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uture of Freedom

posted Jun 16,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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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uture of Freedom: Illiberal Democracy at Home and Abroad

- 2003, Fareed Zakaria, W.W. Norton & Co Inc.

 

    다수는 항상 옳은가? 말도 안 되는 소리. 확률상 다수가 언제나 틀릴 가능성은 낮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은 다수가 독립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할 때의 이야기다. 요즘처럼 다수가 빠른 미디어와 인터넷, 무선통신망으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을 때, 다수는 한꺼번에 광기와 오류에 휩쓸릴 가능성이 과거 어느 때보다도 크다. 이런 상황하에서 민주주의는 우리를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어주기 보다 광기와 오류의 재단에 바쳐지는 제물이 될 가능성이 큰 것이다.

 

    20세기 인류의 지성이 빠져 있던 자기기만 중 한 가지는 민주주의가 수단이 아닌 목적이라는 믿음이었다. 민주주의 그 자체를 목적으로 삼아 이루어진 수많은 실험들이 처참한 실패로 돌아가는 것을 목격하면서도 그런 믿음은 좀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정치제도에 대해 진지한 성찰을 거치지 않고 민주주의의 본질을 꿰뚫어 보기란 쉽지 않다. 하이예크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법 앞의 평등은 모든 인간의 제도에서 동등한 지분을 가지는 것이 마땅하다는 요구로 연결된다. 전통적인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운동이 만나는 지점이 바로 여기이다. 그렇지만 양자의 관심사는 상이하다. 오르테가 이 가셋트에 의하면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는 두 개의 완전히 다른 물음에 대한 두 가지 답변이다. 민주주의는 공권력을 누가 행사해야 하는가에 대해 실체로서의 시민들이라 답하지만, 공권력의 범위가 어떠해야하는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모든 사회적 행위에서 우리가 군주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편 자유주의는 공권력행사의 한계는 무엇이어야 하는가에 대해 개인들이 국가의 어떠한 개입보다도 위에 서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두 이념의 대극 체제를 보면 민주주의에는 전제적인 정부가, 자유주의에는 전체주의가 맞선다. 두 체제는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혹은 ‘자유주의적 전제주의’ 또 ‘자유주의적 민주주의’ 식으로 상호 조합될 수 있다. 민주주의는 하나의 방식인 만큼 통치의 목표에 대해 가리키는 바가 전혀 없다.”(The Constitution of Liberty, F. Hayek)

 

    민주주의는 평화와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기 보다는, 평화와 번영의 결실인 것이다. 인도출신의 미국 언론인 파리드 자카리아는 오늘날의 민주주의가 자유주의와 결별하고 있는 기미를 알아챘다. Newsweek International의 편집자이면서 Washington Post의 컬럼니스트이기도 한 그는 2003년에 출간한 역저 <The Future of Freedom: Illiberal Democracy at Home and Abroad>를 통해서, 경제적 자유화 조치들이나 법의 지배가 선행되지 않은 곳에서 시행되는 민주주의는 결국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로 귀결되고 만다는 점을 설명한다. 그는 “비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선거와 전제주의가 결합된 통치형태”라고 정의한다.

 

    역사상 민주주의는 법의 지배, 재산권, 사적 계약, 개인적 자유 등 입헌적 자유주의가 보장된 이후에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적 전제정치로부터 발전해올 수 있었다. 여기서 핵심은 한 사회가 누리는 자유의 총량이 점차적으로 증진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대목에서 그는 자유의 장래를 우려한다. 심지어 미국에서조차, 정부와 정치 엘리트들이 실패를 거듭함으로써 사회의 자유주의적인 기반을 저해하고 있는 현상을 걱정하는 것이다.

 

    오늘날 세계 도처에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스스로의 성공의 희생물이 되어갈 징조를 보이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개인의 자유와 달리, 한 사회 전체가 누리는 자유의 총량을 늘이기 위해서는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용의 덕이라고 불렀던 절제가 필요하다. 다음 세대가 누릴 결실을 증가시키기 위해 자원을 장기적으로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능력, 눈에 두드러지는 논쟁적 의제 뒤에 감춰진 숨은 안건들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능력, 보다 중요한 공동체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일정한 손실을 감수할 수 있는 의지, 배타적 감정이나 질시 등과 같은 원초적인 외부효과들을 이겨낼 수 있는 냉철한 지성 같은 것들이 필요하다. 불행히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는 이러한 조건들을 갖추지 못한 말초적인 정치참여행위를 점점 더 쉬운 것으로 만든다. 인터넷을 통한 익명의 의사소통처럼 신뢰감을 결여한 접촉의 증대는 진정한 소통을 가능케 하기보다 수인의 양난(prisoner's dilemma)을 상시적으로, 또 거대규모로 확대시킨다. 누구에게도 책임지지 않는 거대언론이 누리는 설득과 정죄와 심판의 권력도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다.

 

    자카리아는 자유주의적 민주주의의 육성에 성공한 남한의 경험을 대표적인, 그리고 드문 성공사례로 꼽고 있다. 그런 스스로의 과거를 긍정하기보다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큰 우리 사회에서 자유의 장래는 과연 얼마나 밝은 빛을 던져주고 있는가? 지금 우리는 디지털 정치참여라는 사상초유의 실험을 통해 포퓰리즘이라는 비자유주의의 금자탑을 드높게 쌓아올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