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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키신저을 위한 변론 - 로버트 카플란 (May 2013, Atlantic Monthly)

posted Jul 05,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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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헨리 키신저을 위한 변론
                                             - 그는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19세기 정치가였다 -

                                                                                   by 로버트 D. 카플란 (아틀란틱 먼슬리 2013년 5월호에서 인용)

키신저는 자신이 지지하던 대이라크 침공의 초기 준비가 한창이던 2002년 여름에,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르면 “수십 년 동안 정상적인 정치가 작동하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새로운 권력 투쟁은 매우 폭력적인 양상을 띨 것”이 틀림없는 이 중동 국가의 점령을 위해 비판적 사고와 계획이 부족한 것이 걱정스럽다고 나에게 말했다. 이것은 부적절한 낙관론보다 도덕적으로 올바른 비관론이었다.

내가 헨리 키신저와 가깝고 친밀하게 지낸 지도 제법 오래 되긴 했지만, 내가 역사적 인물로서의 그와 맺은 인연은 수십 년 전에 시작되었다. 나의 학창시절에는 그를 베트남전의 괴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그 후, 내가 직접 개발도상국의 완고한 현실을 경험하고, 미국 같은 자유주의 정치체제가 국익을 보호하는 과정에서 어떤 과업에 직면하게 되는지를 이해하고 나서부터 키신저는 내가 온갖 세상사의 의미를 알아내기 위해 읽는 책들을 저술한 여러 정치 철학자들 중 한 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나는 1980년대에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여행하면서 1957년에 출판된 키신저의 첫 저서 <회복된 세계>를 접하게 되었는데, 이 책은 나폴레옹 전쟁 이후의 외교를 다룬 것이었다. 이 책에서 그는 오스트리아의 중요성을 "결코 민족주의로 정통성을 부여한 체제의 일부가 될 수 없었던 다언어 제국"이라는 데서 찾았고, 내가 80년대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그리스에 관한 진실을 설득력 있게 제시했다. 키신저는 그리스 독립 전쟁이 1820년대의 식자층에 얼마나 매력적으로 보였는가와는 상관없이, 그것이 정치적 자유를 성취하려는 중산층의 혁명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종교에 바탕을 둔 민족적 운동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을 지적했다.

정책결정자들이 사사로이 키신저를 깎아내릴 때, 그들은 자신이 얼마만큼 키신저에 필적하는지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 전직 국무장관은 이번 달(2013년 5월)로 90세가 된다. 그의 유산을 기리자면 우리는 19세기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1822년 8월, 영국의 급진적 지식인들은 로버트 스튜어트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공공연히 기뻐했다. 낭만주의 시인이자 영웅적 모험가인 바이런 경(Lord Byron)은 캐슬레이 자작으로 더 널리 알려진 스튜어트를 "냉혹하고... 동요하지 않는 악한"이라고 묘사했다. 1812년에서 1822년까지 영국 외교장관이었던 캐슬레이는 나폴레옹을 무찌른 군사적 동맹을 조직하는 데 일조했고, 이후 수십 년 동안 유럽을 대규모 폭력으로부터 지켜준 강화 합의의 협상을 도왔다. 그러나 정작 이 합의는 자유주의 세력의 노력에 대해서는 별다른 보상을 제공하지 않으면서 프랑스에서 부르봉 왕조를 복귀시켜 주었기 때문에, 캐슬레이의 성취는 급진주의자들을 달랠 수 있는 이상주의적 요소를 결여하고 있었다. 물론, 귀족적 질서를 수호함으로써 이상주의를 결여하게 되었다는 그 사실이야말로, 다양한 군주들이 나폴레옹에 대항하여 단결하고 대륙 전체의 평화를 수립할 수 있었던 유일한 동기가 되었다. 또한, 그렇게 마련된 대륙의 평화 덕분에 19세기가 막을 내리기 전에 영국이 세계에서 지배적인 강대국으로 부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도 유념해야 할 것이다.

캐슬레이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았던 한 사람은 헨리 존 템플(Henry John Temple)이었다. 파머스턴 경(Lord Palmerston)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진 그는 훗날 영국의 외교장관이 되었다. 파머스턴은 "정부와 국가를 위해 이처럼 큰 손실은 없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파머스턴은 1820년대 초 영국의 핵심적인 국익이 위협받는 상황이 아님에도 스페인에 민주주의를 착근시키기 위해 전쟁을 해야 한다고 요구하던 영국의 급진적 지식인들과의 논쟁에 뛰어들었다. 이 지식인 집단은 정작 영국의 존망이 걸려 있던 나폴레옹 전쟁에 관해서는 제한적인 열의를 보였을 뿐이었다.

