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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어의 발견

posted Feb 04,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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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는 미숙한 내용을 화려한 문사로 포장한 여느 전적들과는 달리 짧고 간결한 글귀들이지만 그 안에 실로 위대한 체험과 예지를 담고 있다. 적지 않은 글귀들은 마치 그것이 안고 있는 내용을 다 이기지 못하겠다는 듯 힘겨운 팽압을 띠고 있다. (생략) 모든 진정한 진리와 마찬가지로 논어의 진리에 대한 인식에는 그것의 진리됨에 대한 보증이 함께 깃들여 있다고 생각한다. 논어에 관한 한 이 점은 운명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스스로의 진리됨에 대한 보증을 자기 바깥에서 손쉽게 끌어올 수 있는 실증적 진리에 비해 일견 논어의 그러한 성격은 논어의 무력성처럼 비쳐질 수도 있을 것이다. p6

논어의 여전한 생명력을 확인하는 것으로 맺어진 이 논술은 그러나 아직은 답이 아닌 물음의 형태로 더 오랫동안 지속되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

그리고 가능하기만 하다면 논어 자체가 극히 최근에야 어느 석곽에서 발굴된 것처럼, <논어의 발견>은 바로 그에 따른 발굴보고서쯤은 되는 것처럼 읽어 주십사 하는 것이다. 그것은 나의 외람된 요구이기 이전에 논어 자신이 모든 시대의 모든 독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이며, 오직 그런 만남으로서만 논어와의 진정한 만남이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p9-10

논어는 기록을 염두에 두지 않고 행해진 말과 행동을 아무런 재구성을 거치지 않고 그대로 기록한 희귀한 문헌이다. 거기에 등장하는 공자의 제자들은 분명히 2500여 년 전 중원 지역에서 살았던 실존의 인물들이며 기록된 질문과 대답, 거동 등은 실제 어느 순간에 있었던 구체적 사실을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논어 단편 하나하나는 그 대화를 둘러싸고 있던 상황과 여러 조건, 배경은 물론 각 인물들의 감수성과 성격과 표정 딍을 또렷이 담고 있다. 논어의 이러한 리얼리티는 확실히 독보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실존 인물의 언행을 기록한 고대의 많은 전적들 중에서도 이 점에 관한 한 논에에 필적한 만한 다른 전적이 없는 형편이다. p18

공자의 제자들이 우리의 흥미를 자극하는 데에는 이러한 간접적인 이유보다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공자라는 비범한 인물을 사제의 관계에서 만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그 만남의 진정한 의의는 그들이 그러한 천재일우의 인연을 가질 수 있었다는 외형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관계를 통하여 그들이 공자라는 한 희유한 광원으로부터 조명될 수 있었다는 사실에 있다. 공자로부터 조명되었다는 이 특별한 사실에서 비로소 그들은 특별한 조재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조명된 어떤 것을 볼 때 우리는 이미 그 광원에 대해여 인식하기 때문이다. 제자들을 둘러싼 밝은 피조 상태를 통하여 우리는 빛의 거리와 사각斜角을 느끼게 되고, 그것은 광원 그 자체를 조목하는 것보다 어쩌면 그 광원의 위치와 광도에 대해 더 명료한 인식을 안겨 줄 수도 있다. p18

저술이 아닌 대화록으로서 논어는 전술한 바와 같이 어느 한 순간의 실제 발언을 놀랄 만큼 정밀하게 보존하고 있기 때문에 결코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그 순간을 둘러싸고 있던 상황적 제조건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다. 논어의 섬세하면서도 뛰어난 양감은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p21-22

