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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진 평전 / 로산진의 요리왕국

posted Sep 11,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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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산진 평전(신한균, 박영봉 지음, 아우라)

로산진의 요리왕국(기타오지 로산진 지음, 안은미 옮김, 정은문고)



금년초 일본의 식문화에 관해 책을 한 권 출간했다. 그런데 일본 음식에 관해 책을 쓰면서 기타오지 로산진(北大路 魯山人, 1883~1959)을 언급조차 하지 않은 것은, 이를테면 재즈의 역사에 관해 쓰면서 루이 암스트롱을 생략한 것보다 더 심각한 간과였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2015년 초여름 로산진의 수필 번역서와 로산진 평전이 국내에서 출간된 덕분이다. 서울에 있는 나의 지음지우가 이 두 권의 책을 아프리카로 보내주었다.

로산진은 일본의 서예와 전각, 도예에서 깊은 족적을 남긴 종합 예술인이었다. 정식 교육을 거치지 않고 다양한 분야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낸 위대한 아마추어인 셈인데, 오늘날까지 그의 영향이 가장 깊고 넓게 미친 분야는 요리다. 그가 창설하고 요리장으로서 활약했던 호시가오카샤료(星ヶ岡茶寮)라는 고급 요정은 그 규모나 질에 있어서 전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시설이었다. 이쯤 되면 혁신이라기보다는 발명이라는 수사를 동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는 이전에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식당을 꾸미고 운영했다.

두 가지 면에서 무릎을 치게 된다. 첫째, 천재적 종합 예술가가 요리로 이만한 성취를 이룬 다른 사례를 나는 알지 못한다. 다빈치 이래로 양의 동서와 시의 고금을 막론하고 다방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성취를 이룬 사례는 더러 찾아볼 수 있지만, 예술혼이 요리로 발현된다는 것은 특이하지 않은가? 요즘이야 셰프가 일등 신랑감인 세상이고 온갖 재능을 가진 사람들이 요리에 입문하고 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요리사는 계층적 함의가 있는 일종의 전문직(profession)으로 여겨졌다. 요리에서 발휘되는 장인의 노력(craftmenship)이 예술과 무리 없이 연결되었던 것은, 물건을 만드는 ‘모노즈쿠리(物作り)’를 매우 중시하는 일본문화 덕분에 가능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일본 사람들은 불에 굽기는 매한가지라 하여 구이 요리(주로 생선)도 야키모노(焼き物)라고 부르고, 도자기도 야키모노라고 부른다. 야키모노를 야키모노 위에 얹어 먹는 사람들에게 요리에 대한 열정이 도자기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진다는 것은 도리어 자연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로산진은 ‘그릇과 요리는 한 축의 두 바퀴’라고 선언하고, 음식은 반드시 ‘그 음식만을 위한 그릇’에 담아야 한다고 고집하면서 개인 가마를 만들어 도자기를 직접 만들었다.

둘째, 어떤 땅에 사는 사람들의 성정에 잘 들어맞는 일은, 뒤늦게 시작되었다 하더라도 마치 그것이 수 천년 간 거기서 이어져온 익숙한 일이었다는 듯이 깊고 빠르게 정착되기 마련이다. 오늘날 일본의 고급 식당들이 저마다의 방식으로 로산진의 요리 철학을 벤치마크하고 있다는 점에서, 로산진은 현대 일식의 아버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더구나 서구인들이 칭송해 마지않는 일식의 모습이 거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는 일식 세계화의 일등 공신이기도 하다. 음식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입구에서 주방이 훤히 보이게 구성해 주목을 받았던 호시가오카사료 긴자점의 구조는 이후 일본 요릿집의 기본 구조로 자리를 잡았다. 일본의 모노즈쿠리 정신에는 고품질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건 희생해도 좋다는 식의 광기 어린 집착이 서려 있다. 요리 분야에서 이러한 정신을 공공연히 선포하고 실현한 데 로산진의 진정한 공로가 있다. 로산진은 호시가오카사료를 운영하는 동안, 지진이건 화재건 전쟁이건 만난을 무릅쓰고 산간벽지 청정지역의 생선과 채소를 들어오는 수많은 에피소드를 만들었다.

