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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We wish to inform you that tomorrow we will be killed with our families: Stories from Rwanda)

posted Jul 15,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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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우리 가족이 죽게 될 거라는 걸, 제발 전해주세요! (We wish to inform you that tomorrow we will be killed with our families: Stories from Rwanda)
- 1998, Philip Gourevitch (2011, 강미경 역, 갈라파고스)

급변하는 국제정세를 외면하고 왕정을 유지하다가 강산이 몇 번이나 변하도록 외세의 식민 지배를 당한 나라. 독립 후에는 전 세계가 놀란 규모로 살상의 비극을 경험한 나라. 그 다음에는 전 세계가 놀란 속도로 발전을 이루고 있는 나라. 작은 국토의 대부분이 산지로 이루어진 나라. 평방킬로미터당 450~500여명의 조밀한 인구밀도를 가진 나라. 대대로 농업국가였지만 근래에는 ICT에 대한 집중투자로 탈근대의 파도를 멋지게 타보겠다는 전략을 추구하는 나라. 불행히도 이렇다 할 지하자원조차 없는 나라. 그러나 그 불행을 근면과 교육열로 돌파하려는 열의를 지닌 나라.

이 설명은 우리나라에 관한 것이기도, 르완다에 관한 것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중동부에 위치한 르완다의 면적은 경상남북도를 합친 것과 비슷하다. 2015년 현재 인구는 대략 1200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해발 1500미터 이상의 고지대라서 적도 인근임에도 연중 온화한 기후이고 산과 언덕이 많아 르완다인들은 자기 나라를 “상춘의 나라(land of eternal spring)” 또는 “천개의 언덕의 나라(land of a thousand hills)”라고 부른다. 이 살기 좋은 땅에서 1994년 4~7월 약 100일 동안 당시 인구의 1/10에 해당하는 100만 명이 살상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길고 복잡한 이야기를 거칠고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렇다. 드넓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고대로부터 중앙집권적인 왕국이 존재했던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온화한 자연 환경의 혜택을 입은 르완다는 고대부터 왕국이었고 투치족, 후투족, 트와족이 나름의 질서를 갖추고 공존하고 있었다. 트와족은 부시맨 같은 소수 피그미족에 해당하지만, 투치와 후투는 당초에는 지배층과 피지배층을 가리키는 명칭에 가까웠던 것으로 보인다. 소를 10마리 이상 소유하면 투치가 되었는데, 소를 잃은 투치는 후투가 되고 소를 많이 가지게 된 후투는 투치가 되었다고 한다. 제국주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1884년 독일의 식민 통치가 시작되었고, 독일이 1차대전에서 패배한 후 1919년부터 벨기에의 위임통치가 시작되었다. 벨기에는 주민들에게 신분증을 발급하면서 투치와 후투를 세습되는 종족 구분으로 고착화시켰고, 기득권 세력인 투치족을 앞세워 나라를 다스렸다. 심지어 투치족은 셈족과 뿌리가 같은 별개의 종족이라는 “함족 신화”를 기정사실화 하여 종족간의 골을 깊게 만들기도 하였다. 그러다 보니 1962년 르완다가 독립할 때까지, 르완다의 독립투쟁사는 후투족의 반투치 투쟁 역사와도 겹친다. 독립 후부터 다수 후투족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었고, 투치들에 대한 박해와 집단 살해가 종종 벌어졌다. 이러한 종족간의 긴장이 높아지다가 절정을 맞은 것이 1994년의 제노사이드다.

당시 “후투 파워”라고 부르는 인종주의적 세력은 출판물과 라디오 방송을 통해 “투치 바퀴벌레들을 척살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끈질기게 전파했고, 하비아리마나 대통령 암살(비행기 격추)을 계기로 “인테라함웨(Interahamwe)”라는 후투족 민병대가 중심이 되어 투치족과 그에 우호적인 후투족을 대상으로 피의 광란을 벌여 100만 명 가까운 무고한 민간인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다. 정글칼로, 창으로, 총으로, 주먹과 망치로.