숙손무숙(叔孫武叔)이 중니를 헐뜯자 자공이 말했다. "소용없는 짓이다. 중니는 헐뜯을 수 없는 존재다. 다른 사람의 현명함이란 언덕과 같아서 그래도 넘을 수 있겠지만 중니는 해나 달과 같아서 도저히 넘을 수가 없다. 사람이 비록 제 스스로 해나 달과의 관계를 끊으려 하더라도 그것이 해나 달에게 무슨 손상을 입힐 수 있겠느냐? 다만 자신의 식견 없음만 드러낼 뿐이다." 叔孫武叔毀仲尼. 子貢曰:「無以為也. 仲尼不可毀也. 他人之賢者, 丘陵也. 猶可踰也. 仲尼, 日月也, 無得而踰焉. 人雖欲自絕, 其何傷於日月乎? 多見其不知量也.19/24

공자에 대한 자공의 이러한 남다른 충정은 공자 사후 그가 공자의 무덤가에 여막을 짓고 6년간이나 머물러 있었다는 사기 공자세가의 다소 미심쩍은 기록의 원인이 되기도 했지만 적어도 공자의 어록을 남기고 그의 명망을 후세에 전하는 데에 자공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자공이 실제 어떤 인물이었는가 하는 문제에 본질적으로 들어감에 있어서 바로 공자에 대한 이러한 절대적 존경이 지닌 부정적 측면부터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은 어쩌면 아이러니컬한 것이 아닐 수 없다. 공자는 자신에 대한 절대적 존경으로 표현되는 자공 특유의 기질적 문제점을 누구보다 정확히 통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점을 놓치지 않을 때 우리는 여태까지 잘못 해석되어 온 중요한 단편 하나를 바로잡을 기회를 갖게 된다. 그것은 위정/13에 나오는 다음 단편이다.
  자공이 군자에 대해 묻자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는다." (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以後從之.) 2/13.
  이 단편에 대한 종래 일반적 해석은 "먼저 행하고 나서 그 다음에 그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해석은 이 단편의 중심축을 '말'과 '실천'의 문제로 잡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번역 사례는 從之의 해석에 있어서 곤혹스러움을 드러내고 있는데 혹자는 "행동을 좇아 말한다" 하기도 하고 혹자는 "말이 행동을 따라가야 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從이라는 술어를 가급적 살리기 위해 안간힘 쓴 흔적이 역력해 보이는 이러한 몇몇 해석은 모두 자귀를 통해 문장의 뜻을 헤아리려 하였을뿐 공자와 자공 사이에서 전개된 내밀한 주제를 전혀 종잡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전통적 해석은 이 말이 자공에게 한 말이라는 점, 공자의 모든 말은 철저히 상대방의 상태와 관련된 구체적 처방이라는 점, 위대한 것에 대한 자공의 남다른 지향성과 쉽게 감동하고 쉽게 경배하는 그의 체질이 공자의 눈에는 또 다른 문제점으로 비치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하지 못한 것이다.
  공자는 "(군자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는다"고 단순하고도 분명하게 말했을 뿐이다. 從은 글자 그대로 '좇는다'는 뜻으로서 이 문장은 전혀 의역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공자는 자공이 좋은 말을 보거나 들으면 그것을 실천하기에 앞서 먼저 그 말을 좇는, 즉 감탄과 경배의 대상으로 삼는 특별한 체질을 경계한 것이다. 경배는 무시나 거부와는 정반대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무시나 거부 이상으로 자기 자신을 그 경배의 대상으로부터 격리시키는 역할을 한다.
  엄밀하게 따져 보면 이러한 현상은 자공만의 문제가 아니라 고귀한 것을 추구하는 인류사의 모든 정신적 과정 - 이를테면 위대한 종교의 출현과 이후 그 종교가 추종자들에 의해 급격히 도그마화해 가는 일련의 과정-에 있어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고 그렇게 때문에 위정/13은 모든 형태의 구도 과정에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교훈이다. 스스로를 진리 앞에 쉬 굴종시키는 자는 모든 변화의 진정한 기점이 어디 있는지를 모르고 있다. 공자는 이 점을 유의하고 있다.
  위영공/29에서 "사람이 도를 넓힐 수 있는 것이지 도가 사람을 넓히는 것이 아니다"고 강조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지구를 움직이는 아르키메데스적 기점을 공자는 영원히 자아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공에게 들려 준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는다"는 이 한마디는 공자를 지성선사니 문성왕이니 하는 이름으로 추존함으로써 단지 문묘의 귀신으로만 감금해 온 후대의 유교에 대해 결과적으로 준엄한 선행의 경고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pp26-29