이십 년 넘도록 외교부를 이끌면서, 파머스턴은 때때로 캐슬레이 못지않게 미움을 받아야 할 운명이었다. 캐슬레이가 그러했듯, 파머스턴도 외교정책에 하나의 불변의 원칙을 가지고 있었으니, 그것은 영국의 국익이 세계적 세력균형의 보존과 동의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파머스턴은 명징한 자유주의적 본능도 지니고 있었다. 그는 영국이 입헌 정치체제였기 때문에 영국의 국익이 외국의 입헌 정부를 옹호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대륙에서 벌어진 1848년 혁명에 공감을 표명함으로써 리버럴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런 와중에도 파머스턴은 자신의 리버럴한 국제주의(그의 성향을 그렇게 부를 수 있다면)가 하나의 일반적 원칙일 뿐이며, 전 세계의 다양한 상황을 감안하면 그 원칙은 지속적으로 굽히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파머스턴은 1830년에 독일에서 자유주의를 고무했지만 1840년대에는 독일에서 자유주의를 저버렸다. 그는 포르투갈에는 입헌주의를 지원했지만, 세르비아와 멕시코에는 반대했다. 또한 그는 페르시아에서 러시아와 협력하는 가운데에도, 러시아를 향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북서쪽으로 영국령 인도의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부족의 족장들은 모두 지원했고, 인도를 향해 남동쪽으로 러시아의 세력권을 확장하려는 모든 시도에는 맞섰다.

많은 사람들, 특히 급진주의자들은 외교정책과 자신들의 개인적 신학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파머스턴은 일각에서 그를 도덕적으로 규탄하는 것을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리버럴 정치가 존 브라이트는 후일 파머스턴의 임기를 "기나긴 범죄"라고 묘사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파머스턴이 그처럼 유연한 접근을 유지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결코 잇달아 벌어지는 외교정책 위기들을 헤쳐 나가면서—1857년 인도 반란이라는 재난에도 불구하고—영국을 19세기 전반의 즉흥적 제국주의로부터 과학과 무역에 바탕을 두고 증기 기관으로 구동되는 19세기 후반의 제국으로 전환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수십 년이 흐른 뒤에야 파머스턴이 영국의 아마도 가장 위대했던 외교관으로서 이룩한 성취가 분명히 드러났다. 파머스턴은 더 나은 세상을 진심으로 염원했음에도 그가 일하던 시절에는 현상유지를 위해 고생해야 했다. 파머스턴의 전기 작가 중 한 사람인 재스퍼 리들리(Jasper Ridley)는 "그는 그 어떤 국가도 영국을 위협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하게 되지 못하도록 막고자 했다"고 썼다. 그는 파머스턴의 외교정책이 "영국이 연루되고 영국을 약화시킬 수 있는 전쟁의 발발을 예방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훌륭한 기술로 수행한 일련의 전술적 임기응변"이었다고 썼다.

파머스턴과 마찬가지로, 헨리 키신저는 1960년대와 70년대처럼 미국의 기회보다 취약성이 더 커 보이는 불확실한 시대에는 현상유지에 최고의 도덕성이 부여되어야 마땅하다고 믿었다. 그러면 후에 오는 운이 좋은 어떤 정치 지도자가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자유주의를 장려할 기회를 발견하게 될 수도 있을 터였다. 관건은 그런 순간까지 국력이 줄어들지 않도록 유지하는 것이다.

국가의 생존을 보장하자면 때때로 개인적 도덕이 적용될 여지는 비극적으로 작아진다. 국가의 일과 관련된 특정한 상황에서 유대-기독교적 도덕성을 적용할 수 없음을 깨닫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 될 수도 있다. 이처럼 도덕을 위반해야 할 필요성을 인식하고 그런 필요에 따라 행동한 뒤 자신의 행동에 대한 책임을 지는 드문 사람들이야말로 국가가 가장 필요로 하는 지도자들이다. 비록 여러 세대에 걸쳐 이런 지도자들은, 현실 세계의 관료적 책임이라는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고 좋은 취지로 추상적인 선택을 하면서 도덕을 융통성 없는 절대적 가치로 취급하는 지식인들을 대단히 불편하게 만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20세기 초 포르투갈어 시인이자 실존주의 작가였던 페르난두 페소와(Fernando Pessoa)는 만일 전략가가 "자신이 천(千) 가구에 드리울 어둠과 삼천 명의 가슴 속에 야기할 고통에 관해 생각한다면 행동할 수 없을 것"이며, 그러면 문명을 그 적들로부터 구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했다. 페소와는 "수많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이 끔찍하지만 필요한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의 작품은 "행동 뒤에 나타나는 감성의 출구 역할을 한다"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캐슬레이나 파머스턴처럼 헨리 키신저가 일각에서 비난을 받아야 했던 궁극적인 이유다.