「그는 손님의 예약 날짜와 시간, 수송 시간을 고려해 은어를 포획하는 시간까지도 지정해 주었다. 그런 다음 전용 자동차로 운송했다. 이처럼 최고의 재료를 가장 신선한 상태로 확보하려는 그의 노력은 상상을 넘어선다. 일본 최고 식재료의 하나로 꼽히는 후쿠이 현 와카사의 옥돔과 고등어는 배에서 잡는 순간 소금을 뿌리고서 가장 빠른 운송수단을 이용해 도쿄까지 운반했다. 또 효고 현 아카시 해협에서 잡히는 어류 중 지금도 유명한 것이 돔인데, 로산진은 싱싱한 회를 위해 그 돔을 비행기로 운송했다. 지금으로부터 90년 전에 말이다.」 <로산진 평전> p96

한 가지 매우 기묘하게 느껴지는 점도 있다. 로산진의 서예와 전각 실력은 체계적인 배움 없이 성취한 것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서도가들로부터 기본기가 없음을 질타당한 후, 독학으로 공부하여 서예대회에서 우승을 한 인물이다. 체계적인 훈련을 넘어서는 자유로움과 당당함을 지닌 필체. 그건 그럴 수 있다고 본다. 하지만 미식의 습관도 과연 그럴 수 있는 것일까? 로산진은 미식에 대한 자신감으로 가득 찬 인물이었다.

「사람들에게 욕먹을 각오로 고백하자면, 나만큼 미식 체험을 한 사람은 흔하지 않다. 아침부터 밤까지 수십 년 동안 한순간도 빠짐없이 입으로 맛보는 체험을 했다. 나에 버금가는 사람은 얼마 없다고 믿는다. 주제넘지만 세상이 넓다고는 하나 나 같은 미식가는 유일한 존재는 아니더라도 희귀한 존재라고 믿는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92

하지만 그는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나 음식을 어린 시절부터 마음껏 맛본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아래와 같은 그의 성장배경을 알고 보면, 미식에 관한 그의 오만함이 혹시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가식적인 허영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마저 든다.

「기타오지 로산진은 1883년 교토의 북부 가미가모 신사 부근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사의 샤케였는데 로산진이 태어나기 석 달 전에 세상을 떠났고, 사인은 자살로 추정된다. 재혼이었던 어머니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뱄던 일이 자살 이유로 거론되기도 한다. 로산진은 핫토리 요시토모라는 순사 집안에 양자로 들어가기 전에도 이 집 저 집 전전했다고 하는데 확인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요시토모의 행방이 묘연해지고, 두 달 후엔 로산진을 아껴주던 그의 아내마저도 병으로 죽고 만다. 요시토모의 자식들인 형과 누나가 한 살 정 도 된 로산진의 부모가 되었지만, 로산진이 다섯 살 되던 무렵, 아버지 역할을 하던 형이 정신이상으로 죽고 말았다. 누나가 두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을 때, 그녀의 어머니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로산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외손자만 호적에 올리고 로산진에게는 걸핏하면 '근본도 알 수 없는 놈'이라고 욕하며 회초리를 들었다. 할머니가 로산진을 학대한다는 소문이 나자 목판업을 하던 후쿠다 다케조와 그의 아내가 로산진을 정식 양자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생활이 크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고, 그저 한 그릇의 밥이나마 끼니마다 먹을 수 있게 된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그는 다케조의 슬하에서 목판 간판 작업을 도우며 전각을 배웠다. 그는 미술가가 되고 싶어했지만 미술학교 진학과 화가로의 길은 가난으로 인해 가로막혔다. 심한 근시로 병역을 면제받은 로산진은 스무 살때까지 양아버지의 목판업을 도왔다. 어느 날 나타난 백모가 친모의 행방을 알려주어 시조 다카토시 남작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고 있는 어머니를 찾아갔다. 그는 이렇게 회고했다. “어머니는 태어나자마자 헤어진 자식을 보고도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냉랭한 태도를 보였다. 왜 왔는냐는 듯한 표정은 무서울 정도였다. 어머니는 말없이 나가더니 기모노와 속옷을 사왔다. 한눈에 봐도 헌옷이었다. 그러고는 돌아가라고 했다.”」 (이상 로산진 평전 내용에서 요약)

그의 오만함에서 ― 굳이 자격지심이라고 이름붙이지 않더라도 ― 정체를 알 수 없는 적의가 깃든 어두운 그림자를 읽어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른 나라 음식을 함부로 폄하하는 그의 글에서는 “무식한 사람이 용감하다”고 해야 할 정도의 과도한 자기확신과 다른 문화에 대한 이해의 일천함이 드러난다.

