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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효의 영어 길들이기(번역편, 영작편, 영역편)

posted Mar 2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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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길들이기(번역편, 영작편, 영역편)

- 1998, 안정효, 현암사

 

    유난히도 영어에 대한 언어장벽이 높은 우리 사회에서 영어는 커다란 숙제거리에 해당된다. 외기러기 가족의 그칠 줄 모르는 증가추세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문제가 되고 있고, 새로 들어선 정권의 인수위원회가 발표한 구상들중 가장 큰 논란을 불러왔던 부분도 영어교육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하지만 막상 영어에 관한 주의주장과 서적들은 너무 많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도움이 되는 교재나 지침서를 찾는 일은 결코 수월치 않다. 새 정부의 인수위원장이 손수 브리핑했다는 ‘어륀쥐(orange)’식 표기법은 하나의 자조적인 상징성을 띄는 일화로 상당기간 회자되었는데, 세간에는 ‘어륀쥐’식 발상을 크게 넘지 못하는 내용들을 담고 있는 교재들이 많은 것이 실상이다.

 

    영어공부와 관련하여 나의 눈을 밝혀 준 책을 두 권 꼽고 싶다. 그 하나는 복거일의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라는 소책자다. 영어와 국어와의 관계를 국제어 대 민족어라는 각도로 바라보면 전에 미처 눈에 띄지 않던 쟁점들을 조망할 수 있다. 인식의 전환을 체험하는 일이 공부의 진정한 요체라면, 이 책은 어떤 문법서적보다도 나의 영어공부에 큰 가르침을 주었던 셈이다.

 

    좀 더 실용적인 도움을 크게 입었던 책은 소설가/번역가 안정효의 <영어 길들이기>, 그 중에서도 특히 번역편과 영작편 두 권이다. 영자신문의 기자로, 번역가로, 또 영어소설가로 오랜 기간 활동한 저자는 자신의 체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를 아낌없이 나눠준다. 번역은 어려운 일이며, 또한 필수적인 일이기도 하다. 번역의 품질이 중요한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완벽히 정확한’ 번역이란 불가능하다는 데 있다. 번역가 안정효는 가히 결벽이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의 세심함을 가지고 번역과 영작이라는 지적 작업과정에 임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저자의 그런 자세를 목격하게 되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를 하는 셈이라고, 나는 믿는다.

 

    책 속의 몇 군데 내가 밑줄을 그어둔 대목들을 발췌해 본다:

 

    아주머니, 이모, 고모, 숙모, 작은어머니 등이 모두 영어로는 ‘aunt’ 한 단어로 표현된다. 따라서 앞뒤의 문맥을 살펴보고, 때로는 소설 전체를 다 뒤져서라도 이모인지 고모인지, 아니면 통 밝혀낼 수가 없어 그냥 아주머니라고 해야 할지를 번역가는 알아내야 할 의무가 있다.

 

    심리적 조건반사를 피하라 - 성실한 번역가는 “Who's crying?”이 “우는 사람이 누구냐?”인지, 아니면 “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인지를 억양을 듣지 않고서도 가려내야 한다.

 

    단어 하나를 소홀히 함으로써 하나의 문장이 힘을 잃고, 문장 하나가 힘을 잃으면 한 페이지에 달하는 상황 설명 전체가 난삽해지고, 이런 도미노 현상에 결국 작품 전체가 무너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문학 작품 한 권에 담긴 무수한 하나의 단어를 앞에 놓으면 인간을 병들어 죽게 만드는 병균 한 마리의 크기를 생각하자.

 

    작가 특유의 문체까지도 가능한 한 가깝게 옮겨 놓으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번역은 제2의 창작이니까.”라는 지극히 편리한 이유를 내세워 원작자의 문체나 표현방법을 무시하면서까지 번역자 자신의 창작품을 독자에게 전달하려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역자의 본분을 어기는 행위일 것이다. 번역은 ‘제2’도 아니요 ‘창작’도 아니며, ‘고도로 정밀하게 발달한 기술’이어야 한다.... 별로 신통치 않은 원작을 걸작으로 변형시켜 놓았다면 그것 역시 오역이요 훼손이기 때문이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단어가 나오면 한자식 표현을 쓰고, 앵글로 색슨계 단어는 순수한 우리 토속어로 바꿔 놓는 방법 역시 작품의 문체를 전달하는 데 큰 도움이 되며, 그렇게 신경을 써서 선정한 어휘는 그것이 담긴 문장 전체의 지적인 수준 등을 전달하는 데도 대단히 효과적이다.

 

    “우리 여선생 멋있어”를 영어로 번역하려면 “Our teacher has 멋”이라는 문장을 만들어 놓고 ‘멋=?’ 공식에서 ‘?’가 무엇일지를 알아내려고만 매달릴 일이 아니라, 같은 상황에서 쓰이는 갖가지 영어 표현을 고정관념이 제거된 시각에서 둘러봐야 한다.

