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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Beirut to Jerusalem / Longitudes and Attitudes

posted May 25,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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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Beirut to Jerusalem

- 1989, Thomas L. Friedman, Doubleday(New York), 증보판 1995

 

Longitudes and Attitudes: Exploring the World After September 11

- 2002, Thomas L. Friedman, Anchor Books(Random House, New York)

 

 

    뉴욕타임즈의 컬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낙관주의자다. 그의 저서 속의 표현을 따르면 그는 ‘낙관주의로 가득한 미네소타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어머니날을 기념한 그의 컬럼에 따르면 그의 낙관주의는 모친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라고 한다. 그의 낙관주의는 진지하고 성실한 것이어서, 좀처럼 비비 꼬인 냉소주의에 함몰되는 법이 없다. 이것이 그를 뉴욕 타임즈의 다른 컬림니스트들과 구분짓는 첫 번째 특징이다.

 

    <The Lexus and the Olive Tree>에서 그는 사람들의 국제정치성향을 나타내는 지표를 제안한 적이 있었다. 세계화와 관련하여 통합주의자(integrationist)와 분리주의자(separatist)로 나누고, 국내경제정책과 관련해서는 자유경쟁론자('Let-them-eat-cake'r)와 사회안전망주의자('social-safety-net'ter)로 구분해 볼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그는 자신의 성향을 통합론적 사회안전망주의자(integrationist/social-safety-netter)라고 소개했다. 분배정책과 관련된 그의 기본적인 입장은 리버럴에 가까우며, 그 점에 있어서 뉴욕 타임즈의 컬럼니스트로라는 지위에 잘 어울린다. 그러나 그는 따뜻한 성품만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는 뉴욕 타임즈의 집필진들에게서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엄격한 현실주의자의 풍모도 갖추고 있다. 이것은 그가 기자 입문 시절에 겪은 경험과 관련이 깊은 것처럼 보인다.

 

     베이루트와 예루살렘에서의 생활은 나의 타고난 낙관주의 기질을 서서히 앗아갔다. 베이루트 미 해병대 병영이 자살 폭탄트럭의 공격을 받을 때부터인지, 내가 거주했던 아파트가 폭파되면서부터인지는 정확히 모르겠다. 사람의 마음에 비관주의가 언제부터 싹텄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법이다. 아마도 너무 많은 죽음을 보고, 너무 많은 비극을 보아서일 것이다.(From Beirut to Jerusalem)

 

    비관에 물들었다는 그의 고백은 사실은 그가 낙관주의를 얼마나 소중히 여기고 있는지를 드러내는 반어적 겸양일 뿐이다. 그는 1979년에서 1981년까지 UPI통신의 베이루트 특파원을 지냈으며, 1982년에는 뉴욕타임스 베이루트 지국장이 되었고, 1984년부터 1987년까지는 예루살렘 지국장으로 근무했다. 특히 베이루트 내전의 경험은 그에게 모순되고 부조리한 현실을 함부로 조롱하지 못하도록, 그리고 인간성의 어두운 이면을 직시하도록 가르쳐 준 것처럼 보인다.

 

    그가 경험한 베이루트 내전과 이스라엘의 침공 기간중의 레바논은 중동사회의 부조리가 만화경처럼 펼쳐지던 극장과도 같았으므로, 그는 외지인이 좀처럼 구경하기 어려운 중동의 진면목의 일부를 목도했던 셈이다. 열정에 들떠 세계화에 대한 강론을 펼치는 대목에서 그는 더러 나이브(naive)한 리버럴의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 지정학(특히 중동정치)에 관한 컬럼을 쓸 때면 그는 거의 젊어서부터 분쟁지역을 여행하며 국제정치의 후미진 뒷골목을 경험한 로버트 카플란이 연상될 만큼 냉철한 현실주의자가 되기도 한다. 중동문제에 관한 한, 지금도 나는 그의 컬럼을 가장 신뢰할 만하고 경청할 만한 의견으로 여기고 있다.

 

    유태인으로서 이스라엘 특파원으로 근무한다는 것은 핸디캡일 수도 있다. 그래서 뉴욕 타임즈는 유태인 직원을 이스라엘이 파견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지키고 있었는데, 그는 그 방침의 예외가 되었다. 뉴욕 타임즈의 판단은 현명했고, 그는 유태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핸디캡이 아닌 자산으로 삼아 독자들을 이스라엘 정치의 심연으로 안내한다.