파머스턴이라면, 키신저에 대해 불편한 느낌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뿐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를 무턱대고 비난하는 것은 망상이나 위선에 가깝다. 키신저가 일하던 냉전 시대의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그는 사실 꽤 도덕적이었다.

냉전이 갑자기, 예기치 않게, 승리감을 도취시키는 방식으로 종료되는 바람에, 이후 많은 사람들이 서구의 승리를 필연적인 결론으로 여겨 왔고, 따라서 키신저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때때로 취한 염격한 조치들이 부당했다고 보는 경향이 생겨났다. 하지만 냉전의 싸움 한가운데에서, 핵 대결의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이던 길고 음울한 기간 동안 국가 안보 기관에 종사하던 이들은 그 시대의 끝을 예견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냉전 시절, 특히 1980년대 이전의 동유럽이 어땠었는지 잊는다. 비밀경찰이 조성한 공포와 정권이 초래한 빈곤의 조합은 마치 어둑한 조명이 비치는 광대한 교도소 마당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 교도소 마당이 더 확장되지 못하게 만든 주된 요인은 핵무기로 무장한 사단의 형태로 투사된 미국의 힘이었다. 핵무기가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것이 불필요했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실은 정반대다. 할리우드가 풍자한 스트레인지러브 박사(Dr. Strangelove)와는 딴판으로, 아마겟돈을 기획했던 사내들이야말로 평화를 유지한 사람들이다. 냉전 시대를 살았지만 2차 대전에 관한 개인적인 기억이 없는 많은 베이비부머들(Baby Boomers)은 이 두 개의 분쟁을 인위적으로 분리시킨다. 그러나 홀로코스트의 난민이자 독일 점령 당시 미 육군 정보장교였던 키신저에게, 2차 대전 당시 조지 패튼(George Patton) 휘하에서 탱크부대 사령관이었고 1968년 이후로 베트남 주둔 미군 사령관이었던 크레이튼 에이브람스(Creighton Abrams) 장군에게, 그리고 나치 치하 프랑스에 낙하산 침투 경험이 있었고 이후 월남 대사가 된 맥스웰 테일러(Maxwell Taylor) 장군에게, 냉전은 2차 대전의 연속일 뿐이었다.

혁명적 허무주의자들은 동유럽을 넘어 남미에 더 많은 쿠바를 만들어내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고, 중국의 공산당 정권은 대약진으로 알려진 집단화 사업을 통해 최소한 20만 명의 자국민을 살해했다. 한편, 아마도 20세기가 만들어낸 가장 무자비한 집단에 해당할 북베트남 공산주의자들은 미국 군대가 처음 베트남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수만 명의 자국민을 살해했다. 사람들이 곧잘 잊어버리는 것은 우리를 베트남전으로 이끈 것이 부분적으로는 이상주의적인 사명감이었다는 사실이다. 동일한 이상주의의 샘물이 우리로 하여금 2차 대전에서 싸울 수 있게 해 주었고, 1990년대에 발칸 반도에 개입할 동기를 부여해 주었다. 르완다와 구 유고슬라비아에 대한 개입을 열렬히 지지했으면서도 그와 유사한 논리가 우리를 베트남으로 이끌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은 역사적 기억을 상실한 사람들이다.

베트남에서, 미국의 이상주의는 어려운 지리적 조건이 부과한 군사적 한계와 정면으로 충돌했다. 이것은 냉전을 수행하는 방식에 관한 미국내의 정치적 합의를 파괴했다. 키신저의 저서 <베트남전을 끝내며(Ending the Vietnam War, 2003)>에 대한 서평에서, 역사학자이자 언론인인 에반 토마스(Evan Thomas)는 키신저가 당면한 비극의 본질은 그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클럽의 회원 자격을 얻으려고 계속 애썼다는 사실임을 암시했다. 그 클럽은 바로 "지배층(Establishment)"인데, 이 용어는 베트남 전쟁에서 나라가 상처를 입는 와중에 철 지난 유행처럼 되어버렸다. 지배층은 재계와 외교정책 집단의 여러 위대하고 명망 높은 인물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존 J. 맥클로이(John J. McCloy)나 찰스 볼렌(Charles Bohlen)처럼 전원이 남성이고, 개신교도였으며, 이들은 과거에 파시즘이 그러했듯이 공산주의가 적(敵)이던 시절에 자신들의 영향력과 실용주의를 통해 공화당과 민주당 사이의 간격을 메워주었다. 홀로코스트를 탈출한 유태인으로서, 키신저는 아마도 이 클럽의 가장 촉망받는 후계자였을 것이다. 그러나 지배층이 나라를 전쟁 속으로 이끌고 갔다가 거기서부터 어떻게 빠져나오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와해되어 가던 시점에 외교정책의 소용돌이 속으로 발을 들여놓아야 하는 것이 그의 운명이었다.