 

    번역에서 의역과 직역을 따진다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는 것이 오래 전부터 내가 가져온 생각이다. 번역을 구태여 구분하자면 ‘좋은 번역’과 ‘나쁜 번역’이 있을 따름이다.

 

    원문과 번역문에서는 쉼표의 개수가 똑같아야 한다고 고집하던 나로서는 편집부에서 마음대로 쉼표 하나를 빼거나 더 넣는 침해 행위를 결코 용납하지 않았고.... 장단을 맞춤으로써 얻어지는 문장의 리듬, 독자의 호흡을 통제하는 구두점, 그리고 상황과 등장 인물을 선명하게 반영하는 어휘에 대한 배려까지 신경을 쓴다면 문체의 번역을 통한 작품 전체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충실한 전달이 가능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형용사절이나 부사절, 때로는 짤막한 구나 삽입된 문장이 핵심을 이루는 주문의 앞이나 뒤나 중간에서 마구 튀어나올 때, 어느 부분을 우리말 문장에서 앞에 내놓고 어떤 부분은 뒤로 내보내는 것이 좋을까? 이럴 때면 나는 절이나 구나 삽입문을 가릴 것 없이 가능한 한 본디 영어 문장에서 시각적으로 나타나는 순서 그대로 옮기는 방법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순서에 따라 다른 개념이 차례로 가시화(visualization) 작용을 일으킨다고 믿기 때문이다.(논리를 중시하는 인문과학 또는 사회과학 서적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안 되면 뒤집어라 - ... 헤밍스가 모델에게 “졸지 마!”라고 소리치는 장면이 나온다. “Wake up!”이라는 짤막한 대사를 부정형으로 뒤집어 번역해 놓은 솜씨가 돋보이던 대목이었다.

 

    누군가 처음 써 놓은 글을 보면 ‘것’이라는 단어가 놀라울 정도로 빈번하게 나타난다.... 일단 한번 써 놓은 문장에을 꼼꼼히 읽어 가며 거기에서 수많은 ‘것’을 최대한 제거하고 ‘하고 있었다’라는 진행형을 ‘했다’로 모조리 고쳐 놓기만 해도 문장 전체가 훨씬 매끄럽고 산뜻해진다. 나는 번역을 끝내고 나면 항상 적어고 ‘것’과 ‘있었다’의 청소 과정만은 꼭 거치고는 했었다. (이상 ‘번역편’에서 발췌)

 

    ‘glare’가 ‘광채’ 이며 ‘빛’이라는 뜻을 지니기도 했다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사막에서 태양이 이글거리는 그런 광채이다.... 태양이 빛날 때는 ‘sunshine’이어도, 달이 빛날 때는 ‘moonshine’이 아니다.... 빛나는 별은 ‘twinkle’한다..... 어둠 속에서 사자나 호랑이 같은 야수의 눈이 빛날 때는 ‘glint’이고, 햇빛을 받아 ‘glitter’하는 황금도 어둠 속에서는 ‘glint’하며, 인간이나 생선의 눈에서 은근히 빛나는 광채라면 ‘lustre’이고, 새로 닦은 구두코에서 광채가 날 때는 ‘gloss’한다고 하며, 개똥벌레는 ‘glow’하고, 불빛을 받은 얼음이나 눈가로구 빛나면 ‘sparkle’이고, ‘lucidity’는 얼음이 빛나거나 정신이 맑다 못해 반짝거리는 상태를 의미한다.

 

    같은 안개가 걷히더라도 ‘mist’가 걷히는 것은 ‘lift’이지만 ‘fog’는 ‘burn off’한다고 표현한다. ‘evanesce’는 ‘은은히 또는 슬그머니 사라지다’라는 뜻이어서 양쪽 모두 사용해도 무방할 듯 싶다.... 우리는 세월 따라 달라지는 의미의 변화도 추적해야 한다. 민감한 신체적인 문제여서 ‘dwarf’나 ‘midget’을 가려 써야 하듯이 ‘노인’이라는 명칭도 ‘old man’에서 ‘senior citizen’으로 언제부터인가 격상되었으니까 산문체의 글이냐 아니면 연설문이냐 하는 내용에 따라 골라서 써야 한다.

 

    한영사전에는 "personal attack(criticism)"이라고 풀이해 놓은 ‘인신 공격’이 실제로는 ‘character assassination’이라는 기막힌 영어 표현으로 쓰인다는 사실도 알아 둬야 하고, 같은 새똥이라도 새끼가 눈 하얀 덩어리는 ‘bird dropping’이 아니라 ‘pallet’이라고 써야 한다는 상식도 갖춰야 하고.... ‘거미줄’이라는 영어 단어가 몇 가지이거나 간에 설악산 수렴동 계곡에서 나뭇가지에 걸려 아침 햇살을 받고 이슬 방울이 반짝이는 거미줄 만큼은 ‘gossamer’라는 단어로 표현활 만큼 어휘력을 넓혀야 하고, 지극히 한국적 공예품인 ‘문갑’에 어울리는 영어 단어가 없을 때는 프랑스어가 어원인 ‘papeterie’를 동원할 만한 융통성도 지녀야 한다.