「내 생각에 나쁜 재료를 가지고 어떻게든 해보려는 궁리 끝에 만들어진 것이 유럽과 중국요리이지 싶다. 따라서 다소 억지스럽고 좀스러우며 단조롭다 못해 괴상해서 설령 입맛에 익숙해져도 눈에 호소하며 기쁜 마음을 불러오는 아름다움은 바랄 수 없다.」 <로산진의 요리 왕국>p110

「내가 손수 시험해본 결과 프랑스 요리의 발달 양상은 어리숙하고 유치하다. 섬세한 노력, 우아한 매력이 느껴지는 '맛'은 결국 발견하지 못했다. 맛뿐만이 아니다. 눈을 기쁘게 하는 '요리의 아름다움'도 찾을 수 없으니 실로 씁쓸하기 그지없다. 미국처럼 새로운 나라는 그렇다 쳐도 프랑스나 이탈리아 같은 요리제국이 어찌 이 지경인지 놀라울 따름이다. 화려한 꾸밈새가 아예 없지는 않은데, 채제로 서툴다. 꼭 아이들 장난 같다.」 같은 책, p122

「파리 시민들은 좋은 물이 집에 없는지, 병에 든 물을 맥주보다 비싼 가격에 사 마신다. 그리고 육식을 즐겨함에도 좋은 쇠고기가 드문지, 양고기나 말고기를 주로 먹는다. 돼지는 가마쿠라에 맞먹는 장점을 갖고 있지만, 닭은 작은 편이라 요리 재료로 적당하지 않다. 게다가 어설픈 요리법으로 망치는 어패류는 품종이 일본에 비해 100분의 1, 2나 될까. 겨우 채소만이 제몫을 하고 있다.」 같은 책, p124

「조선은 새도 물고기도 도통 맛없는 곳이라 여겼기에 전에 경성에서 일할 때는 물론 이번에 체류할 때도 음식 때문에 고통스러웠다. 조선에는 물고기다운 물고기가 없다고 확신하던 차였다. 마산 근처에서 맛있는 도미가 잡힌다는 사실은 들어본 적도 없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이렇게 맛있는 도미를 만나다니.」 같은 책, pp131-132

「중국요리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중국요리가 발달한 까닭은 식도락 때문만은 아니다. 식재료가 부족한 점이 요리의 발달을 재촉했다.」 같은 책, p135

하지만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토록 터무니없는 그의 착각이 아니라, 그가 외골수로 실천한 스스로의 확신이, 언행이 일치되는 그의 삶으로 인해서, 엄청난 자기실현 능력을 발휘했다는 사실이다.

「자랑은 아니지만, 나는 모든 일을 최고 속도로 냅다 해치운다. 이런 나 때문에 주변 동료들은 눈이 핑핑 돌 정도로 이리 뛰고 저리 뛴다. 내 눈에는 다들 굼떠 보이니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뭔가 일에 활기가 없달까.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들은 나만큼 충분한 수면과 영양을 취하지 않는다. 또 별것 아닌 세상일에 지나치게 괴로워한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192

「‘요즘 많은 외국인이 일본에 회를 먹으러 옵니다.’하고 말할 날이 멀지 않았다. 이런 내 생각이 맞을지 아니면 틀릴지는 현재로선 장담할 수 없지만, 지금 확실히 말해둬도 틀림없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프랑스 루브르미술관 조르주 사르 관장도 같은 말을 했다. 눈에 호소하는 일본요리의 아름다움은 절대적이다.」 같은 책, p111

당대에도 로산진의 명성은 외국의 예술 거장들에게까지 알려졌다. 1951년 파리에서 ‘현대 일본 도예전’이 개최되었을 때, 그는 피카소와도 교분을 나누었다. 로산진의 도자기가 명성을 얻은 후 그를 찾아온 인물 중에는 찰리 채플린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의 욕심은 그것보다 컸던 것 같다. 오늘날 많은 외국인이 사시미와 스시를 먹으러 일본을 방문하는 현상은, 틀림없이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고 그 날을 준비한 로산진의 덕분이 아닐까.

일식 문화의 특징이 일석일조에 생겨난 것이라고 보기는 어렵겠지만, 그 막연한 특징을 일목요연하게 구체화한 공로는 로산진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첫째, 재료가 지닌 원래의 맛을 살려야 한다는 집착.