1969년 1월에 키신저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국가안보보좌관이 되었고, 1973년에는 그의 국무장관이 되었다. 하버드 교수이자 "록펠러 공화당원"이던 키신저는 반지성주의적인 공화당 우파로부터 불신을 받았다. (한편, 민주당은 조지 맥가번의 "미국이여 집으로 돌아오라"라는 슬로건과 연계되어 사실상 사이비 고립주의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닉슨과 키신저는 린든 존슨 대통령으로부터 거의 550,000 명의 미군과 (최소한 1백만 명의 병력으로 구성된) 월남 동맹군이 비슷한 수의 북베트남 군인 및 게릴라들과 전투를 벌이고 있던 상황을 물려받았다. 국내에서는 대체로 국가의 경제 및 교육 분야 엘리트들로 구성된 시위대가 미국이 거의 즉각적으로 모든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미국의 일부 저명한 반대자들은 적과의 연대감을 공공연히 표명하려고 북베트남을 방문하기까지 했다. 그에 화답하듯 공산주의자들은 하노이가 타협할 의지가 있다며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약속으로 외국의 지지자들을 유혹했다. 샤를 드골(Charles de Gaulle)이 (키신저가 <베트남전을 끝내며>에 기록했듯이)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알제리로부터 프랑스 군대의 철수를 협상했을 때, 알제리는 만일 드골과 타협하지 않는다면 그의 후임자는 그보다 훨씬 강경한 노선을 취하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아마 그와는 반대로, 민주당내 맥가번주의(McGovernism)의 부상을 감안한다면 미국의 항복에 방해가 되는 것은 닉슨과 키신저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이로써 닉슨과 키신저의 협상 입지는 드골이 처했던 상황에 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다.

키신저는 궁극적으로 협상하기보다는 굴복하고 싶어 하는 리버럴들과 중국이나 러시아와 진지한 협상을 시도하는 것은 원칙을 저버리는 짓이라고 생각하면서 전쟁에 대해 애증을 동시에 느끼는 보수주의자들 사이에 자신이 끼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두 가지 입장 모두 힘을 잃은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환상이었다.

키신저의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든 것은 냉전이 종식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중국이나 소련에 수립된 정권들을 영원히 다루어야 할 것이라는, 지상의 시대적 가정이었다. 열혈 혁명가였던 히틀러는 유혈이 낭자한 12년을 거치는 동안 스스로를 소진시켜버렸다. 그러나 모택동과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shnev)는 둔하고 더딘 압제의 기구들을 수십 년 동안—모택동의 경우에는 사반세기 동안, 브레즈네프의 경우는 반세기 동안—감독했다. 두 정권 모두 붕괴의 조짐은 드러내지 않았다. 키신저가 소련과 핵무기 협정을 협상함으로써 중소간을 서로 다투도록 만들었을 때조차를 포함해서, 중국과 소련을 정통성 있는 국가로 취급한 것이 몇몇 보수주의자들의 주장처럼 원칙을 저버린 짓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열핵 전쟁의 위협이 존재하는 시대에 맞게 수정된 미국의 (파머스턴을 인용하자면) "영원하고 영속적인 이익"을 인식한 결과였다.

리버럴들의 굴종과 보수주의자들의 현실도피, 그리고 북베트남의 맹렬함에 직면한 상황에서, 키신저의 과업은 미국의 동맹인 월남을 배신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 지역에서 철수하는 것이었다. 그 과업을 수행하면서, 그는 중국과 소련은 물론 중동과 남미의 국가들을 다루는 데 필수적인 미국의 강력한 평판을 유지하고자 노력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인 마이클 하워드 경(Sir Michael Howard)은 키신저가 내세웠던 세력균형의 정신은 "낙관적인 미국의 세계교회주의(ecumenicism)"(그것은 숱한 범세계적 군축 운동의 기초가 되었다)와 미국의 거친 서부에서 유래된 "전쟁의 문화"(최근에 그것은 조지 W. 부시와 연관지어진다) 사이의 중간 지대라고 보았다. 그 정신은 탈냉전 세대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냉소적이거나 비도덕적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은 세태와 무관하게 계몽된 경세의 원칙을 보여주었다.

2년이 채 지나기 전에 닉슨과 키신저는 베트남에 주둔하는 미군의 수자를 156,800 명으로 줄였고, 닉슨이 사임한 뒤로 3년 반이 흐른 뒤에 마지막 지상 전투 병력이 철수했다. 샤를 드골이 알제리에 대한 프랑스의 개입을 종식시키는 데도 그보다는 오래 걸렸다. (그보다 더 빨리 철수하지 못한 데 대한 불만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곤란한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즉, 어떤 형태로도 월남을 존속시킬 수는 없다는 인식이 1969년에 받아들여지고 있었으리라는 가정과, 북베트남이 항상 선의로 협상에 임했으리라는 가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을 1969년 이후까지 끌었다는 원죄는 영영 닉슨과 키신저의 몫이 될 것이다.)