뉴요커(New Yorker)지의 저널리스트 필립 고레비치는 1995년에 르완다를 방문하여 한 해 전에 벌어진 비극의 실체가 무엇이었는지를 꼼꼼히 살핀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수준의 탐사보도가 왜 없는 것일까? 우리 언론의 풍토와 지적인 게으름 양쪽에 다 원인이 있겠지만, 그 원인이 무엇이건 간에 한없는 아쉬움을 준다. 르완다의 실상에 관해 눈을 밝혀주는 이 책을 읽고 나면 그런 아쉬움은 더 진해진다. 온당하게도, 고레비치는 식민지의 독립 이후 정치적으로 무책임했던 국제사회의 태도에서 비극의 뿌리를 찾는다.

    “(1973년) 하비아리마나가 단독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어처구니없게도 99퍼센트의 득표율로 당선된 뒤 제2공화국 수립을 선포하고 전체주의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비단 투치족만 피해를 본 것은 아니었다. 전 대통령의 측근이 북서쪽에 있는 자신의 집 지하실에 숨어 있다가 무자비하게 끌려나왔고, 남쪽의 후투족도 갈수록 소외감을 느꼈다. 새 정권 아래서도 농촌 지역 후투족은 여전히 투치족 못지않게 고초를 겪었다. 더구나 하비아리마나가 식민 정부 시절의 그 지긋지긋한 강제 노역 동원령을 부활시키면서 그들의 처지는 더욱 열악해졌다. 물론 사람들은 전국 어디에나 있는 MRND 당원들이 불러내면 정치 '만화'와도 같은 시끌벅적한 대중 집회에 나가 대통령을 지지하는 구호를 외치며 춤을 추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억지 환호로는 르완다 사회 곳곳에서 고조되는 정치적 불만을 가릴 수 없었다. 하비아리마나가 재임하는 동안 르완다의 경제 사정은 전체적으로 조금 나아지긴 했지만 절대 다수가 여전히 극심한 빈곤에 허덕였다. 그런 와중에도 절대권력자인 대통령과 그 측근들은 엄청난 부를 쌓았고, 국민들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르완다인들에게는 예전부터 그런 현실이 익숙한 광경이었지만, 국제원조 단체들이 보기에 르완다는 식민 통치에서 벗어난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 비하면 에덴동산이나 마찬가지였다. 아프리카 대륙 어디를 둘러보나 냉전 시대의 열강을 등에 업고 약탈과 살인으로 국가를 다스리는 독재자가 즐비했고, 독재에 저항하는 반군들은 백인 개발 담당자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반제국주의 구호를 소리 높여 외쳐댔다. 하지만 르완다는 북서쪽의 휴화산들처럼 조용했다. 도로 여건도 좋았고, 교회 출석률도 높았으며, 범죄율도 낮았고, 공중위생과 교육수준도 꾸준히 높아지고 있었다. 만일 우리가 해외 원조 예산을 집행한다면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늘어놓는 능력보다는 매년 회계 연도를 마감할 때마다 누구나 만족할 만한 통계 보고서를 제출하는 능력에 따라 전문 관료로서의 성공 여부가 판가름 날 것이다. 그런 곳으로는 르완다가 제격이었다. 벨기에는 옛 식민지에 돈을 쏟아부었고, 프랑스도 아프리카에 프랑스어권 국가를 늘린다는 신식민주의 정책에 따라 1975년부터 하비아리마나 정권에 군사 원조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또한 다른 어떤 나라 못지않게 르완다에 개발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이 밖에 워싱턴, 본, 오타와, 도쿄, 바티칸시티도 키갈리와 자매결연을 맺고 구호금을 보내왔다. 르완다 산지마다 은연중에 하비아리마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젊은 백인 일꾼들이 북적였다.“ pp96-97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에서 벌어진 사건이지만, 1994년의 제노사이드는 인간사회의 잔학성에 관해 깊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지리적으로, 문화적으로 먼 나라라고 해서 이 사건을 마치 “미개한 토인들이 무슨 이유에선지 서로를 죽이고 죽은” 사건이라는 식으로 취급한다면 가해자와 같은 반열에 서고 마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배경과 원인을 꼼꼼히 따져봐야 하고, 보편적인 도덕적 교훈을 이 사건으로부터 끌어내야만 한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모든 시대에 모든 나라에 중요한 일이다. 불과 한 세대 전 동족상잔의 전쟁을 경험하고 분단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는 아마도 더욱 중요할 것이다.

