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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 예술기행

posted Jul 0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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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hyun.jpg

 

 

김현 예술기행

- 1977, 김현, 열화당

 

    많고 많은 여행기 중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으로 각인된 한 권을 고르라면 문학평론가 김현의 <김현 예술기행>을 집어 들겠다. “인간은 자기가 豫見한 것만을 본다”는 이 책의 첫 문장은 얼마나 많은 내 여행에서 길잡이가 되어 주었던가!

 

    “1974년 10월 2일 박옥줄 교수를 모시고 김포 공항을 떠나면서 나는 내 의식에 아무런 제동도 가하지 않고 내 눈이 보는 것을 그대로 수락하겠다고 서너번 속으로 다짐을 하였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무엇이든지 다 내가 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실제로 김포를 떠나자마자 나는 내가 모든 것을 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하나의 意識의 장난이었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래서 내가 예건한 것만을 보기로 마음을 다시 잡았다. 그런 의미에서 홍콩은 나에게 아무런 것도 보여주지 않았다.”

 

    김현(1942∼1990)은 서울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던 문학비평가였다. 그의 비평은 독특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체로 우리 문학의 새로운 넓이와 깊이를 창출해내었다고 평가받는다. <존재와 언어>, <반고비 나그네 길에>, <행복한 책읽기>, <문학 단평 모음>, <현대 프랑스 문학을 찾아서> 등 김현의 주옥같은 평론들은 그의 작고 후 16권의 전집으로 출간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글들 중에서 자신의 생각의 지도를 가장 잘 드러내는 글은 이 책은 30대 초반의 청년 김현이 유럽을 여행하면서 기록해둔 여행기 <김현 예술기행>이 아닐까 한다. 여행기는 일종의 일기글이므로, 저자가 풍물에 대해서 독자들에게 전달하는 것 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저자 자신의 마음의 풍경과 생각의 지도에 관해서도 많은 정보를 드러내는 글이기 때문이다.

 

    좋은 여행기들은 우리에게 여행중에 무엇을 볼 것인지를 예시를 통해 가르쳐주는 교과서에 해당한다. 우리가 더 많은 것들을 “豫見”할 수 있게끔 만들어주는 것이다! 삶 자체가 하나의 긴 여정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잘 쓰여진 여행기를 읽거나 스스로 여행기를 써보는 경험은 언뜻 생각하는 것보다 값어치가 큰 일이다. 간명한 문장으로 문학과 예술과 삶에 대한 사유의 숙성과정을 기록해둔 김현의 여행기는 예술에 대한 사랑을 가슴에 품은 모든 방랑객들의 참고서라 할 만 하다. 아마도 젊음에서 오는 패기 덕분이었겠지만, 그의 예술관은 현학적(pedantic)이거나 시건방지게 가르치려(patronizing)들지 않는다. 조금 일부러 멋을 부린 듯한 그의 문장은 적당히 시적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무지를 고백하는 데 주저가 없는 그의 지적 용기는 산뜻하다.

 

    “아마추어는 감상하지 않는다. 그는 그냥 달려든다. 마드리드의 뮤제오 델 프라도에서 나는 대뜸 고야와 루벤스에게 달려들었다. 아마추어는 한 폭의 그림을 그 자체로서 보고, 감상하고 비판할 줄 모른다. 그래서 달려드는 것이다. 나 역시 뮤제오 델 프라도의 모든 그림을 감상할 만한 안목을 갖지 못했으므로 류벤스와 고야만을 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고야에게 완전히 감동했다.”

 

    “나는 점점 이 구라파의 한 복판에서 만화가 주는 압력을, 그것을 단순하게 유치한 것으로 생각하는 나의 사고 자체가 사실은 유치한 것이 아니냐는 압력을 받게 되었다. ... 나를 더욱 당황하게 만든 것은, 아니 등골에 식은 땀이 흐르게 한 것은, 그가 때때로 무척 재미있다면서 내게 보여준 그 신문들에 실린 그림들이나 글들을, 거의 15,6년간이나 프랑스어를 배워 온 내가 문자 그대로 거의 한 문장도 이해해 낼 수 없었던 사실이었다.”

 

    부연하자면, 이 책은 외국에 나가면 조국에 대한 콤플렉스와 싸워야 했던 우리 아버지 또래의 여행기다. 올림픽도 월드컵도 없고, 삼성 핸드폰도 LG 냉장고도 없던 30년 전, 한국인은 외국에 나가려면 부끄러운 자의식과 밑도 끝도 없는 싸움을 했어야만 했다. 요즘 아이들이라면 이런 거추장스러운 짐을 견딜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의 나에게 역마살을 처음 불어넣어 주었던 또 다른 여행기 이어령 선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에서도 그런 싸움이 행간을 점철하고 있었다. 우리의 30년 전은 김현 같은 세련되고 정치한 평론가조차 드러내 놓고 콤플렉스라는 말을 쓰던 시절이었다. 이 책에서 유럽 부르조와들의 문화병에 모멸감을 드러내던 김현의 시선은 아마도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자의식의 발현이었을 터이다.