이 성공적인 병력 철수를 용이하게 만들기 위해 시행한 것이 캄보디아 일부 지역에 대한 공습이었다. 캄보디아 정부의 통제는 거의 미치지 않고 약간의 민간인과 많은 북베트남군의 요새가 있던 지역이 주로 공습 대상이었다. 지미 카터(Jimmy Carter)의 국가안보보좌관으로 근무했던 하버드대 교수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은 언론이 "비밀" 공습이라고 불렀던 이 공격의 90%는 대중에게 알려졌다고 적었다. 그에 따르면, 초기 공습을 비밀로 한 것은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Norodom Sihanouk)를 망신시킴으로써 북베트남과의 강화 회담을 복잡하게 만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철군을 위한 조치에는 북베트남에 대한 공중 폭격도 포함되었다. 신보수주의 역사가인 빅터 데이비스 핸슨(Victor Davis Hanson)은 특히 1972년 12월의 크리스마스 폭격은 훗날 닉슨과 키신저의 전쟁 노력을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의 주장처럼 "효과가 없고 무차별한 공격"이기는커녕 "단지 몇 개의 주요 설비만을 파괴함으로써 공산주의자들을 협상 테이블로 복귀시킨" 조치였다고 썼다. 핸슨이 네오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견해가 역사를 과격하게 재해석한 것은 아니다. 사실 그는 당시의 뉴스 보도를 읽어주고 있을 뿐이다. 크리스마스 폭격 직후 뉴욕 타임즈의 말콤 W. 브라운(Malcolm W. Browne)은 폭격의 피해가 "북베트남의 선전에 의해 엄청나게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볼티모어 썬의 기자 피터 워드(Peter Ward)는 "현장의 증거들은 폭격이 무차별적이었다는 혐의가 사실이 아님을 입증한다"고 썼다. 몇 기의 폭탄이 민간 거주 지역으로 오폭된 것은 분명하지만, 선택된 목표물의 전체적 파괴 양상과 비교할 때 그 피해는 미미했다.

많은 사람들이 북베트남 폭격, 캄보디아 침공 및 여타 사건을 규탄할 때 취하는 의례적인 격렬함은, 어떤 경우에는, 사실에 대한 무지와 베트남 전쟁 중 미국의 어려운 결정이 이루어진 맥락에 대한 무지를 드러낸다.

닉슨과 키신저가 실시한 철군은 드골의 알제리 철군보다 신속했으면서도, 완전한 미국의 굴욕은 막을 수 있을 만큼 점진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유지된 미국의 세계적 지위 덕분에 대통령과 국무장관은 중국과의 역사적인 화해를 이룩할 수 있었다. 중국과의 화해는, 1970년 닉슨과 키신저가 모스크바를 위협하여 시리아의 탱크가 요르단 국경을 침범하고 후세인 국왕을 몰아내지 못하도록 막으면서도 소련과의 획기적인 전략무기 협정을 체결할 수 있는 지렛대를 제공해 주었다. 패배주의가 팽배하던 시절에 키신저는 파머스턴도 감동시켰음직한 방법으로 임기응변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렇다. 키신저의 과거 기록에 몹쓸 전술적 오산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의 실수에 대한 기록이 도서관을 가득 채울 만큼 많은 책들의 소재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후일 보스니아,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지에서 더 적은 병력을 더 점진적으로 철수시켰을 때 군사 계획가들이 당면했던 복잡성을 감안한다면, 닉슨 행정부가 1969년에 수 개월 이내로 베트남에서 50만 명 이상의 미군을 철수시켰을 수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랜 동맹국에 대한 미국의 갑작스러운 배신이 동남아를 넘어 외교적, 전략적으로 초래할 문제들은 논외로 하더라도.)

1970년 북베트남의 동부 캄보디아 침공에도 불구하고, 미국 의회는 시아누크를 폐위시킨 론 놀(Lon Lol) 정권에 대한 원조를 1971년에서 1974년 사이에 대량 삭감했고, 크메르 루즈와 싸우는 론 놀에 대한 미 공군의 지원을 금지시켰다. 미래의 역사가들은 이러한 행위들이 그보다 6년 전에 닉슨이 인구밀도가 낮은 캄보디아 일부 지역에 실시한 폭격보다 1975년 크메르 루즈가 캄보디아를 접수하는 데 훨씬 더 크게 기여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1975년 4월 사이공이 공산주의자들의 손에 넘어간 것은 민주당이 다수를 차지한 의회가 월남에 대한 원조를 급격히 삭감한 후였다. 월남 정권은 설령 미 의회가 원조를 그처럼 심하게 줄이지 않았다 하더라도 존속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그 원조의 삭감이 월남의 절망적 상태에 대한 의사표시에 그치지 않고, 워싱턴 정계에서 닉슨의 영향력이 사라지게 만들었던 워터게이트 사건의 결과물이었다는 점과, 제럴드 포드(Gerald Ford)의 후임 행정부의 능력도 심각하게 저해했다는 점이다. <베트남전을 끝내며>에 키신저 자신이 적은 내용은 시대를 넘어 반향을 일으킬 자격이 있다.

