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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지향의 일본인

posted Mar 30,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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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소지향의 일본인

- 1982, 이어령, 고려원 (2003, 이어령 라이브러리, 문학사상사)

 

    우리말로 글을 쓰는 이들 중에서 이어령보다 완성도 높은 미문을 써내는 사람은 지금껏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몇 해 전 김훈의 여행수필 <자전거 여행>을 읽으면서 숨이 막힐 만치 아름다운 문장들을 접했지만, 거기서는 문장의 아름다움이 그 내용을 앞서고 있었다. 내 벗의 표현을 빌리자면, “美文은 좋은 것이지만, 美文主義는 나쁜 태도다.” 이어령의 글들은 결코 미문주의의 소산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탐미적 태도를 담고 있는 글들은 1972에서 1986년까지 <문학사상지>의 편집장으로서 발표한 권두언일 터이다. 이 글은 문학세계사에서 <말>이라는 제목의 단행본으로 간행하였는데, 권두언의 역할과 성격, 그 분량 등을 감안하면 이 글에 대해서조차도 미문주의에 치우쳤다는 평은 가당치 않다. 글줄이나 쓴다는 자 치고 다음과 같은 그의 전언에 가슴속 격동을 느끼지 않을 자가 있으랴.

 

    분노의 주먹을 쥐다가도 결국은 자기 가슴이나 치며 애통해하는 무력자(無力子)들을 위하여, 지하실처럼 어두운 병실에서 5월의 푸른 잎을 기다리는 환자들을 위하여, 눈물 없이는 한 술의 밥술가락도 뜨지 못하는 헐벗은 사람들을 위하여, 위선에 지치고 허위의 지식에 하품을 하고 사는 권태자를 위하여, ... 상처진 자에게는 붕대와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폐를 앓고 있는 자에게는 신선한 초원의 바람 같은 언어가 될 것이며, 역사와 생을 배반하는 자들에겐 창 끝 같은 도전의 언어. 불의 언어가 될 것이다. 종(鐘)의 언어가 될 것이다. 지루한 밤이 가고 새벽이 어떻게 오는가를 알려주는 종의 언어가 될 것이다.

 

    이어령은 지금에 와서는 국어학자이자 소설가이자 문화비평가이자 극작가이자 문학평론가이자, 전직장관(초대 문화부 장관)이기도 하지만, 1956년 불과 24세의 나이로 한국일보에 <우상의 파괴>를 발표하여 문단의 총아로 떠오르던 당시, 그는 필마단기의 ‘문화게릴라’였다. 거대한 기성문단에 맞선 그의 무기는 기발한 발상, 교묘한 비유법, 참신한 문체였다. 1959년 거의 두달 남짓 경향신문의 문화면을 메우다시피 하며 진행된 김동리와 이어령의 논쟁(청람문화사, 한국논쟁사 참조)은 진정한 ‘해방이후 문학세대’의 등장을 알리는 북소리와도 같았다. 이 논쟁은 안타깝게도 타협이나 변증법적 발전 없이 지엽적인 논란으로 마무리되고 말긴 했지만, 그 결과는 누가 보더라도 김동리의 판정패였다.

 

    실은, 이어령 ‘선생님’은 나에게는 학창시절 내내 작문교사나 다름없었다. 좀 색다른 글을 써본다 함은, 그에게서 배운 문체로부터 짐짓 멀리 벗어난다는 것을 뜻했다. 이어령의 문체가 지닌 가장 큰 매력은 적확한 고로 힘을 지니는 비유와 기호학적 엄정함이었다. 만일 학창시절에 그의 저서들을 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글을 쓰는 행위가 주는 즐거운 전율감을 알지 못한 채 성인이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의 수많은 저서들 중 한 권만을 골라내어 소개하는 일은, 내게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권만을 골라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뽑아 들겠다.

 

    이 책은 저자가 일본에서 간행한 <縮み志向の日本人>라는 책을 번역하여 1982년 고려원에서 출판했고, 지금은 문학사상사의 전집 속에 포함되어 시판되고 있다. 이 저서는 <Small is Better>라는 제명으로 고단샤(講談社) 인터내셔널에서 英譯 출판(1984), 미국의 Harper&Row사에서 공급하고 있으며, 일본에서 문고판은 고단샤 문고로 수록, 간행되고 있다. 또한 <Small is Better-Miniaturisation et productivité japonaises>라는 제명으로 프랑스의 Masson 출판사에서 佛譯, 출판되기도 했다.

 

    지금 와서는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하나의 상투어처럼 유통되고 있긴 해도, 이 책은 놀라운 지적 작업의 결과물이다. 누가 이처럼 일본을 속속들이 알 것이며, 누가 그 방대하고 잡다한 사실들을 이토록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할 것이며, 누가 그것을 단 하나의 코드에 실어 정의할 수 있을 것인가.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축소지향의 일본인>이라는 책이야 말로 축소지향적인 일련의 지적 활동의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준다. 사례분석에 있어서 연역적이기도 하고, 주제의식에 있어서 귀납적이기도 하며, 논증에 있어서 경험적이기도 한 동시에 분석에 있어서 선험적이기도 한 이 책은 지적 활동의 하나의 전범을 보여준다. 사람의 머리 속을 만일 책상서랍에 비유할 수 있다면, 이 책을 읽는 것은 기발하면서도 산뜻하게 정리된 지성인의 서랍 속을 구경하는 것과도 흡사하다.

 

    반어적이지만, <축소지향의 일본인>을 내 아이들에게 권하면서, 나는 아이들이 일본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우기보다는 체계적으로 사고하고 그것을 분명한 글로 표현하는 법을 배울 수 있기를 더 기대한다. 체계적인 지적 산출(output)방법을 일거에 배우는 것이 무리라면, 그렇게 하는 것이 무척 아름답다는 사실 만이라도 느껴도 좋으리라.

 

    문학사상사의 전집인 이어령 라이브러리의 목록은 아래와 같다. 그 중에서도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말로 찾는 열두 달>, <바람이 불어오는 곳> 등의 책들이 사춘기 시절 나에게 준 가르침은 다양하고 컸다. 그러던 어느 날, 신문에 실린 그의 컬럼의 도입부를 읽으면서 결론이 일찍 내다보이고 비유가 상투적이라고 느껴졌을 때, 나는 내가 그로부터 받아들일 수 있는 만큼의 가르침을 벌써 가득 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몸담고 살아가는 사회에 대한 나 스스로의 조망을 나름대로 길러야 한다는 자각이 닥쳐온 시기와도 일치했다.

 

<이어령 라이브러리>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말로 찾는 열두 달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뜻으로 읽는 한국어사전

젊은이여 한국을 이야기하자

시와 함께 살다

차 한 잔의 사상

오늘보다 긴 이야기

푸는 문화 신바람의 문화

축소지향의 일본인

일본문화와 상인정신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들

거부하는 몸짓으로 이 젊음을

신화 속의 한국 정신

기업과 문화의 충격

장군의 수염

환각의 다리

둥지 속의 날개

기적을 파는 백화점

노래여 천년의 노래여

진리는 나그네

장미밭의 전쟁

저항의 문학

지성의 오솔길

바람이 불어오는 곳

어머니와 아이가 만드는 세상

저 물레에서 운명의 실이

세계 지성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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