 

    이스라엘의 정치상황을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이 국가의 탄생 과정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이스라엘을 건국한 시오니스트 유대인은 세 가지 목표를 갖고ㅗ 있었다. 이스라엘의 정치학자 아레이 나오르에 따르면 그들은 첫째 유대국가, 둘째 민주국가, 셋째 지중해에서 요르단 강에 이르는 팔레스타인 지방 전체와 요르단의 일부를 차지했던 고대 유대인의 보금자리에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생략) 1948년-67년 시오니즘은 세 가지 목표 가운데 2와 2분의1이 성취된 채 번영했다. 이사르엘은 유대인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유대국가이며 민주국가로 고대 이스라엘 영토의 절반을 차지했다. 그런데 1967년 6월 이스라엘은 ‘6일 전쟁’에서 서안과 가자 지구를 점령하여 시오니스트들이 꿈꿔 온 모든 땅을 차지했다. 이때 다시 한 번 ‘우리는 어떤 국가를 지향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했다. 이스라엘은 다시 세 가지 목표 중 두 가지를 선택해야 했다. 하나는 서안과 가자 지구를 포함한 고대 이스라엘의 모든 영토를 지키며 유대국가로 남는 것으로, 이는 민주주의를 상당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뜻했다. (생략) 두 번째 선택은 서안과 가자지구를 합병하면서 민주국가로 남는 것으로, 이는 유대국가를 포기하는 것을 뜻했다. (생략) 세 번째 선택은 유대국가, 민주국가로 머물면서 서안과 가자 지구를 포기하거나, 땅은 가지되 이 지역의 거주민을 몰아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세계가 팔레스타인 주민 추방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므로 이 선택은 결국 점령지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생략) 그런데 이스라엘의 양대 정당인 노동당과 리쿠드당은 세 가지 선택 가운데 한 가지를 명확하게 정하지 않고 1987년까지 20년을 보냈다.(From Beirut to Jerusalem)

 

    <From Beirut to Jerusalem>은 출간된 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중동정치의 가장 훌륭한 입문서들 중의 하나다. 1995년의 증보판에서 프리드먼은 마드리드 협정의 배경과 전망에 대한 설명을 추가하면서 조심스러운 기대감을 표했다. 1994년에 나는 케임브리지 대학원 중동정치 전공생들과 함께 2주간 이스라엘을 수학여행한 적이 있었다. 당시 우리는 지도교수인 Sayid 박사의 인솔하에 요르단의 암만에서부터 육로로 요르단 강을 건너 헤브론, 예루살렘, 서안지역의 정착민촌, 가자지구 난민촌 등을 방문하면서 이스라엘 외무성 관리에서부터 팔레스타인 학자, 하마스와 지하드 지도자들까지 다양한 인사들을 면담하고 그들과 토론을 가졌다. 중동정치에 대한 나의 직접적인 경험은 프리드먼의 책이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된 셈이었다.

 

    2002년에 출간된 프리드먼의 저서 <Longitudes and Attitudes : Exploring the World After September 11>는 9/11 사태를 배경으로 중동정세에 관한 그의 컬럼들을 모은 책으로서, <From Beirut to Jerusalem> 같은 기승전결을 갖추고 있지는 않으나 그 내용에 있어서는 속편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은 <Longitudes and Attitudes: The World in the Age of Terrorism>이라는 제목으로 2003년에 재출간되었다. 2003년초에 벌어진 미국의 대이락 침공으로 말미암아 증보판 출간이 불가피했을 것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협정 이후부터 미국의 대이라크 전쟁 사이의 기간 동안 중동정세가 어땠었는지 기억이 흐리다면 이 책은 훌륭한 비망록의 역할을 해 줄 것이다.

 

    토머스 프리드먼의 글은 통렬하면서도 성실하고, 기자다운 재치로 번득이는 동시에 작가적인 페이소스를 담고 있기도 하다. 나는 그의 분석들에 대부분 동감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도 그의 글은 작문의 휼륭한 전범이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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