“우리 중 누구도 [1972년의 닉슨처럼] 큰 폭으로 선거에서 승리한 직후에 대통령의 권위가 붕괴될 수도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다. 우리는 전면적 침공에 대항하는 미국의 도움 아래 우리의 동맹인 월남이 지탱할 수 있는 합의를 바탕으로 일하고 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시위대는 베트남을 비정상적인 사회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거론할 수도 있겠지만, 나와 내 동료들이 베트남을 떠올릴 때는 그곳에서 분투하고 고생하는 남녀 군인과 외교관들, 그리고 앞으로 불확실하지만 확실히 고통스러운 운명에 직면하게 될 우리 베트남 동료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위험한 정글과 먼 논밭에서 잔악한 적들과 싸우면서 자유의 대의를 지키고 있다고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이들은 언론의 비방과 의회의 공격과 시위대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미국의 지도층 집단이 시작했다가 포기하고 종내는 경멸한 투쟁을 위해 목숨을 걸고 청춘을 불사르면서 미국의 이상주의 전통을 지켜냈다.”

키신저의 외교적 업적의 범위는 동남아시아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1973년에서 1975년 사이에 키신저는 닉슨과 제럴드 포드 휘하에 봉직하면서 욤 키푸르(Yom Kippur)전쟁을 미국에 유리한 교착 상태로 이끌었고, 그런 다음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 사이의 정전을 중재했다. 이 합의 덕분에 워싱턴은 1967년 6일 전쟁으로 인한 관계 단절 이후 처음으로 이집트 및 시리아와 외교 관계를 재개할 수 있었다. 나아가 그 합의는 1979년 이집트-이스라엘 평화조약이 체결될 수 있는 맥락을 제공해 주었고, 21세기에 접어든 이후에도 한참동안 지속되어 온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정전 상태를 정착시키는 데도 기여했다.

1973년 가을,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의 무질서하고 무능한 통치의 결과로 칠레가 혼란에 빠지고 소련 진영으로부터의 침투에 노출되었을 때, 닉슨과 키신저는 무고한 수천 명의 살해를 야기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Augusto Pinocht) 장군의 군사 쿠데타를 고무했다. 그들의 냉정한 도덕적 논리는 그 어떤 종류의 우파 정권도 궁극적으로 그 어떤 좌파 정권보다 칠레와 라틴아메리카에 더 유익하고 동시에 미국의 이익에도 부합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옳았다—비록 그 때문에 크나큰 비용을 치르긴 했지만.

라틴아메리카의 다른 국가들이 사회주의 실험으로 머뭇거리고 있을 동안 칠레에서는 피노체트 정권 초기 7년간 국영기업의 수가 500개에서 25개로 감소했고, 1백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면서 빈곤율이 인구의 1/3에서 1/10로 내려갔다. 유아 사망률도 1,000명당 78명에서 18명으로 감소했다. 칠레의 사회 경제적 기적은 모든 개발도상국, 특히 구공산주의 국가들의 패러다임이 되었다. 물론, 경제적, 사회적 이익이 얼마나 크건 간에 거의 20년 동안 1천 곳 이상의 수감시설에서 수만 명에게 자행된 체계적인 고문을 정당화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진짜 역사란, 많은 언론의 추적 보도가 다루는 것처럼 역사적, 철학적 맥락으로 정제되지 않은 추악한 사실을 떠드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진짜 역사는 다른 시대, 다른 지역과의 끊임없는 비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다. 그런 의미에서, 포드와 카터 행정부가 아프리카의 뿔 지역, 특히 1970년대만 해도 피노체트 치하의 칠레보다 세 배나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던 에티오피아에 시행한 내용과 비교해 보는 것은 유용하다.

말년에 키신저는 그가 1970년대에 라틴아메리카에 대해 한 일들과 관련된 법적 위협 때문에 여러 나라를 방문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나라에서 지미 카터는 거의 성인처럼 대접받는다. 에티오피아에 관하여 카터의 도덕성을 키신저와 어떻게 견줄 수 있는지 살펴보자. 앙골라, 니카라과, 아프가니스탄 등과 마찬가지로, 에티오피아는 사이공 함락 이후 점점 불안정하게 되더니 쓰러진 도미노들 중 하나였다. 부분적으로, 이것은 도미노 이론이 틀렸다는 베트남 반전 운동의 한 가지 신화가 그릇됨을 입증해 준다.

