭풍의 이 순간 (This Moment of the Storm)

특별 전시품 (A Museum Piece)

성스러운 광기 (Divine Madness)

코리다 (Corrida)

사랑은 허수 (Love Is An Imaginary Number)

화이올리를 사랑한 남자 (The Man Who Loved the Faioli)

루시퍼 (Lucifer)

프로스트와 베타 (For a Breath I Tarry)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 (The Last Defender of Camelot)

            

    이 단편들에서는 놀라운 상상력, 인간의 본질에 관한 통찰, 신화적 은유들이 유려한 문체 속에 넘쳐흐른다. 예컨대, 본래 이 단편집 속에 포함되었던 작품은 아니지만 <프로스트와 베타>를 읽고 인간정신의 진화과정과 그 윤회에 대해 복잡한 상념에 빠지지 않을 사람은 없을 터이다.

 

    원서의 타이틀이었던 단편 <그 얼굴의 문, 그 입의 등잔>은, 로버트 하인라인의 <지구의 푸른 산(The Green Hills of Earth)>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단편으로 꼽고 싶다. 고독한 남자와 금성의 바다에 서식하는 거대한 어룡 사이의 사투를 그리고 있다. 과학소설들 중에 이만한 격조를 갖춘 작품이 일찍이 있었던가? 낚시든 사냥이든 산 짐승을 오래 쫒다 보면, 사냥감을 포획하겠노라는 목표는 자기 자신을 낚느냐 놓치느냐의 기로가 되어버리는 법. 허먼 멜빌이 프랭크 허버트를 만난 것 같은 이 멋진 단편은 원서의 첫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었는데, 번역본의 목차에서 두 번째로 밀려난 것을 나로선 선선히 수긍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하지만 굳이 <전도서에 바치는 장미>를 책의 제목으로 뽑아낸 역자의 (또는 출판사의) 기호에 대해서는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냉소적인 천재 학자가 화성인들의 승락을 얻어 화성문명을 연구하고, 그들의 비밀을 발견하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그 사랑이 허상임을 깨닫게 되는 이 단편은 신화와 문명, 사랑과 허무 등 독특한 소재와 테마를 담고 있는데, 그 독특함은 젤라즈니의 특징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젤라즈니는 과학소설을 주류문학으로 이끈 몇몇 작가들 중의 한 명으로 꼽힌다. 그의 작품에서는 프랑스 및 영국의 시와 전 세계의 다양한 신화들로부터 그가 받은 영향이 진하게 묻어난다. 첫눈에도, 그의 단편들이 시인의 창작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젤라즈니의 단편들을 찬찬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과학소설이 지향해야 할 덕목들이 대부분 담겨져 있다. 무엇보다도, 과학소설은 - 앞서 말했듯이 - 독자들의 ‘자발적 불신의 중단’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격조를 갖추어야 한다. 그 품격은 우아한 플롯, 좋은 문장, 미래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다. 젤라즈니의 전집(가칭 The Complete Works of Roger Zelazny)이 조만간 출간될 채비를 갖추고 있다고 하니 군침을 흘리며 기다려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