    “르완다인들은 조금이라도 농지로 사용할 수 있는 땅은 모조리 개간해 사용했다. 이는 르완다의 인구 밀도가 얼마나 높았는지, 또 그 때문에 자원을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이런 이유로 제노사이드가 주로 경제적인 동기 때문에 일어났다는 주장이 심심하지 않게 제기된다. 즉 "전리품은 승자에게 돌아간다"라거나 "우리 둘기 살기에는 너무 좁다"라는 논리를 내세우며 살인이 마치 다윈식의 인구 조절 기능을 한 것처럼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몇몇 살인자들의 경우에는 물질적인 이익과 거주 공간의 확대가 살인의 동기였다. 하지만 방글라데시를 비롯해 지독하게 가난하면서 인구 밀도까지 높은 나라가 지구상에 많은데 그런 나라에서는 어째서 제노사이드가 일어나지 않았을까? 인구 과잉만으로는 수십만 명의 인구가 거의 100만 명에 가까운 이웃을 겨우 몇 주만에 모두 해치우기로 합의한 이유를 설명하기 어렵다. 사실 그 무엇으로도 그 이유를 온전히 설명할 수는 없다. 물론 식민지 이전 시대의 불평등, 철저한 위계질서에 입각한 중앙집권제, 함족 신화, 벨기에의 통치 아래 불거진 종적 양극화, 1959년 후투 혁명과 더불어 시작된 살인과 추방, 투치족 피란민들의 복귀를 거부한 하비아리마나의 정책, 다수당 체제의 혼란, 르완다 애국전선의 공격, 전쟁, 후투 파워의 극단주의, 선전.선동, 관행처럼 빈번하게 일어나던 학살, 다량의 무기 수입, 권력 배분과 통합이 가져온 평화가 하비아리마나 과두 체제에 가한 위협, 극심한 가난, 무지, 미신, 압제 속에서 늘 기죽어 지내며 대부분 술에 찌들어 살아가던 소작농들의 두려움, 국제 사회의 무관심 등 조금이라도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요인을 모조리 찾아내 하나로 조합해 보면 제노사이드가 횡행했던 이유가 확연이 이해되면서 그런 사태는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결론 내리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구 열 명에 한 명꼴로 목숨을 잃은 그런 대규모의 학살이 일어날 만한 근거는 찾기 힘들었다.“ pp220-221