내가 1988년 출간된 나의 책 <굶기 싫거든 항복하라(Surrender or Starve)>을 포함하여 다른 지면에도 썼듯이, 미국이 워터게이트와 월남의 함락에 정신이 팔려 있는 사이에 좌파 성향의 에티오피아 임시군사행정회의(Dergue)와 무자비한 새 지도자 멩기스투 하일레 마리암(Mengistu Haile Mariam)이 권력을 장악했다. 당시 포드 대통령의 국무장관이던 키신저는 아디스아바바에 어느 정도의 군사 원조를 지속적으로 제공함으로써 에티오피아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만일 미국이 에티오피아에서 모든 지렛대를 포기했다면, 에티오피아는 다음 단계로 나아가 소련의 위성국가가 되고 모든 국민들에게 비참한 인권 상황이 닥쳐올 수도 있을 터였다.

키신저는 그의 냉전 시대 공화당 동료들과는 달리, 언제나 자신이 얼마만큼 미움을 받고 있는지를 고통스러울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포드와 키신저는 1977년 1월에 카터와 그의 국무장관 사이러스 밴스(Cyrus Vance)에게 자리를 넘겨주었고, 카터와 밴스는 사하라 사막 이남의 아프리카에 대해 전보다 덜 엄격한 정책으로 조정하기를 원했다.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이러한 희망은 즉시 미국이 입는 냉전적 불이익으로 나타났다. 월남의 몰락에 한껏 고무된 소련이 더욱 호전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과거 어느 때보다도 자국의 자원을 기꺼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에티오피아가 혁명의 혼란에 빠지자, 소련에 의존하던 소말리아를 아디스아바바에 대한 지렛대로 사용했다. 당시 소말리아는 단지 3백만 명 정도의 유목민들로 이루어진 나라였지만, 에티오피아는 그 10배에 달하는 도시화된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기계화된 아프리카 위성국 군사력을 지상의 목표로 추구하던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에게 에티오피아는 좋은 먹잇감이었다. 소련은 에티오피아의 적국에 무기를 공급하겠다고 위협하면서, 동시에 군사 원조를 제공하는 고전적 당근과 채찍 전략을 구사했다. 그러나 부분적으로는 멩기스투가 그때까지도—주로 키신저 덕분에—미국으로부터 받고 있던 M-60 탱크와 F-5 전투기 때문에, 전군의 군수품 공급처를 바꾸는 곤란한 작업에 착수하기를 꺼렸다.

1977년 봄, 카터는 에티오피아의 인권 상황을 문제 삼아 무기 공급을 중단했다. 소련은 동독 보안 경찰을 아디스아바바에 파견하여 멩기스투 정권의 공고화를 지원하는가 하면, 에티오피아의 통치자를 일주일 간 모스크바에 국빈으로 초청했다. 친소 국가인 남예멘으로부터 탱크와 기타 장비들이 도착했고, 쿠바의 자문단이 에티오피아를 방문했다. 수 개월이 흐른 뒤, 임시군사행정회의는 거리에서 수백 명의 청소년들에게 총격을 가했고, 이것은 "붉은 테러"라고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적어도 아직은 모두 잃은 상태는 아니었다. 에티오피아 혁명은 좌파 혁명이었음에도 공공연한 반미적 경향은 상대적으로 적게 드러냈다. 신임 이스라엘 총리 메나켐 베긴(Menachem Begin)은 에티오피아 유태인들을 구출할 목적으로 카터에게 에티오피아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지 말고 멩기스투가 소말리아의 진군을 막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 군사 지원을 제공해줄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베긴의 탄원은 무시되었다. 카터의 행동의 결과는 부분적으로는 에티오피아에서 좌파 성향의 정권이 본격적인 맑스주의 국가로 전환되는 현상으로 나타났다. 그 후 에티오피아에서는 집단화와 "촌락화(villagization)" 사업으로 수십만 명이 사망했고 다른 수십만 명이 기아로 사망했는데, 말할 필요도 없이, 기아는 가뭄만이 아니라 모스크바식 농업 정책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에티오피아도 피노체트를 가졌더라면 차라리 행운이었을 것이다.

아프리카의 뿔 지역에서 카터가 키신저 식의 권력 정치를 추구하지 않기로 했던 결정과 그 후 에티오피아에서 일어난 대규모 사망 사이의 인과관계는 닉슨의 캄보디아 농촌 지역 침공과 그 6년 후 크메르 루즈의 집권 사이의 인과관계보다 더 직접적이다.