공자에 대한 자공의 남다른 존경이 그 이면에서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가지듯이 그의 실로 원만한 인격과 인간적인 면모가 역시 다른 한 측면에서는 극복되어야 할 과제로 다루어지고 잇었다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그것은 베풂(施)에 관한 문제를 둘러싸고 야기되었다. 공자 철학의 중요한 한 테마를 이루고 있는 이 문제는 비단 자공과 관련해서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자공과 관련된 단편 중에서 적어도 다섯 개 정도의 단편에서 이 문제가 집중적으로 거론될 만큼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단편을 보자.



자공이 물었다.

“한 마디 말로서 일생 동안 그것을 행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서(恕)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

(子貢問曰:有一言而可以終身行之者乎? 子曰:其恕乎!己所不欲,勿施於人.) 15/24



여기에서 己所不欲,勿施於人은 그것이 어짊(仁)과 더불어 공자 사상의 최고봉에 해당하는 서(恕)를 풀이하고 있다는 점에서 각별한 주목을 받아 온 구절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오늘날 대부분의 번역에서 “자기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은 남에게도 시키지 말아라” 하는 뜻으로 풀이되고 있다. 이러한 해석은 이미 <예기> 중용 편에서부터 보이고 있으니 위영공/24에 관한 잘못읽기의 역사는 대단히 유서 깊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중용 제13장은 이 단편의 내용과 관련하여 그 의미를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충서(忠恕)가 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니 자신에게 베풀어지기를 원하지 않는 것은 또한 남에게도 베풀지 말아라.”

(忠恕違道不遠,施諸己而不願,亦勿施於人) <중용> 제13장



이 기록은 위영공/24에 대한 최초의 잘못읽기가 되었고, <예기>, 특히 중용편의 높은 권위는 그 후 모든 논어 주석의 방향을 틀어 놓고 말았다. 언뜻 보기에 그러한 해석은 공자가 말한 恕와도 통하는 것ㅊ어럼 보인다. 특히 안연/2에 이 구절이 재출현하였을 때 뒤이어 在邦無怨,在家無怨(나라에 있어서도 원망하지 말고 대부의 가에 있어서도 원망하지 말아라)이 나오고 그 無怨마저 “남의 원망을 듣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되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주석가들은 “남이 싫어할 일을 시키지 않기 때문에 남의 원망도 듣지 않는다”는, 앞뒤가 척척 들어맞는 이 일련의 해석을 받아들이는 데에 그 어떤 의혹도 두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세심히 관찰하면 이러한 해석은 금방 그 모호한 점을 드러내게 된다.

첫째, 己所不欲을 施諸己而不願이라 표현을 바꾼 것은 일종의 해석이겠지만 그 해석에서 중요한 왜곡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不欲은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무언가를 하고자 함이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단지 외부에서 가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 방어적 태도를 말하지 않는다. 둘째, 勿施於人도 그렇다. 이 표현을 “남에게 시키지 말아라” 하고 번역하는 것은 施가 가진 원래의 의미를 너무 왜곡시킨 것이 아닐 수 없다. 施는 어디까지나 무언가 좋은 것을 베풀거나 시행한다는 뜻이지 나쁜 그 무엇을 시킨다던가 강요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중용>은 이 단편의 결정적 술어인 欲이나 施를 자의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이 단편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 이 단편은 한마디로 평생 행할 만한 것인 恕의 내용이 되기에는 너무나도 안이한 것이 되고 말았다.