실제로 제노사이드의 도덕적 기준을 흐리려는 시도는 실제로 있었고, 21년이 지난 지금도 벌어지고 있다. 그와 같은 시도의 일부는 책임회피 때문에, 일부는 인종적 우월감 때문에, 일부는 추악한 정치적 의도를 가지고, 대부분은 무지와 무관심에서 벌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제노사이드 주동자들과 르완다 애국전선이 수립한 정부가 벌이는 전쟁이 질질 시간을 끌자 르완다의 이야기는 주로 다음과 같이 보도되었다. 예를 들어 <뉴욕 타임스>는 판에 박힌 특파원 보고 형식으로 '르완다에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기대하는 것은 헛된 노력'이라는 제목 아래 투치족 군인들의 공격으로 불구가 된 후투족 피란민과 후투 파워 민병대의 공격으로 불구가 된 투치족 피란민의 모습을 보여주며 "어느 쪽의 손도 깨끗하지 않은 두 종족의 오랜 싸움이 낳은 희생자들"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이런 식의 신문 보도는 갈등을 벌이는 양측의 희생자가 똑같이 고통을 당하고 있기 때문에 어느 쪽도 지지를 받기 어렵다는 인상을 심어준다. <뉴욕 타임스>는 그 점을 더욱 분명히 하기 위해 르완다 권위자로 꼽히는 벨기에인 필리프 라인톈스의 다음과 같은 말을 인용했다. "이것은 착한 사람과 나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온통 나쁜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생략) 정치 폭력으로 발생하는 수많은 죽음은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정보의 주종을 이룬다. 일반적인 보도에 따르면 학살은 모두 똑같다. 죽은 사람들은 무고하고 살인자들은 악마이며, 그런 곳에서 정치는 미쳐 돌아가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세상 어디에서 일어나든 인명과 지명만 바꾸면 똑같은 이야기다. 권력을 손에 쥔 종족이 권력을 빼앗긴 종족을 학살하는 현실은 고대부터 내려온 증오심이 야기하는 악순환의 하나일 뿐이며, 많은 것이 바뀌면 바뀔수록 바뀌지 않는다는 것도 많다는 식의 논리다. 지진이나 화산 폭발을 보도하듯, 전문가들은 단층선의 존재와 압력 상승을 미리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 우리는 공포, 비애, 연민, 분노, 심지어는 무시무시한 환상에 시달리다가 생존자들에게 구호품을 보낸다. 일반적인 학살 이야기는 '그 지역 특유의' 또는 '전염성을 띠는' 폭력과, 사람들이 '서로를' 죽이는 곳을 언급한다. 이처럼 곳곳에 만연해 있는 폭력 사태는 각각의 사례를 곰곰이 생각해볼 기회를 앗아간다. 그런 이야기들은 무에서 갑자기 튀어나왔다가 순식간에 다시 무로 돌아간다. 익명의 희생자나 익명의 살인자는 어느새 우리와 상관없어지고, 공포는 무색해지고 만다.” pp227-229

국제사회에서는 종종 르완다 제노사이드의 수습과정에서 확인되지 않은 다수의 후투족을 살해한 투치족의 행위도 범죄로 다루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실례로 프랑스와 스페인의 일부 판사들은 카가메 대통령의 측근들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하기도 했고, 2015년 6월 공무로 영국을 방문한 카렌지 카라케 르완다 정보부장이 스페인이 발부한 영장에 기초해 영국 사법당국에 체포되는 사건도 일어났다. 르완다 제노사이드 상황을 종결시킨 투치족 민병대 (지금의 르완다 여당) RPF의 행위를 개별국가의 사법당국이 정죄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이 질문은 수단의 오마르 알바시르 대통령이나 케냐의 우후루 케냐타 대통령을 국제형사재판소가 정죄하는 것이 과연 타당하냐는 질문과 비슷한 면도 있고, 사뭇 다른 면도 있다. 적어도 의도적인 인종청소 시도에 대한 대항의 성격을 띠었다는 점에서, RPF의 전쟁 행위에 전쟁범죄라는 죄목을 적용시키는 데는 수단의 다푸르나 케냐의 나이바샤, 나쿠루 지역에서 벌어진 사건과는 구분해 보아야 할 부분이 있다. 고레비치도 이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국제사면위원회는 "한쪽에서 저지른 잔학 행위의 규모가 얼마나 크든 간에 다른 쪽에서도 그와 비슷한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라고 못박고 있다. 그런데 '그와 비슷한'이라는 표현은 제노사이드라는 상황에서 무엇을 의미할까? 잔학 행위는 잔학 행위일 뿐 절대 정당화될 수 없다는 뜻일까? 그렇다면 잔학 행위라는 말로 과연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 봐야 한다.
      남북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셔먼 장군은 북부 연방군을 이끌고 조지아를 지나 진격했다. 살인과 강간과 방화와 약탈로 온 땅을 초토화시켰던 이 군사 원정은 오늘날까지도 인권을 심각하게 유린한 본보기로 역사에 남아 있다. 역사가들은 만약 셔먼의 군대가 그런 잔학 행위를 저지르지 않았다면 당면한 전략적 목표를 성취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보지는 않는 듯하다. 하지만 북부 연방의 보존과 노예제 폐지가 국가의 이익에 반드시 필요했다는 데에는 대체로 이견이 없다. 따라서 역사가들은 셔먼의 진격을 북부 연방의 범죄성을 드러내는 증거라기보다는 북부 연방의 대리자들이 저지른 극악한 범죄 행위로 간주한다.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2차 세계대전 직후 몇 달 동안 전국적으로 불어닥친 인민재판의 광풍 속에서 만 명에서 만 5,000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파시스트의 공모자라는 이유로 살해되었다. 오늘날 당시의 일을 돌아보면서 그러한 숙청 작업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지금까지 프랑스 정부는 그 일에 대해 공개적으로 유감의 뜻을 밝힌 적이 없다. 스스로 인권의 탄생지로 여기는 프랑스는 당시 수많은 경찰관과 변호사와 판사와 더불어 유서 깊고 믿음직한 법률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프랑스는 지옥 같은 시련을 겪었고, 공모자들에 대한 신속한 처단은 민족 정신을 정화하는 행위로 널리 받아들여졌다.“ pp229-230