 

    “나는 방콕을 떠나는 비행기 속에서, 한국을 떠나면서 머리 속에 가지고 온 반만년 배달 민족이니, 우수한 재능을 가진 민족이니 하는 따위의 말들을 지워 버리기로 작정하였다. 그렇게 하니까 비행기 속에서 갑자기 한국이 견딜 수 없이 작은 나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고, 그 작은 나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이 내 몸 속에서 솟아 나오는 것을 느꼈다. 콤플렉스란 그것을 승화시키지 못할 때 부정적 힘으로 변한다. 그러나 그것이 승화될 때 그것은 한없는 창조력의 근원을 이룬다.”

 

    “(자코메디)의 오랜 깎아내기와 지우기가 그것 자체로서가 아니라 30cm, 혹은 2m의 물체가 되어서 몇 평 되지 않은 방에 갇혀 있는 것이다. 마치 이제는 더 깎아 내고 지울 필요가 없다는 듯이. 그의 조각을 보고서야 나는 현대 미술관 속에 갇혀 있는 루오, 다다이스트, 달리의 그림들이 왜 그렇게 침울해 있었는가 하는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상투적인 세계 인식과 인간 이해에 저항한 예술가들의 작품이 그들의 의사와 관계 없이 기구화되고 제도화되어 버렸다는 사실처럼 그 사회에 저항한 예술가들에게 행하는 잔인한 복수가 없는 것처럼 나에게는 인식된 것이다. 저항하는 예술가에게 복수하는 길은 그들을 인정하고 그들의 능력을 기구화시켜 버리는 길이다. 나는 그때 투철하게 미셸 푸코가 프랑스의 브르조아지들처럼 영리한 계층은 없다고 말한 발언의 배후를 읽어 낼 수가 있었다. 자코메디를 정말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조각이 전시되어 있는 미술관에를 가지 않아야 되는 것이 아닌가. 현대 미술관을 나오면서 나는 속으로 그렇게 자문하였다.”

 

    “예술 작품은 우리가 흔히 보는 것을 우리가 정말로 보지 못했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던 뽈 발레리의 말처럼, 우리는 저자가 여행을 통해 예술과 문학의 현장을 방문하고 작품을 감상하는 과정에서 그가 삶 속에서 예전에 가지지 못했던 새로운 각성을 갖게 되는 과정을 그와 더불어 체험한다. 김현의 경우, 그 체험은 평론가로서 자신에게 있어서 글쓰기는 안팎의 일관성을 갖춘 행위가 되어야만 한다는 깨달음을 포함하는 것이었다.

 

    “프락시스와 결부되지 않은 테오리아에 대해서 나는 오랫동안 콤플렉스를 가져 왔다. 그러나 요즈음 나는 프락시스와 결부되지 않은 테오리아란 이론의 제스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했다. 프락시스가 따로 테오리아와 떨어져 존재한다고 믿으면서, 테오리아에 매달리거나, 프락시스에 매달린다는 것은 허위에 지나지 않는다. 글쓰기 자체가 테오리아이며 프락시스라는 것을 왜 몰랐던가. 자신을 완전히 던지는 행위야말로 프락시스이며 동시에 테오리아이다. 안중근의 권총 사용은 한용운의 펜이나 김교신의 잡지와 마찬가지로 이론이며, 실제인 것이다.”

 

    어쩌면 나 또한 김현의 여행기 속을 여행하면서 내가 ‘예견했던 것만을’ 볼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이 책에서 나의 마음을 가장 친근하게 잡아당기던 대목은 그가 미술에 대해서 피력한 아마추어적인 태도였으며, 그것은 내 생각과 같기도 했다는 점이 그 한 증거다.

 

    “현대 소설은 스탕달에서, 현대시는 보들레르에서, 그리고 현대 음악은 드뷔시에서 끝이 났다는 예술 비평가들의 말이 맞다면 미술은 세잔에서 끝이 났고 그 이후의 모든 작업은 模作의 과정, 다시 말해서 제작하는 사람의 즐거움과 고통의 과정을 더러내는 것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제작의 즐거움을 끝까지 밀고나간 것 같은 피카소는 나에게 되풀이해서 묻고 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이며 그것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젊은 평론가가 진지하게 살았던 삶의 밀도를 독자에게 전해준다. 아름답고 지성적인 문장을 통해 그 빼곡하고 치열한 삶의 밀도를 감상하는 체험은 누구에게나 쾌감을 줄 것이다. 원래 출간되었던 열화당 미술문고는 이제 절판이 되었기 때문에, <김현 예술기행>은 이제 그의 전집을 통해 만나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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