恕는 공자정신의 정수와도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하기 싫은 것을 남에게도 시키지 않는다는 원칙은 공자정신의 정수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단순할 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속적인 이해타산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공자는 이와 비슷한 견해를 자로가 피력했을 때에도 그게 무슨 대단한 것이냐고 핀잔을 주기까지 했던 것이다. (9/27)

그렇다면 己所不欲,勿施於人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그것은 표현된 그대로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는 것이다. 주의할 것은 공자가 이말을 ‘강조’하기 위하여 주절과 조건절에서 각각 不과 勿을 사용함으로써 표현이 극히 반어적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 동안 이 말이 제대로 해석되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러한 공자 특유의 표현법이 원래의 의도대로 전다로디지 못했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공자의 특이한 표현법은 단순한 수사학이 아니라 그가 언표하고자 하는 내용이 이 세상의 평균적 가치관과 부딪침으로써 띠게 되는 일종의 날카로움 내지 논리적 긴장에서 오는 것인데 이 점을 간과할 경우 적지않은 단편들이 제대로 해석되지 못하는 경우가 발생한다. 대표적인 경우로서 위정/6이나 위영공/20 등이 있는데 모두 해석상 자주 착종이 발생하는 경우들이다.) 만약 이 표현을 내용을 그대로 둔 채 직설적 표현으로 바꾼다면 “자신이 하고자 하는 바만을 남에게 베풀어라”하는 표현을 취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무슨 뜻인가? 이 말의 초점은 ‘베푼다’는 데에 있고 논점은 베푼다는 것이 과연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베풂인가 하는 것이다. 바로 이 베풂의 존재론에 관한 명확한 답이 옹야/30에 선명하게 제시되어 있다.



자공이 말했다.

“만약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많은 사람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떠합니까? 가히 어질다 할 수 있겠습니까?”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떻게 어진 정도이겠느냐? 반드시 성인의 경지일 것이니 요임금과 순임금도 그 문제만은 부심했었다. 실로 어진 자는 스스로 서기를 바라서 남을 세우고 스스로 통달하기를 바라서 남을 통달시키며 가까운 데서 능하여 예를 드니 그것이 어짊의 비결이라 할 수 있다”

(子貢曰:如有博施於民, 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能近取譬, 可謂仁之方也已) 6/30



학문과 정치의 목적으로서 베푼다는 것은 공문 학도들에게도 당연한 전제였다. 공자도 그것을 부인하기는커녕 오히려 요임금이나 순임금도 달성하지 못한 성인의 경지로까지 인정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자는 왜 하필 널리 베푸는 일에 관한 자공의 질문에 답하면서 “무릇 어진 자는 스스로 서기를 바라서 남을 세우고 스스로 통달하기를 바라서 남을 통달시킨다”는 말을 사족처럼 달고 있는 것일까?

우리가 이 단편을 곰곰이 들여다보면 거기에서 어떤 생동하는 대화의 흐름을 느낄 수 있다. 우선 널리 베푸는 것에 관한 자공의 질문에는 마치 “동네 사람들이 모두 좋아한다면 어떻습니까?”하고 물었을 때와 마찬가지고 자신의 자긍하는 어떤 측면에 관해 인정받고자 하는 기대가 포함되어 있다. 그에 대해 공자는 자공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 뜻밖의 평가는 바로 뒤이어지는 조건을 강조하려는 계산된 의도를 담고 있다. 그는 바로 “무릇 어진 자는 스스로 서기를 바라서 남을 세우고 스스로 통달하기를 바라서 남을 통달시킨다”고 덧붙여 말했던 것이다.

바로 이 말이 己所不欲,勿施於人의 진정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지표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요순도 부심했던 바, “백성들에게 널리 베풀어 많은 사람을 구제한다”는 과제의 실행 요체는 단지 스스로 서기를 바라고 스스로 통달하기를 바라는 것일 뿐이다. 오직 그것만이 바로 남을 세우고 남을 통달하게 하는 것이며 나아가 널리 베풀고 창생을 구제하는 길이다.