제노사이드의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는 개개인의 심리를 미시적으로 관찰하는 것도 중요하다. 고레비치는 엄격한 잣대를 들이댄다.

    “공무원이나 군인, 민병대, 일반 시민의 신분으로 살인에 참여한 사람들 가운데도 개인의 동정심 때문이든 경제적 이익 때문이든 성적인 목적 때문이든 투치족을 보호해준 이들이 적지 않았다. 밖에 나가 수시로 살인을 저지르는 사람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투치족 한둘을 자기 집에 숨겨주는 일은 사실 흔했다. 나중에 그런 사람들은 동료들의 이목을 따돌리고 이웃의 목숨을 구하려면 몇몇은 죽일 수밖에 없었다는 변명을 늘어놓곤 했다. 그들은 한두 번의 그런 관대한 행동이 자신의 범죄 행위를 상쇄해준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볼 때 살인자가 이따금 인정을 베풀었다는 사실은 그의 유죄를 입증할 뿐이었다. 왜냐하면 그런 사실 자체가 살인이 잘못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었기 때문이다.” p164

영화 호텔 르완다의 주인공 폴 루세사바기나는 이 기간 동안 천여 명에 가까운 투치족들이 목숨을 부지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제노사이드가 끝난 후 벨기에와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는데, 그가 현 정부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할 무렵부터 “폴 루세사바기나는 금전적 이득을 위해 투치 투숙객들을 갈취한 사기군”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기는 하지만, 적어도 그가 제노사이드에 동참하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인다.) 고레비치는 폴이 어째서 당시 분위기와는 다른 행동을 할 수 있는지 궁금해 한다. 그 대답은 그가 보통 사람처럼 행동했다는 것이었다. 보통사람처럼 행동한다는 것이 때로는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가.

    “벤체슬라스 신부만큼 나쁘게, 또는 그보다 더 나쁘게 행동한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이 아버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행동한 사람들이라 해도 자신을 낳아준 어머니를 결코 바퀴벌레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자신의 혈통을 거북하게 여기던 사람들이 모두 미친 듯이 날뛰며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나는 무엇이 벤체슬라스 신부를 그토록 나약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 그보다는 무엇이 폴을 그처럼 강하게 만들었는지가 궁금했다. 그는 나에게 그 이유를 말하지 못했다. 그는 "사실 저는 강하지 못했어요. 결코 그렇지 못했지요. 다만 나는 다른 사람들이 꺼리는 방법을 사용했다고 할까요"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중에야 그는 "사람들이 그때 일에 관해 말할 때" 비로소 자신이 보기 드문 행동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노사이드 당시에는 몰랐어요. 그때만 해도 나처럼 행동하는 사람이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요. 왜냐하면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그렇게 행동할 수 있다고 믿었으니까요."
      폴은 자유의지를 믿었다. 그는 제노사이드 기간에 자신이 한 행동을 개인의 선택으로 생각했고, 다른 사람들의 행동도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했다. 그는 자신이 의인으로 불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다만 다른 사람들이 범죄를 저지르는 바람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라고 생각했다. 사실 그는 그런 식의 비교조차도 거부했다. 그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다방면으로 노력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가 비참한 죽음보다 훨씬 더 두려워한 것은, 그의 표현을 따르면 "바보처럼" 살거나 죽는 것이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이는 것과 죽임을 당하는 것 사이의 선택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바꾸어 표현할 수 있다. '무엇을 위해 죽이고, 무엇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가?' 하지만 이런 질문은 당시 사람들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폴은 그토록 많은 동포들이 기꺼이 인간성을 포기하는 쪽을 선택했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pp177-178

