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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posted Jul 17,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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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67
찬호께이(陳浩基), 강초아 역, 한스미디어

우리나라에서는 문인들은 물론 일반인들 사이에서도 추리소설이나 과학소설 같은 장르 문학을 이른바 ‘순수 문학’보다 낮추어 보는 습관이 있다. 마치 호텔 종업원들이 손님들이 몰고 온 자동차를 보고 손님의 격을 함부로 짐작하고, 그에 따라 접대의 격을 달리 하는 것과 흡사한 천박한 습관이 아닌가 싶다. 그에 더하여, 모진 현대사를 겪은 탓인지 문학의 정치적 지향점을 작품에 대한 평가에 덧대는 저열한 습속에마저 물들어 있다. 그런 탓에 한국 작가들은 독자를 계몽하려는 유혹에 쉽게 빠진다. 하지만 계몽적인 사명에 짓눌리는 순간, 거기 짓눌린 작품의 품질은 낮아질 수밖에 없다. 작가는 무릇 교사나 강사와 달라서, 그가 치려야 하는 전쟁은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어야 한다. “문학은 문학적으로 올바를 때만 정치적으로 올바르다”는 발터 벤야민의 경구는 깊이 새겨들을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니, 겉멋 들린 독자들로부터 간단히 폄하당하는 장르문학, 또는 심지어 만화 가운데서 근년에 출간된 그 어떤 국내 순수문학작품보다 뛰어난 완성도를 갖춘 작품을 만나게 되면, “뭣이 중헌지”를 제대로 본 속 시원한 쾌감을 느끼게 된다. 만화 중에서는 최근에 읽은 요시다 아키미(吉田秋生)의 <우미마치(海街) 다이어리>, 요시노 사츠키(ヨシノサツキ)의 <바라카몬(ばらかもん)> 같은 만화들이 복선과 사건과 대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인간관계의 섬세한 결이 그런 식의 감동을 주었다.

<13.67>은 서로 이어지는 여섯 편의 단편을 묶어 낸 형식의 장편 추리소설이다. 작가 찬호께이는 홍콩에 살면서 타이완에서 활동하는 추리소설가인데, 컴퓨터공학도 출신이라고 한다. 2011년 첫 장편 추리소설 <기억하지 않음, 형사>로 제2회 시마다 소지 추리소설상을 받았는데, 시마다 소지는 심사평에서 “무한대의 재능”이라는 찬사를 보냈다고 한다. <13.67>은 2015년 타이페이 국제도서전 대상을 수상했다. 홍콩 작가가, 그것도 이른바 ‘대중문학’ 작품으로 대상을 받은 것은 전례 없는 일이라고 한다.

각 단편의 완성도도 높지만, 특이한 것은 이 소설을 이루고 있는 여섯 편의 단편이 현재에서 시작해 과거로 거슬러 가는 역행의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소설의 제목은 최초의 사건이 일어난 1967년과 최후의 사건이 일어난 2013년을 의미한다. 만약에 단편들을 시간 순서대로 배열했다 하더라도 적잖은 감동을 주었을 이 장편소설은, 역행의 구성을 통하여 독특한 시간여행의 경험을 독자에게 선사한다.

“추리소설에 익숙한 독자라면 대게 ‘본격 추리소설’과 ‘사회파 추리소설’의 구분에 대해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전자는 미스터리와 트릭을 위주로, 단서를 바탕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논리적 재미에 중점을 둔다. 후자는 사회현상을 반영한 인간의 본성을 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데 더 중점을 둔다. 나는 원래 순수 본격 추리소설의 이야기를 쓰려고 했다. 하지만 방향을 틀고 나니 좀 더 사회 묘사에 치중하게 됐다. 양자의 성질이 완전히 상반되는 것은 아니지만, 혼합하기가 간단한 일은 아니다. 쉽게 한쪽 분위기로 쏠리게 된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또는 회피하기 위해서라고 해도 좋다) 나는 다른 방식의 글쓰기를 선택했다. 이 작품은 여섯 개의 독립된 단편 본격 추리소설로 구성되어 각 편은 미스터리의 논리적 해결을 주 노선으로 하지만, 여섯 편을 연결시키면 한 편의 완정한 사회파 추리소설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미시적으로는 본격 추리이고, 거시적으로는 사회파 작품이 되는 것이었다.”(작가의 후기 중에서)

여섯 편의 단편의 시대 배경이 46년 간 홍콩 사회에서 전환점이 되었던 때이기 때문에, 이 소설은 홍콩이라는 도시의 시계열적 전모를 바라보는 데 도움을 준다. 도시의 모습과 그것을 둘러싼 정치경제적 상황이 바뀌면서 범죄의 양상도 바뀌고 경찰의 모습도 바뀐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플래쉬백(flashback)’과 ‘프리퀄(prequel)’의 장점을 더 또렷이 알게 되었다. 영화 <Irréversible>이라는 2002년 프랑스 영화를 보면서는 역행의 구성이 불필요한 잔재주로 느껴졌는데, 그것을 잘 사용했을 때 어떤 미학적 충격이 오는지도 더 잘 경험할 수 있었다.

세르지오 레오네 (Sergio Leone) 감독은 1920년부터 1968년에 이라는 대하드라마 <Once Upon a Time in America>(1984)를 6시간 분량으로 만들어 3시간짜리 두 편으로 상영하고 싶어 했다. 제작자 측의 요청을 받아들여 눈물을 머금고 229분으로 줄이기는 했는데, 결국 미국 영화관에서 상영된 것은 제작자측이 멋대로 더 가위질을 한 144분짜리 영화였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래쉬백을 모두 시간 순서대로 재편집했는데, 그것이 얼마나 야만적인 처사였는지도 새삼 실감이 난다. 그 때문에 레오네 감독의 마지막 걸작이 되었어야 마땅할 이 영화는 비평가와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아카데미 후보에도 전혀 오르지 못했고, 뒤늦게 229분짜리 DVD가 출시되고 나서야 정당한 평가를 받았다.

잘 만든 프리퀄의 대표작으로는 <The Godfather 2>를 들 수 있다. 관객의 뇌리에 깊은 인상을 심어준 말론 브란도의 연기가 없었더라면, 돈콜레오네의 젊은 날을 연기한 로버트 드니로의 인상깊은 연기도 별다른 의미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프리퀄을 통해 우리가 흥미를 느꼈던 인물의 숨겨진 과거를 앨범을 들추듯, 편지를 읽듯, 또는 심지어 시간여행을 하듯 알면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관객이 캐릭터와 ‘깊이 사귀게’ 되는 독특한 방식이다. 찬호께이는 <13.67>에서 각각의 프리퀄들을 영리하게 사용하여, 심지여 검정색 페디큐어나 야구모자 같은 시시한 물건마저도 독자들이 “로버트 드니로 연기에 감탄하듯”, 앗, 하고 다시 바라볼 수 있도록 만들었다. 덕분에 그저 미리 정해진 역사의 험로를 걷고 있는 것처럼 심드렁하게 보이던 홍콩의 역사가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생생한 이야기로 되살아나 우리에게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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