19세기 후반까지도 파머스턴 경은 여전히 논란의 인물이었다. 그러나 20세기가 되자 많은 사람이 그를 영국의 가장 위대한 외교장관 중 한 사람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키신저의 평판도 유사한 경로를 따를 것이다. 지난 수십 년 동안 미국의 전직 국무장관들과 국가보좌관들이 쓴 회고록을 통틀어 보더라도, 어려운 외교정책 결정을 둘러싼 정교한 역사적, 철학적 환경을 드러내는 키신저의 책이 분명 가장 광대하고 가장 큰 지적 자극을 준다. 키신저는 그를 비판하는 대부분의 인물들보다 일반 독자들을 위한 글을 훨씬 더 잘 썼기 때문에, 결국 칼자루는 그가 쥐게 될 것이다. 단순한 폭로는 대개 자신이 처한 비극적 상황을 인식하고 더 큰 사건의 양식과 그것을 연결 지을 능력을 가진 경세가의 작품보다 서가에서 짧은 수명을 누린다. 정부에서 일한 경험을 가진 나의 한 동료가 나에게 말하기를, 키신저는 유럽식 현실주의자로서 대다수의 자칭 도덕주의자들보다 도덕성과 윤리에 대해 더 깊이 생각했다고 했다. 유리한 세력균형으로 전쟁을 회피하려는 현실주의는 외교정책에 있어서 궁극적인 도덕적 야심을 담고 있다.

내가 평생 목격한 가장 위대한 인도주의적 행동은, 발칸반도에 대한 성공적인 개입을 제외하면, 키신저가 설계한 1972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중국 방문이었다. 진정한 중국은 대만이라는 인식을 버림으로써, 소련으로부터 보호받을 길을 중국에 제시함으로써, 그리고 경제적으로 부흥하는 일본이 중국을 위협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을 제공함으로써, 그 두 사람은 중국이 평화로운 경제발전에 전념할 수 있는 자리에 서도록 도와주었다. 그 후 등소평이 촉진한 중국의 경제적 상승은 아시아의 큰 부분을 빈곤에서 건졌다. 그리고 극동 지역에서 10억 명 이상이 생활수준의 극적인 향상을 경험하면서, 개인의 자유가 꽃피었다.

전문가들은 키신저가 1973년 소련으로부터의 유태인 이주를 가리켜 "미국의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쥬이쉬 데일리(The Jewish Daily)의 J.J. 골드버그(J.J. Goldberg)는 (심지어 이 주제에 관한 키신저의 냉소주의를 매우 비판적으로 다루면서도) "집단 이주는 키신저의 데탕트 정책 하에서 극적으로 증가"했지만 개방적 이민정책을 미-소 간 통상관계 정상화의 사전조건으로 삼은 잭슨-배니크(Jackson-Vanik) 법이 1974년 통과되면서 "급락"했다는 점을 인정할 만큼 신중했다. 그는 소련이 미국인들이 자기네 이민 정책을 좌우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 전보다 출국 비자를 더 적게 발급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을 지적했다. 다시 말해, 키신저의 현실주의는 인권 문제를 다루는 데 있어서 유태인 단체의 인도주의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키신저는 공화당이 때때로 반유태주의적 성향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의 민주당보다 미국을 더 잘 수호할 수 있다는 유쾌하지 못한 진실을 인식했던 유태 지식인이다. 민주당이 패배주의와 사이비 고립주의에 의해 침식되고 있던 냉전 시기에 공화당은 미국의 힘의 투사가 가지는 의미를 이해하고, 사실 그것을 즐기기까지 했기 때문이다. (키신저 식 현실주의가 이제 공화당에서보다 버락 오바마의 백악관에서 더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은 오늘날의 공화당원들이 자신들의 핵심적 가치에서 얼마나 멀리 표류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키신저는 그의 냉전 시대 동료 공화당원들—속 편하게도, 명망 있는 지적 논설지들이 자신들에 대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는 따분하고 실질적인 사업가들—과는 달리, 자신이 어느 정도로 미움을 받고 있는지 언제나 고통스러울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수백만 명에게 영향을 미치는 삶과 죽음의 결정을 내렸고, 그 결정에는 많은 너저분한 도덕적 타협이 수반되었다. 그러나 만일 닉슨, 포드, 키신저가 내린 어려운 결정이 없었더라면, 미국은 기량이 부족한 카터의 한바탕 도덕주의적 통치로 야기된 피해를 이겨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로널드 레이건은 윌슨주의(Wilsonianism)를 성공적으로 실행하는 사치를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헨리 키신저의 고전적 현실주의—그의 책들과 그의 국정운영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는 감정적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더라도, 분석적 사고로 보면 영원한 가치를 지닌다. 공화당원들이 외교정책에 관한 그의 감각을 얼마만큼 회복시키느냐가 그들의 재집권 전망을 결정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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