그러나 위영공/24의 진정한 해석을 가능하게 하는 옹야/30의 이 빛나는 단편도 역시 잘못 읽혀짐으로써 이 일련의 단편은 바른 해석에 이를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다. 즉, 대부분 “자기가 서고 싶으면 남을 세워 주고 자기가 통달하고 싶으면 남을 통달시켜 준다”는 기묘한 해석에 머무름으로써 己所不欲,勿施於人의 그릇된 해석과 함께 공자철학의 극히 핵심적인 한 부분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

己所不欲,勿施於人, 즉 “자기 자신이 스스로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너 스스로 하고자 하여 (그것을 통해) 남에게도 무언가를 베풀어라” 하는 이 위대한 원칙은 누구보다 자공에게 절실한 처방이었다. 자공의 성격은 천성적으로 현실과 잘 유화하였고 특히 남을 위해 노력하고 베풀기를 좋아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숙손무숙이나 진자금은 “공자보다 자공이 더 낫다”고 평가하였을 것이고 또 <좌전>이나 <사기> 등에 기록된 바처럼 그가 노나라의 탁월한 외교관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베푼다(施)는 것은 단순한 자선이나 보시, 선행 따위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자공과 공자가 화제로 삼고 있는 베풂은 남을 혹은 세상을 보다 선하게 하겠다던가 더 의롭게 하겠다던가 하는 대인적, 대사회적 의욕에 기초한 것이다. 이러한 류의 베풂은 자공과 같이 어느 정도 재능과 품성을 갖춘 사람의 의욕을 사로잡기 쉬웠을 것이다.

己所不欲,勿施於人을 통하여 공자는 자공에게 ‘타인에의 길’에 던져진 자아를 수습할 것을 요구하였던 것이다. 왜냐하면 널리 베풀기만을 바라는 그 길은 공자의 신념에서 볼 때 명백히 출구가 없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공자가 보는 한 타인에게로 나아가는 진정한 그리고 유일한 길은 자기완성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현단계에서 자공이 씨름해야 할 최대의 과제는 ‘자기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의 변혁이 가지는 의미와 위력을 깨닫는 것이었다.

“자기가 하고자 하지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아라”하는 이 위대한 원칙은 바로 타인에의 길, 널리 베푼다는 맹목적 열정에 빠진 자공이나 중궁 등의 젊은이들을 깨우치기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강조된 교훈의 말이었다.

공자는 아마 자주 그러한 취지의 말을 자공에게 들려 주었을 것이다. 전술한 바 교우관계를 다룬 안연/24에서 “충고해서 잘 이끌되 안 될 것 같으면 그쳐서 스스로 욕을 당하지는 말 것이다”하는 가르침이나 옹야/30의 말미에 붙은 “능히 가까운 데에서 예를 든다”는 방법론도 바로 ‘타인과 세상에 대한 관심에서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에로’ 돌아온다는 일관된 취지의 연장선에서 개진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러 군데에서 엿볼 수 있듯이 자공의 이해력은 공자가 바라는 만큼 영민한 것은 아니었다. 그 결과 공야장편에는 아주 흥미로운 단편 하나가 기록되어 있다.



자공이 말하였다

“저는 남이 저에게 가하는 것을 바라지 않고 저도 역시 남에게 가하지 않고자 합니다.”

(子貢曰: 我不欲人之加諸我也, 吾亦欲無加諸人.) 5/12



역시 다양한 모습으로 잘못 읽혀지고 있는 이 구절은 자공이 직면했던 대단히 미묘한 정신적 추이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공자와 자공 사이에 형성된 문제의식에 충분히 유의하면서 이 말에 접근한다면 이 말을 할 무렵의 자공은 이제 비로소 실천의 ‘자리’, 즉 자아(己)를 생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己所不欲,勿施於人에서 또 己欲立而立人에서 공자가 보여 주고자 한 실천의 자리, 즉 모든 것이 비롯되고 모든 것이 귀일할 자아의 존재론적 의미를 그는 비로소 예감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마 스승의 잦은 지적에 의해 촉발되었을 이 새로운 예감은 그의 익숙한 체질과 부딪쳐 묘한 갈등을 빚어내었을 것이다.