제노사이드가 종식된 직후 르완다가 처한 상황은 처참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르완다인들은 고향과 조국의 재건과 복귀를 위해 체념하지 않았다.

    “평가 임무를 띠고 속속 도착한 국제 재난 전문가들도 이구동성으로 그렇게 황폐해진 나라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새 정부가 출범했을 때 국고에는 달러든 르완다프랑이든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게다가 대부분의 정부 사무실에서는 깨끗한 종이나 스테이플러 심은 물론이고 고장 나지 않은 스테이플러도 아예 찾아볼 수 없었다. 문이 남아 있어도 열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설령 차량이 남아 있어도 움직이지 않기 일쑤였다. 변소에도, 우물에도 죽은 사람들이 가득했다. 전기, 전화, 수도는 더 말할 나위도 없었다. 키갈리에선 하루 종일 폭발이 있었다. 누가 지뢰를 밟았거나 미처 터지지 않은 폭발물 잔해를 건드렸기 때문이다. 폐허 위에 임시로 세운 병원은 밀려드는 치료 요청을 감당하지 못했다. 교회, 학교, 그 밖에 도살장으로 사용되지 않은 공공시설은 대부분 약탈당했고, 약탈을 자행한 사람들은 대개 죽었거나 도망치고 없었다. 1년 동안 수확한 차와 커피는 온데간데없었고, 커피를 볶는 기계의 약 70퍼센트가 작동하지 않았다.
      상황이 이러하니, 조국을 떠나 난민으로 지내는 투치족들이 더 이상 귀향의 꿈을 꾸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부모와 형제자매들, 일가친척들이 모두 살육당했다는 소식을 듣고선, 제명대로 살려면 외국의 안전한 망명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하지 않겠느냐고. 그 사람들이 미치지 않으려면 르완다를 다시 '고향'이라고 부를 수 있는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영원히 접는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고. 하지만 해외 난민들은 피가 채 마르기도 전에 르완다로 꾸역꾸역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만 명이 르완다 애국전선의 바로 뒤를 따라 돌아왔고, 곧이어 수십만 명이 그 뒤를 이었다. 투치족 귀환자들과 도망치는 후투족 군중이 국경에서 서로 마주쳤다.
      아프리카 전역에서뿐만 아니라 저 멀리 취리히와 브뤼셀, 밀라노, 토론토, 로스앤젤레스, 라파스에서도 르완다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르완다 애국전선이 키갈리를 해방하고 나서 9개월 뒤, 망명해 있던 투치족 75만 명 이상이 (100만 마리에 가까운 소 떼와 함께) 르완다로 돌아왔다. 이는 사망자를 거의 대체하는 숫자였다... 사람들에게 돌아온 이유를 물어보면 그때마다 주로 누가 살았는지 보려고, 자신들이 도울 수 있는 일이 무언지 알아보려고 왔다는 대답이 나왔다. 그러면서 거의 매번 이렇게 덧붙였다. "고향이 오니까 좋아요." pp282-283

1994년 이후 르완다는 국가 재건의 과제를 매우 독특한 상황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었다.