「맛있는 요리의 근본은 재료다. 능숙한 솜씨는 그다음이다. 중국에서는 요리의 공을 재료 6할, 솜씨 4할로 돌린다. 그러나 일본은 중국과 달리 재료가 월등히 뛰어나다. 그래서 재료 9할, 솜씨 1할이라고 생각한다. 재료의 질이 중국을 이기는 까닭이다. p25 세상에 존재하는 식재료가 얼마나 있는지 정확히 모르지만, 하나하나 모두 독자적인 본연의 맛을 지니고 있다. 다시 말해 모든 재료는 본맛이 있고, 그 맛은 다른 재료로 대체할 수 없다. 하늘이 일구고 땅이 만든 자연의 힘이 이를 증명한다. 요리란 결국 재료의 본맛을 살리는 일이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p38-39

「맛없는 것을 맛있게 만드는 비결은 없다. 그런 마술도 없지 않을까. 맛없는 쌀은 결국 맛없다. 고기도, 생선도, 푸성귀도 모두 마찬가지다. 본질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다만 맛있게 보이도록 꾸미는 방법은 있다. 이것은 거짓의 맛이지, 본연의 맛은 아니다. 속임수를 써서 아이를 달래는 방법과 비슷하달까. 요리하는 사람이라면 묘안이 있지 싶겠지만, 진짜로 불가능한 일이다. 요리의 명인이라도 '맛없는 것을 맛있게'하지는 못한다. 억지로 궁리를 짜내면 헛된 비용과 수고만 든다. 고생에 비해 결과도 형편없다. 본디 요리의 맛은 대부분 식재료의 질에 달려 있다. 요리인의 공은 1할이나 2할, 많아야 3할 정도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60

둘째, 한상 차림이 일반적이던 음식을 코스 요리로 변형(오쿠보 히로코의 표현을 빌리면, ‘프랑스 정식 요리와 같은 시계열 방식’의 혁신)하여, 함께 먹으면서도 혼자 먹는 일본 식문화의 양식을 정착시킨 점.

「나고야의 유명 요정 핫쇼칸의 지배인이었단 마쓰다 반키치의 말을 들어보자. 요리를 한 가지씩 내는 방법이 지금은 당연하지만 그때까지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소위 에도 시대의 요리에서는 본상을 비롯해 서너 가지 요리가 놓인 세 개 정도의 상이 처음부터 모두 나왔다. 지금도 궁정이나 신사에서는 간혹 그렇게 하지만 촌스러운 방법이다. 그것을 오늘날처럼 바꾼 사람이 로산진이었다. (생략) 이 모두가 혁명과도 같은 일이었다. 그는 대단히 파격적이었고 위대한 연출가였다. (생략) 우리가 지금 요리를 내는 방법은 결국 로산진을 흉내 내는 것일 따름이다.」 <로산진 평전> pp98-99

셋째, 식기를 음식 못지않게 중시하는 습관.

「그릇은 요리의 기모노. 단지 먹는 것뿐이라면 태곳적처럼 나뭇잎 위에 얹어 먹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요리를 한층 높은 수준으로 올리려면 그릇을 잘 선택해야 한다. 그릇과 요리는 절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마치 부부처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한다. 예부터 수많은 본보기가 있었고, 지금도 더러 남아 있다. 평생 함께 살아야 하는 부인이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나 소꼬리라도 상관없다며 그냥 있는 대로 대충 맞추고 살면 어떨까. 관계의 향상이 없어 일생일대의 실패요, 백 년 원수를 면하기 어렵다. 그래서 요리하는 사람은 그릇을 공부해야 한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p54-55

넷째, 요리는 일생을 걸고 추구할 가치가 있는 고급 예술이라는 굳센 믿음.

「다음은 맛을 아는 사람이 어떻게 하면 음식을 맛있게 먹을 수 있느냐인데, 적어도 요리하는 사람이 먹는 사람만큼 실력이 없다면 불가능하다. 음식을 먹고 맛을 평하는 일은 그림을 보고 미를 예찬하는 일과 본질적으로 같은 행위다. 둘 다 실력이 척도다. 능력이 5라면 딱 그만큼만 표현할 수 있다. 요리하는 사람이 월등한 실력이라면 상대의 속내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히 보여 자신감이 생기고 여유로와진다. 그림도 마찬가지다. 감상력이 높으면 어떤 명화라도 자신만이 볼 수 있는 고유의 가치를 끌어낼 수 있다. 심지어 뭔가 부족하게 느껴지며 결점까지 보인다. 반면 낮으면 아무런 감동도 없다. 즉 미각이든 감상이든 아는 사람은 알고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14