 

    1백권의 영어 소설을 읽고 나서 한 권의 책을 영어로 써 보라. 영어의 세상은 분명히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나의 경우는 그랬다. 그리고 1백 권의 책을 읽어내기 전에는 영어를 ‘배웠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요즈음 영어 창작 지침서를 읽어 보면 ‘Write four-letter words.’라는 충고가 꼭 나온다.... 여기에서 얘기하는 ‘four-letter words’는 (욕설이라는) 그런 뜻이 아니다. 현대 창작법에서 선호하는 ‘four-letter words’는 죽어 없어졌거나 너무 낡아 생동감이 사라진 어렵고 장황한 고어가 아니라 ‘come’, ‘love’, ‘talk’, ‘walk’, ‘hail’, ‘jump’처럼 간결하고도 쉬운 어휘를 의미한다.

 

    우리의 옛 문학은... 정적인 면히 발달했다. 그것은 우리말의 형용사와 부사가 얼마나 잘 발달했는지를 살펴보면 쉽게 이해가 간다.... 반면에 영어는 공격적이고 적극적이다. 그것은 지극히 잘 발달된 동사에서 뚜렷하게 드러나는 면모이다.... 동사는 움직이는 품사이고, 움직이는 것이 눈에 잘 띄는 현상은 당연하다. 따라서 영어 글짓기에서는 동사의 역할을 잘 파악해야 한다.

 

    ‘shuffle’이라는 동사가 “다리를 질질 끌면서 걷는다”는 긴 표현을 단 한마디로 전달해 주기 때문이다. 이렇듯 영어의 동사는 “어떠어떠하게”라는 부사적인 표현을 아예 내포한 어휘가 많다. ‘걷다’라는 동사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저자가 예로 드는 동사는 amble, dogtrot, fret, goose-step, hobble, hop, hover, inch, loiter, march, meander, pace, pad, parade, plod, prance, promenade, prowl, ramble, reel, saunter, scour, serpentine, sidle, skulk, slink, slouch, slog, stagger, stalk, steal, stride, stroll, strut, swagger, thud, tiptoe, toddle, totter, tramp, tread, trot, trudge, waddle, wade, walk, wallop, wander, waltz, wobble 등 50개의 단어들이다.)

 

    be 동사는 ... 우리 나라 사람들이 글을 쓸 때 쓸데없이 자꾸만 반복하는 무의미한 진행형 ‘-있었다’와 마찬가지 역할을 해서, 문장의 탄력을 죽이고 지면을 낭비한다. 예를 들어 “I am a college student.”라는 문장을 보자.... “I go to college.”라고 하면... 훨씬 동적이다. 물론 모든 문장에서 be 동사를 모조리 없애라는 뜻으로 한 얘기는 아니다. ..... be 동사 또한 휴지(休止)의 역할을 맡아 양념 노릇을 해낸다.... have 동사 역시 움직일 줄을 모른다..... be와 have 동사는 연설이나 표어에서는 쓰임새가 클지 모르지만, 조금이라도 문학적인 양상을 띤 글에서는 아무래도 움직이는 동사가 훨씬 많은 가치를 지닌다.

 

    루돌프 플레시는 ..... 초고를 끝낸 다음 원고에서 ‘and’라는 단어만 모조리 잘라 내도 문장이 훨씬 좋아지리라고 충고한다.... ‘and’와 다른 접속사, 특히... 고색이 창연한 ‘접착제’ 단어는 가능한 한 사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문장이 어쩐지 연결이 끊어지는 듯한 시각적인 인상이 두렵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꾸만 여러 문장을 줄줄이 꿰어 놓으려 하고, 그래서 단절된 문장의 생동감만 오히려 희생된다.

 

    문장의 ‘가지치기(trimming)’은 필수적이다. 문장이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하려면 나무처럼 다듬어 줘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너무 주물러서 맛이 사라지고 빛깔이 바래게 해서는 안된다.

 

    보도(report)와 견해(opinion)는 완전히 성격이 다르다. 보도는 빛깔이 없는 안경이어서, 정보를 제공할 따름이지 분석하거나 해석해서는 안 된다. 기사를 쓸 때의 기자는 글에서 복선을 깔아서는 안 되고, 은근히 빗댄 비판도 하지 말아야 옳다. 기사에는 행간에 숨은 의미나 변수가 없어야 한다. 기사를 쓸 때의 기자는 투명해서 독자의 눈에 보이지 않아야 한다. (이상 ‘영작편’에서 발췌)

 

    개인적으로 나는 ‘영작편’보다는 ‘번역편’에서 큰 감명을 받았다. 다른 사람은 달리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참고로 안정효는 영어 소설 1백 편을 사전의 도움 없이 읽어낼 것을 권하면서 아래와 같은 책들을 권하고 있다. 이 자리가 어차피 책을 소개하는 곳이니, 안정효의 추천도서 100권의 목록을 아래 게시물에 첨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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