    “현대사를 통틀어 다른 민족을 살육했거나 이른바 살육이라는 행위를 저지른 민족이, 고만고만하게 작은 공동체에서 살육당한 민족의 유족들과 완전히 뒤섞여 생활하면서 응집력 강한 국가 사회를 이루어야 했던 적은 일찍이 없었다.” pp366-367

    “후투 파워는 우리와 저들만 있는 세상을 창조했다. 게다가 르완다는 안에서 보든 밖에서 보든 여전히 후투족과 투치족으로 양분된 세상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표면 바로 밑에는 격자처럼 정교하게 짜인 하위 범주의 망이 자리하고 있었다. 즉, 훌륭한 후투족, 수상쩍은 후투족, 망명지의 후투족과 쫓겨난 후투족, 르완다 애국전선을 지지하는 후투족, 후투 파워도 반대했지만 르완다 애국전선도 반대하는 후투족, 그리고 북쪽의 후투족과 남쪽의 후투족 사이에 분포해 있는 기존의 파벌들이 있었다. 투치족의 경우에는 배경과 언어가 제각각인 망명자, 서로를 불신의 눈으로 바라보는 생존자와 귀환자, 르완다 애국전선에 소속된 투치족, 르완다 애국전선에 속하지 않은 투치족, 르완다 애국전선에 반대하는 투치족, 생존자로서나 귀환자로서나 서로 공통분모가 거의 없는 도시 생활자와 농촌 거주자가 있었다. 물론 서로 대립하는 하위 범주들은 이보다 훨씬 더 많았고, 그러한 대립 구도는 어느 순간 더욱 중요한 의미를 띨 수도 있었다. 배우자를 잃은 사람이 워낙 많은 데다 전쟁이 끝나고 르완다 애국전선 안에서 결혼이 허용되면서 놀라운 속도로 결혼한 남녀를 비롯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사회의 분화와 합병뿐만 아니라 씨족과 가족, 부자와 빈자, 가톨릭과 무슬림, 다양한 종파의 프로테스탄트, 은밀하게 정령 신앙을 믿는 무리가 있었다.
      너무 복잡해서 머리가 핑핑 돌 지경이었다. 심지어 르완다인들조차 그 관계망을 정확히 안다고 장담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은 전부터 알던 사람들과 계속 친하게 지냈고, 새로 적을 만들지 않는 이상 새로 친구를 사귀는 문제에 대해서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미국인인 나의 사고방식으로는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대량 학살범이라는 꼬리표를 붙이고자 했던 망상 때문에 철저하게 파괴된 나라가 그 어느 때보다도 다양한 집단을 아우르고 있다는 사실에서 어느 정도 희망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러려면 너무나 긴 안목이 필요했다.“ pp289-290

    “뉘른베르크 재판은 외국 정복자들의 힘과 도움으로 열렸고, 독일의 비나치화는 제노사이드를 겪은 사람들이 살인자 무리와 더는 섞여 살지 않아도 되는 상황에서 진행되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무력 투쟁이 막을 내렸고, 진실화해위원회는 싸움에서 패배한 그 나라의 백인 지배자들이 새 질서의 정당성을 이미 인정했다고 내다보았다. 하지만 르완다는 그렇게 깔끔한 정리를 내놓을 형편이 못 되었다. 1995년 내내 자이르에 본거지를 둔 후투 파워 군대의 게릴라 공격이 꾸준히 증가했다. 제노사이드 목격자와 생존자들을 노리고 자행되는 공격도 마찬가지였다.” pp309-310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르완다가 20년간 이룩한 성취는 눈부시다. 르완다는 세계은행이 2014년 발표한 기업환경평가에서 전체 189개 국가 중 32위를 차지했다. OECD 원조효과성 평가는 2011년 이래 최고등급을 유지하고 있다. 7% 이상의 경제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르완다의 방방곡곡은 감탄을 자아낼 만큼 깨끗하다. 그러나 르완다가 극복해야 하는 제노사이드의 상처는 아직도 현재형이다. 생존자 또는 희생자의 가족들이 가해자들과 여전히 한 마을, 한 도시, 한 나라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르완다라는 나라 이름은 Kwanda라는 르완다어에서 유래했다. “점점 커진다”는 의미의 동사다. 르완다가 이름처럼 “점점 커질” 수 있느냐 여부는 지금까지 극복한 어려움보다 오히려 더 어렵고 고단할지도 모르는 앞으로의 화합과 발전의 여정을 어떻게 소화해 내느냐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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