「본디 '요리'는 도리를 가늠하는 일이다. '사물의 이치를 헤아린다'는 뜻으로, 단순히 썰고 삶고 하는 행위가 아니다. 흔히들 음식점을 일본요릿집, 서양요릿집이란 식으로 부르는데, 이는 요리의 뜻을 애매모호하게 만든다. 요리란 삶거나 썰거나 하는 형식이 아니라 그 행위의 본질을 가리킨다. 때문에 나라도 사람도 요리할 수 있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p29-30

다섯째, 그렇기 때문에 작품으로서 요리의 우열을 가릴 수 있고, 그것이 미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라는 신념.

「후지 산에는 정상이 있지만, 맛과 미의 길에는 정상이 없다. 설사 있더라도 정상에 다다르는 사람이 있을까? 아마 없을 거다. 세상에서 흔히들 달인이라 칭하는 사람은 넓디넓은 들판을 빠져나와 대단히 좁은 길을 걷고 있다. 어떤 의미로는 그만큼 자유롭지 못해 보이지만, 그들은 미묘한 부분까지 분별하는 달인이 아니면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미각을 발견하곤 한다. 다만 세상에 말이 통하는 사람이 드문 탓에 결국 자신과 재료 둘만이 있는 세계로 틀어박힌다. 삼매경에 이르렀다고나 할까. 사람을 지도하고 싶다면 그 경지까지 도달해야 한다. 상대를 다스린다는 것은 자신이 상대보다 위에 서 있다는 뜻이다. 같은 위치에 있으면 결코 상대를 다스릴 수 없다. 결국 모든 경지를 깨쳐야 맛의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만족을 줄 수 있다. 이처럼 요리의 길은 끝이 없다. 오로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고 열정을 쏟아야 한다. 아니,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평상시에 열정과 주의를 기울이면 목적한 곳에 이를 수 있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p15-16

「진짜 요리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 이후에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합니다. 맛을 알고 즐길 수 있는 사람, 처음부터 끝까지 맛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에 대해 극도로 신경을 집중하는 사람, 일상의 식사에서도 수행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 월수입을 계산하지 않는 사람, 요리뿐만 아니라 미적 감각이 뛰어난 사람, 그림, 조각, 건축 등 예술에 애착을 가지고 식도락을 즐기는 사람, 임기응변으로도 손님을 만족시키는 사람, (중략) 후세에 천하의 요리사로 이름을 남길 수 있는 사람을 모집합니다.」 <로산진 평전> pp83-84

여섯째, 양질의 서비스가 요리라는 종합 예술을 완성하는 요소라는 믿음.

「로산진은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기존 요리점과는 전혀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생각으로 초보자들을 고용했다. 심지어 그는 종업원의 유니폼까지도 직접 디자인할 정도였다. 여종업원들에게 고급 무명으로 지은 기모노를 입혀서 손님을 올 때 모두 현관으로 나가 맞이하도록 했다. 호시가오카사료에서는 요리사는 물론이고 종업원 교육도 치밀하게 진행되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인사법을 예로 들면 이러하다. 머리를 숙여 정중하게 인사하는 것이 접대의 기본이다. 까딱하는 것은 실례다. 머리를 천천히 숙이고 천천히 들어라. 너무 느려도 안 되며 너무 빨라도 안 된다. 숙이거나 들 때는 같은 속도로 하라. 그렇다고 기계적으로 해서는 안 된다. 너희는 사람이지 인형이 아니다.」 <로산진 평전> pp87-88

일곱째, (일본 음식을 이해하자면 이 점이 매우 중요한데) 돈을 받고 제공하는 요리가 가정에서 정성껏 만들어진 음식을 벤치마킹해야 한다는 인식과, 그와 동시에 요리집 음식은 결코 어머니의 음식이 될 수는 없기 때문에 하나의 정교한 ‘연극’이 되어야 한다는 자의식이 공존하는 묘한 이율배반. 그 이율배반에서 비롯되는 공급자와 소비자 간의 작위적 긴장.

