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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Paradise and Power / The Return of History

posted Sep 1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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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f Paradise and Power: America and Europe in the New World Order

- 2003, Robert Kagan, Knopf

 

The Return of History and the End of Dreams

- 2008, Robert Kagan, Knopf

 

    윌 듀런트가 말한 것처럼, 어떤 정신은 분석적이어서 도처에서 차이점을 발견하고, 어떤 정신은 종합적이어서 도처에서 유사점을 발견한다. 분석적인 사람들이 미묘한 뉘앙스의 차이를 잘 감지하고 그 속뜻을 깨우치는 재능을 가졌다면, 종합적인 사람들은 잔물결들이 서로 다투는 모습에 정신을 빼앗기지 않고 큰 물줄기가 어디로 흘러가는지를 살피는 재능이 있다고 할 수 있겠다. 모든 사람들이 보고 겪지만 미처 깨닫지 못하는 커다란 변화의 흐름을 한 발짝 멀리 물러서서 조망하고 그 의미를 간략하게 요약하는 일에서 로버트 케이건(Robert Kagan)을 능가할 사람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는 ‘숲을 보는 사람’이다.

 

    워싱턴 포스트의 컬럼니스트인 로버트 케이건은 CFR(Council on Foreign Relations)의 위원이기도 하다. 80년대에 그는 국무부에서 근무하면서 슐츠 장관의 연설작성자로 일하기도 했으며, 현재는 존 멕케인 상원의원(현 공화당 대통령 후보)의 외교자문을 맡고 있다.

 

    <Of Paradise and Power: America and Europe in the New World Order(미국 vs 유럽 - 갈등에 관한 보고서, 세종연구원)>은 이라크 전쟁 이후 확연히 드러난 미국인과 유럽인의 세계관의 차이를 설명한다. 이 책이 직설적으로 다루는 소재는 미국의 대유럽관이지만, 케이컨이 이 얇은 책자를 통해서 독자들에게 보여주는 것은 대서양을 사이에 두고 서양문명이 21세기의 국제정치를 두 가지의 상이한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는 광경이다.

 

    만일 똑같은 이야기를 유럽인의 어투로 들어보고 싶다면 영국 외교관 출신인 Robert Cooper의 <The Breaking of Nations: Order and Chaos in the Twenty-First Century>(Atlantic Press, 2003, 번역서 제목 ‘평화의 조건’)을 읽어보면 된다. 이 두 책은, 어느 한 쪽이 ‘안일하다’고 부르는 것을 다른 한 쪽은 ‘평화롭다’고 부르는 식의 가치관의 차이를 담고 있긴 하지만, 동일한 현상을 직시하고 있다는 점만은 분명하다. 두 저자의 문체조차 대비되는데, 케이건의 스타일이 간명하고 발랄하다면, 쿠퍼의 글은 우아하고 품위 있다.

 

    유럽은 피로 얼룩진 지난날로부터 탈피하고 싶었고, 미국의 존재 덕분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미국에게 초강대국의 자리를 내어준 유럽에게 있어서 권력정치란 이를테면 이솝 우화에 등장하는 ‘신 포도(sour grape)’와도 같은 것이 되었다. 초국가적 신념과 파워 폴리틱스에 대한 혐오감은 권력을 상실한 구대륙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식인 셈이다. 케이건은 미국을 영화 '하이눈'에 등장하는 게리 쿠퍼처럼 보호받기 원치 않는 마을 사람들을 보호하는 보안관에 비유한다. 이 비유는 부분적으로만 옳지만, 그 옳은 부분에 한해서는 매우 적절하기도 하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직후 사회과학 독서계를 뒤흔들어 놓았던 <Of Paradise and Power>이후 케이건은 2008년에 그와 비슷한 두께와 장정의 소책자 <The Return of History and the End of Dreams>를 출간했다. 쉽게 알 수 있듯이, 이 책의 제목은 프란시스 후쿠야마가 냉전종식 식후인 1992년에 출간한 문제작 <The End of History and the Last Man>의 패러디다. 케이건이 New Republic에 기고한 컬럼의 제목에서 알수 있듯이 이제 ‘역사의 종언은 종언을 고한’셈이라는 인식을 담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빅토리아 여왕의 즉위 60주년 기념식(1897년)때 12살 소년이었다. 삼촌의 어깨 위에 걸터앉아 전세계 방방곡곡을 포함하는 대영제국의 축하사절단의 행렬을 지켜보았던 토인비는 후일 그날의 소감을 이렇게 적었다.

 

     “I remember watching the Diamond Jubilee myself as a small boy. I remember the atmosphere. It was: ‘Well, here we are on top of the world, and we have arrived at this peak to stay there forever. There is, of course, a thing called history, but history is something unpleasant that happens to other people. We are comfortably outside all of that I am sure.’”

 

    아마도 ‘역사가 정지한다’는 느낌은 그 시대의 전성기를 목격하는 역사가들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느낌인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리아 여왕 60주년 기념식이 끝난지 불과 10여년 남짓 기간동안 보어 전쟁과 1차대전을 겪으면서 국운이 쇠하던 영국을 경험해야 했던 토인비처럼, 후쿠야마는 자신이 ‘역사의 종언’이라고 붙인 현상의 이름이 실은 이러저러한 의미에 불과했다고 해명하고 다니느라 아마도 짜증스러운 피로를 경험하고 있을 터이다. 그의 저서가 간결하게 표현한 이념적 투쟁의 양상이 항구적인 진리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케이건이 새롭게 스케치한 21세기의 세상은 19세기의 세상을 닮아 있다. 냉전종식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전에 경험하지 못한, 새롭고 평화로운 국제질서를 꿈꾸었지만 현실은 그보다 엄혹하다는 사실을 그는 지적한다. 강대국들은 토머스 프리드먼의 바램처럼 세계화의 망(web) 속에서 하나의 이익집단으로 녹아내리지 못하고, 여전히 영광과 명예와 영향력을 누리기를 꿈꾼다. 프리드먼의 표현을 빌린다면, 아마 우리는 내일도 ‘올리브 나무의 세상’을 살아가야 할 모양이다. 1648년 베스트팔리아 평화조약과 더불어 공식적으로 탄생한 민족국가(nation-state)들은 세계화의 거센 바람도 아랑곳 하지 않고, 21세기에도 건재한 주인공 노릇을 할 전망이다. 러시아에서, 중국에서, 일본에서, 인도에서, 그리고 중동에서 민족주의는 예전보다 오히려 강력해진 이데올로기가 된 것처럼 보인다. 마치 항생제에 내성을 지니게 된 요즘의 수퍼 바이러스들처럼. 강력한 민족주의의 열병은 이 땅에도 촛불과 함께 타오르는 중이다.

 

    러시아가 그루지아를 침공한 이후 미-러관계가 얼어붙는 것을 바라보면서, 언론은 ‘냉전적 대결로의 회기’를 우려했다. 그러나 ‘냉전적’이라는 술어는 그르다. ‘냉전’이란, 지구상에서 20세기 후반부에만 잠시 벌어졌던 매우 특이한 정치적 갈등을 일컫는 이름에 불과하다. 사유활동의 산물이던 이념의 갈등은 가고, 지정학과 종교의 갈등이 좀비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21세기의 국제질서가 뭔가로 회귀하고 있다면, 그것은 19세기 유럽의 질서(또는 무질서)다. 이제는 절판되어 구하기조차 어려운 키신저의 <A World Restored> 같은 책이 불현듯 다시금 필요해 지는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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