세상에서 자기 자신에로 회귀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자공의 언급은 그러한 과도기적 경험의 한 표출이었다. 그의 언급이 보여주는 미숙성과 불완전성은 그가 아직도 자신의 피상적 관점에 입각하여 이 새로운 경험을 서투르게 정의해 보려 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그 때문에 그것은 독아론(獨我論)의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잇따르는 공자의 언급은 실로 정확하고도 자애로운 것이었다.



사(賜)야, (그것은) 네가 이러러야 할 바가 아니다.

(子曰: 賜也, 非爾所及也.) 5/12



공자는 자공이 어떤 국면에 이르렀음을 간파했다. 그러나 그 국면은 결코 궁극적인 국면은 아니었다. 자공은 지금 과도기적 경험의 단계에 와 있을 뿐이다. 공자가 요구한 것은 독아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아는 전체에로 나아가는 관문이지만 전체와 분리될 경우에는 한갓 무(無)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공자가 한 말, “네가 이르러야 할 바가 아니다”는 말에 대하여 우리는 극히 주의 깊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공자는 자공의 희망에 대하여 부정적 입장을 피력한 것이다. 따라서 이 말을 “네가 이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고 풀이한 종래의 해석은 명백히 잘못된 것이다. 이는 자공의 말을 그 동안 잘못 해석해 온 己所不欲,勿施於人과 관련시켜 “남도 나에게 싫은 일을 시키지 않고 나도 남에게 내가 싫은 일을 시키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고 그것을 恕의 경지로 본 데에 따른 불가피한 결과였다.

그러나 자공의 말에는 加를 무언가 싫은 것을 시키거나 악영향을 미치는 것처럼 부정적인 각도에서 보아야 할 아무런 단서도 없다. 뿐만 아니라 어짊을 위한 노력에 있어서 아무도 힘이 부족한 자는 보지 못했다(4/6)고 격려한 공자가 자공은 능력이 부족해 그런 경지에 이르지 못할 것이라고 대놓고 말했다는 것은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종래의 해석은 이 단편의 경험적 성격에 착안하지 못한 것으로서 경전 공부를 자구 해석으로만 여겼던 한대 유학이나 만사를 이치의 구조로만 파악하려 했던 송대 성리학의 한계점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례라 하겠다.

자공이 경험한 이 독아론적 단계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인간 성장의 한 단계에서 여전히 경험되고 있는데 그 경험의 개인적, 과도기적 성격은 그 의미를 정밀하게 짚어 내는 것을 어렵게 하고 있다. 자공은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자기 자신’이라는 이 기묘한 영역에 주목하고 이 영역을 새롭게 느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비로소 체험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인간이 핵화되는 것을 경험했고 또 그 핵화가 가지는 미묘한 의의를 감지했던 것이다. 그러나 자공이 직면한 이 단계는 단지 모든 사람들을 핵화시키고 마는 단계가 아니라 비로소 타인들과의 진정한 만남이 약속되는 한 세계에로의 진입을 뜻하는 것이었다. 공자는 이 점을 정확히 이해했고 또 지적해 주었다. “사야, 네가 이르러야 할 바가 아니다” 하는 공자의 말에는 좀 더 무언가를 말해 주고 싶은 마음과 말해 줄 수 없는 어려움이 안타까운 여운으로 남아 있다.

자아와 세계와의 관계는 자공에게 있어 내내 중요한 화두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그는 비록 공자가 염두에 두었던 바 양자가 합일하는 경지에 이르지는 못했던 것 같지만 훗날 “군자의 잘못은 마치 일식이나 월식과 같아서 잘못이 있으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보게 되고 잘못을 고치면 모든 사람들이 다 그것을 우러르게 된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나름대로 이 화두와 성실하게 씨름한 결과였다 할 수 있을 것이다. 거기에서 그는 자기 자신의 변혁이 어떻게 타인들의 세계와 이어지는가를 비록 평면적인 논리로나마 설명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 pp29~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