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어의 발견

posted Feb 07,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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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의 발견

- 1999, 이수태, 생각의 나무

 

    이 한 권의 책은 내 삶의 뿌리를 뒤흔들어 놓았다. 아마도 그 힘은 2천년을 건너뛰어 공자라는 인류의 스승이 건네는 가르침의 힘일 테지만, 나는 이수태의 <논어의 발견>이 아니었더라면 논어를 그렇게 만날 수는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90년대 말부터 서너 해 동안 논어에 관한 해석이 대중문화적 관심사로 떠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 방송과 잡지에 유행하던 논어해석은 과시적인 독선과 자극적인 언변에 힘입은 터여서, 어짊(仁)에 관한 가르침을 저런 식으로 전달하는 일이 유익한지 아니면 도리어 유해할 것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품위가 사라지고 없었다.

 

    <논어의 발견>이라는 책이 들려주는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다. 좋은 소식 먼저. 굴곡 많은 한국의 근현대사도 이 땅에서 선비의 씨를 말리는 데는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1998년 <한국가곡의 재인식 문제>로 제5회 객석 예술 평론상을 수상했다는 정도 외에는 별로 알려진 바도 없는, 이수태라는 51년생 사나이가 증명한다. 필시 아직도 선비는 멸종위기 동물들처럼, 그러나 어디선가 모질게 어질게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나쁜 소식은 1999년에 발간된 이 책이 이듬해에 절판되어 더는 출판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독서풍토가 얼마나 척박한지를 보여준다. 이수태는 논어 해제본인 <논어의 발견>과 함께 <새번역 논어>를 저술했다. 그 내용을 나의 천박한 문체로 소개해서는 아무래도 내가 의도하는 바를 전달하기 어렵겠기에, 이 두 권의 책에 실린 저자의 머리말 중 일부를 옮겨 적는다.

 

     (논어의) 적지 않은 글귀들은 마치 그것이 안고 있는 내용을 다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힘겨운 팽압을 띠고 있다. 어느 글귀를 통하여 뛰어들든 우리는 위대한 체험이 펼치는 드넓은 경작지를 만나게 된다... (이 책은) 좁게는 논어 단편의 해석 문제에서 출발하지만 너럽게는 공자가 발견한 삶의 실천적 원리, 인류사에서 드물게만 선포되었던 그 경이로운 길(道)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물론 논어에 대한 깊은 신뢰에 기초해 있다. 그 신뢰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모든 진정한 진리와 마찬가지로 논어의 진리에 대한 인식에는 그것의 진리됨에 대한 보증이 함께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다. .... (논어의 발견)

 

    논어는 수많은 지혜들이 넘어서고자 하였으나 넘어서지 못한 고개를 넘어섰으며, 넘어선 그곳의 이야기를 힘차고 당당하게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이 경이로운 책의 진가(眞價)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이 책에 대해 형성되어 온 성가(聲價)와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다. 실상을 말하자면 이 책의 진가는 오히려 그 성가에 의해 가리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책은 지금도 여전히 많은 비밀을 지니고 있으며 그것은 이 책의 진실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그에 관한 이해도를 누적하여 갈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각 시대에 있어서 항상 처음부터 새롭게 주목되고 발견되어야 하는 특이한 운명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 <새번역 논어>는 논어의 많은 부분에 걸쳐 종래와는 다른 번역을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이 번역서의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결과에 오류가 없다고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최종적으로 내어놓는 많은 개역은 오랜 반추의 시간과 스스로 설정한 가장 가혹한 반론을 거친 것들이다. 따라서 그것이 단지 1천여 년 혹은 2천여 년에 걸친 지배적 해석에 상치한다는 이유만으로 도외시되지는 않기를 바란다. <새번역 논어>의 의중을 짚어 보며 다시 한 번 맑은 눈으로 찬찬이 바라보면 나는 그 대부분이 충분히 수긍될 수 있을 것으로 믿고 있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단지 번역상에 나타난 표면적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논어의 세계를 조망하는 전체적인 인식의 차이를 반영한다는 사실이다. .... 나는 원칙적으로 참고 주석 이외에 논어 단편을 보다 쉽게 풀이하기 위한 강설(講說)을 자제하였다. 이른바 강설(講說)이니 상론(詳論)이니 해의(解義)니 하는 이름으로 소개되는 역자의 보다 쉬운 풀이라는 것을 보면 대부분 본문의 의미와 품격을 살리지 못하고 있다. 나는 본문을 웬만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본문보다 더 나은 설명이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 ... 만일 논어가 그 생명력을 잃지 않고도 더 손쉽게 접근할 수 있는 해설을 가질 수 있다고 한다면 이미 공자 자신이 그 방법을 택했을 것이다. (새번역 논어)

 

    이만한 격조와 깊이를 갖춘 문장을 써내는 이가 들려주는 논어의 이야기라면 어찌 당장 들어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있는가? 적어도 나에게 <논어의 발견>은 오늘의 스승으로 부활한 공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저자의 겸손하고 담담한 필체와는 달리, 그의 전언은 눈부시고 가슴 뛰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공부하는 즐거움이란 무릇 이런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흠, 그러고 보니 논어의 첫줄 역시 그렇게 시작하는군. 學而時習之 不亦說乎. 마치, “그러게 내가 뭐랬어?”라고 적힌 2천년 묵은 문장처럼.

 

    참고로, <논어의 발견>은 문체보다 내용이 우선하는 책이지만 이수태의 문체 또한 매혹적이다. 나는 그의 수필집 <어른되기의 어려움>도 발간되자 마자 사서 읽지 않을 수 없었고, 이 책 또한 내가 아끼는 수필집이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