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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s with Charley

posted Jul 04,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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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vels with Charley: In Search of America

- 1962, John Steinbeck, Penguin non-classics

 

    노벨문학상 수상자 존 스타인벡과 함께 북미대륙을 왕복 횡단하는 여행 패키지를 소개한다. 스타인벡이 손수 숙박용으로 개조한 트럭에 애완견 '찰리'를 태우고 미국을 횡단하며 쓴 여행기 <Travels with Charley>를 읽는 것이다. 몸소 여행의 달콤한 피로를 느끼며 눈으로 풍광을 볼 수는 없는 대신 존 스타인벡의 내면을 엿보면서 그의 식견을 빌려 덧쓰고 그걸 통해 미국을 바라보게 되는 여행인 셈이다. 모든 여행기는 대리체험이다. 저자의 정신에 빙의(憑依)되어 그의 눈높이에서 낯익은 세상을 새롭게, 또는 낯선 세상을 경이롭게 바라보기.

 

    스타인벡은 이 책을 통해서 1960년의 미국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저자가 서두에서 자신의 여행벽을 담담히 서술한 부분은 스스로 역마살을 지녔다고 믿는 많은 사람의 가슴을 고동치게 만든다. 나와 마찬가지로 이 도입부를 특별히 좋아한다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When I was very young and the urge to be someplace was on me, I was assured by mature people that maturity would cure this itch. When years described me as mature, the remedy prescribed was middle age. In middle age I was assured that greater age would calm my fever and now that I am fifty-eight perhaps senility will do the job. Nothing has worked... In other words, I don't improve, in further words, once a bum always a bum. I fear the disease is incurable."

 

    2006년 여름, 나는 식구들과 함께 자동차로 미국대륙을 좌우로 횡단하고 여행기를 끄적여본 적이 있다. 이 책을 그 후에 읽은 것은 다행이었다. 첫째, 나의 여행경로와 상당히 흡사한 스타인벡의 여정을 감상하는 독서는 한결 더 친근한 체험이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둘째, 이 책을 먼저 읽었다면 감히 여행기를 써볼 엄두를 내기가 어려웠을 터이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에게는 스타인벡처럼 자신이 보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생생하게 보이도록 전달할 文才가 없다. 게다가, 나의 여행은 스타인벡처럼 4개월간에 걸친 것도 아니었고, 그만큼 미국을 잘 알지도 못하고, 개 한 마리만 데리고 적당량의 고독을 누린 여행도 못되었으니, 여행의 밀도만으로 따져도 그에 비견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스타인벡 자신도 인생의 황혼기인 58세에 심장병을 안은 채 혼자서 트럭을 운전하면서 대륙을 가로지르는 여행이 무모해보일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돈키호테가 되기로 마음먹고 집을 나선다.(자신의 트럭을 “로시난테”라고 이름 붙인다.) 이 글을 쓴 지 8년 뒤인 그는 결국 지병인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꼭 노벨상 수상작가여서가 아니라, 누군가 죽음을 예감하면서 생전에 마지막으로 꼭 해보고 싶었던 모험을 결행한 기록이 어찌 감동스럽지 않으랴. (심지어 영화 <Bucket List>가 그렇듯이.) 스타인벡은 여행기에 그런 비장함을 과도하게 드러내진 않고 있지만, 이 책의 독자들은 저자가 이 여행에 많은 것을 걸었다는 점을 느낄 수 있다.

 

 

     "I've lost the flavor and taste and sound of it. I'm going to learn about my own country. ... I was writing of something I did not know about, and it seemed to me that in a so-called writer this is criminal."

 

    그는 주를 가로지르는 고속도로들을 피해 더러 사람들과 접촉하거나, 또는 더러 인적이 드문 길을 일부러 택한다. 그가 이 여행에서 도달하려는 목적지는 도시가 아니라 미국의 모습을 발견하는 자신의 가슴 속에 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혼자서 국토를 순례하며 기록한 작가 김훈의 여행기가 스타인벡의 여정을 연상시켰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두 점 사이를 잇는 최단거리가 언제나 그 점들을 잇는 직선으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반문화의 전성기인 60년대에 쓰여진 글 답게, 그리고 <분노의 포도>의 작가가 쓴 글 답게, 이 여행기는 문명의 진보에 대한 신뢰나 공동체의 장래에 대한 믿음직한 낙관은 좀처럼 보여주지 않지만, 스타인벡은 그만의 방식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또는 사랑했던) 조국의 모습에 대한 애착을 드러낸다. 선사시대 이래로, ‘스러져가는 전통’에 대한 아쉬움을 가지지 않았던 지식인이 있었으랴. 사라지는 예전 것들에 아쉬움을 느끼고, 아직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지 않은 새로운 것들에 대한 적개심을 느끼는 감상은 어쩌면 황혼기에 접어든 보통사람의 인지상정인지도 모른다. 오래전 위대한 정신 프란시스 베이컨은 이렇게 쓰지 않았던가.

 

     사람은 누구나 자기 고유의 동굴로써 자연의 빛을 굴절시키거나 변색시킨다. ... 어떤 성향은 낡은 것을 한없이 탄미하며, 어떤 성향은 새로운 것을 열심히 받아들인다. 다만 소수의 사람만이 공정한 중용을 지켜, 고대인이 정확히 수립한 것을 파괴하지도 않고, 근대인의 정당한 혁신을 멸시하지도 않는다.(노붐 오르가눔, 베이컨)

 

    1902년 태생인 스타인벡은 고학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스탠퍼드대학교 생물학과에 진학했으나 학자금 부족으로 중퇴하여 학위는 받지 못했다. 그 뒤 뉴욕에서 신문기자 일과 갖가지 막노동으로 생활하며 글쓰기를 시작했다. 그의 여행기는 자신의 이력이나 작품들과 더없이 잘 어울리는 솔직한 향취를 담고 있다. 비록 작품들을 통해서 큰 대중적 영향을 미치긴 했어도, 스타인벡의 정치관은 (그의 변덕스러운 행적이 보여주듯이) 소박한 것이었다. <Travels with Charley>에서는 그 소박함을 작가의 연륜이 서리처럼 덮고 있고, 아래로는 따사로운 애정이 깔려 있는 덕분에 솔직하되 경박하지는 않다. 하기사 죽음을 예감하는 어느 누가 경박할 수 있으랴. 포도주로 치자면 이 책은 흙의 향기(terroir)가 살아있는 한 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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