「어느 날 로산진을 찾아온 사람이 말했다.
"요리할 때의 마음가짐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러자 로산진이 질문을 하나 던졌다.
"어느 부유한 사람이 별장에 살고 있었네. 이 별장으로 매일 여러 사람이 음식물을 보내왔네. 도시락 말일세. 친한 친구가 가져온 도시락도 있고,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의 도시락, 신세를 지려고 하는 사람의 도시락 등 여러 가지가 있었네. 그중에서 가져온 사람의 이름을 듣지 않아도 곧바로 알 수 있는 도시락이 하나 있었네. 그것은 누구의 것이었을까?"
"......"
"바로 어머니가 보낸 도시락이었다네."」  <로산진 평전> pp207-208

「요릿집 요리는 밥상이라는 무대에 올라온 일종의 연극으로, 가정집 요리를 아름답게 꾸며서 드러내기 마련이다. 이때 요리인은 배우다. 그러니 명배우처럼 열연을 펼쳐야 한다. 만약 요리인이 명배우가 아니라면 요릿집 요리는 나쁘다는 평가를 듣는다.」 <로산진의 요리왕국> p41

「"자, 말해볼까, 일본에는 얼마 전까지 창녀가 있었지."
"선생님, 창녀 이야기가 아니잖아요. 요리 이야기라고요."
"기다려봐. 여기서부터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 돼. 창녀는 매우 능숙해, 뭐가 능숙한지 알지?"
"알죠, 그게 요리와 무슨 관계가 있죠?"
"불쾌한 감정 없이 들어주게. 아내는 서툴지만, 창녀는 능숙해. 손님이 기뻐하는 곳을 잘 알거든. 대부분이 시늉뿐이긴 하지만 말이야. 즉 장사꾼이야. 요릿집 요리도 그래. 손님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잘 알아. 대신 나중에 돈을 뜯기지. 아내에게 베개 값이나 요리 값을 내는 녀석은 없잖아? 그렇다고 아내가 풀어지면 안 돼.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소중한 진심마저 잊고 사는 아내들이 종종 있지. 그럼 남편은 요릿집만 들락대면서 밖에 애인을 만들겠지. 진심이 있다면 기술을 보태야 돼. 기술만 중요시해도 안 되지만, 경멸해서도 안 돼. 창녀를 흉내 내라는 말은 아니야. 진심이 있다면 방에 꽃이라도 꽂으라는 거야. 교태를 억지로 부리라고까진 안 해.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저절로 목소리가 상냥해지는 법이니까. 요리도 마찬가지야. 진심이 있다면 맑은 국을 하나 끓여도 싱거워지지 않아. 맛이 좋도록 조미료 한술이라도 더 넣거든. 맛나게 먹어주길 바라는 진심을 표현하는 거지."」 <로산진의 요리왕국> pp46-47

말릴 수 없는 아집과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능력으로 현대 일본 요리의 양식을 완성시킨 종합 예술인 기타오지 로산진. 그러나 우리는 안다. 버릇처럼 묘한 고집을 부리는 사람도 (정말 멍청한 것이 아니라면) 자신의 고집이 보편적인 진리 위에 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을. 로산진을 대가의 반열에 올린 추동력이 그의 천재성이었든, 괴팍한 아집이었든, 또는 유복하지 못한 환경에서 비롯된 자격지심이었든, 그가 이룬 업적의 가치를 줄이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강하고 성마른 대가처럼 행동하고, 또 그렇게 보였던 로산진도 실은 우리처럼 외롭고 약한 인간이었다. 말년의 그는 많은 것을 잃었고, 고독했고, 우울했다. 그 점이 오히려 그의 성취를 더 돋보이게 만든다.

「게이코 기자는 드라마에 심취한 로산진의 모습을 이렇게 회상한다. “출입문으로 들어서서 곧바로 선생이 계신 방으로 갔다. 나는 아침 인사를 하려다 말고 그만 자리에 조용히 앉아버렸다. 선생의 뺨에 굵은 눈물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푸른 노트'가 방송되는 시간이었다. 라디오에서는 어린 소녀의 맑은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고, 아버지로 생각되는 사람이 소녀에게 대답하고 있었다. 경쾌한 음악을 배경으로 소녀가 들판에서 나비를 쫓고 있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선생은 눈물을 멈추지 못하고 오열하고 있었다. 소녀가 뭐라고 말할 때는 어깨마저 들썩였다.” 게이코 기자가 놀랐던 것은 로산진이 드라마의 행복한 장면에서 슬퍼했기 때문이다. 로산진은 그 장면에서 분명 자신의 비참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 것이다.」 <로산진 평전> p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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