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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더 접으며

posted Oct 26,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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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에서 집으로 귀가하는 길, 니시오기쿠보(西荻窪)역 앞에는 리스도르 미쓰(リスドォル・ミツ)라는 상호를 가진 빵가게가 있다. 이 가게가 여느 빵집과 다른 점은 저온 숙성 방식을 고집한다는데 있다.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로 반죽을 만든 다음 효모(이스트)로 발효시켜 부풀어 오르게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 동네 리스도르 미쓰의 사장님은 발효 촉진제인 효모를 첨가하지 않고 저온상태에서 반죽이 저절로 숙성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다. 촉진제를 쓰면 몇 시간 만에 끝날 발효를 열흘 동안 기다린다니, 이른바 '슬로우 푸드'의 좋은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2011년 봄에 동일본 대지진이 발생하고 식재료의 방사능 오염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자, 리스도르 미쓰의 히로세(廣瀬) 사장은 “원료에 자신감을 가질 수 없다”는 이유로 자진해서 폐업 신고를 냈다가 거의 1년 후에 재개업을 하기까지 했다. 드라마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고집스러움이다.

이 가게의 빵이 다른 빵집보다 맛이 있을까? 꼭 그런 것 같지는 않다. 내 입맛은 무뎌서 그렇다 치더라도, 만일 저온숙성 빵이 더 맛있었다면 이토록 맛에 민감한 나라에서 다른 빵집들은 남아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오래 걸리고 품이 많이 드는 방식을 고집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이 빵집이 일본이라는 나라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일본에 두 해를 살고 나서 내가 일본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품게 된 인상은, 비유로 말하자면, 마치 발효숙성시키지 않고 구워버린 빵 같다는 느낌이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를 설명하는 것으로 나의 일본음식 탐험기의 맺음말을 대신할까 한다.

일본에 살면서 한국인으로서 내가 가장 낯설게 느꼈던 부분은 일본인들의 고집스러운 아날로그적 생활태도였다. (일본생활 경험이 있는 독자라면 벌써 빙긋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계시리라.) 내가 본 일본인들은 하나같이 모범적인 근대인이었다. 현대 또는 탈근대 이전의 시대적 특성이라는 의미에서의 근대를 말하는 거다. 자립과 근면과 성실을 강조하는 윤리관이 그러하고, 최첨단 기술의 본고장이면서도 육체노동과 느림의 미학이 신성시되는 역설적인 생활태도가 그러하다. 일본 전철과 기차 노선 중에는 사인(私人)이 소유한 사철(私鐵)이 적지 않다. 사철이라니! 왕년에 철도가 전성기를 누렸던 선진국 치고 사철이 없던 나라는 없었을지 몰라도, 그중 일본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사철이 운영되고 있는 나라는 찾아볼 수가 없다. 공룡들이 뛰노는 쥐라기 공원처럼, 일본에서는 근대의 유물이 오늘의 삶 속에 버젓이 작동하고 있다. 메이지 시대, 다이쇼 시대, 쇼와 시대의 풍물과 관습은 오늘날의 일본인들에게 단절된 옛 기억이 아니다.

과연 그 이유가 무엇일까? 혹시 일본인들에게, 자신들의 근대화 과정이 너무나도 거대한 성공이었기 때문은 아닐까? 잘 알려진 것처럼, 일본의 근대화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성공적인 시대적 전환이었다. 어쩌면 일본은 과거의 성공에 얽매어 탈근대 또는 세계화라는 새로운 전환의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의 지식인들은 자주 일본을 탈근대, 탈산업 사회로 규정한다. 제조업이 성장동력을 이끌던 산업사회의 전성기를 일본이 졸업하고 있는 것은 사실일지도 모르되, 나는 일본이 탈근대 또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접어들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근대적 성공신화에 깊이 뿌리박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진정으로 근대 이후 시대로 접어들기 위해서는 근대에 일본이 범했던 실수를 정면으로 마주본 다음, 자신의 역사와 화해하고 그럼으로써 이웃들과도 화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진정한 진보는 언제나 자기부정에서부터 출발한다.

이런 의미에서 일본의 근대성이 내 눈에 보이는 이유는 어쩌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웃나라는 자신을 비춰보기 가장 적당한 거울이다. 일본에게 한국이 그러한 것처럼, 한국에게 일본도 그러하다. 내 조국이 근대화의 열등생이었다는 사실은 비밀이 아니다. 우리 선조들은 두 세기 전에 소중한 기회를 놓쳤고, 그래서 우리 근대사는 모진 고초의 연속이었다. 오늘날의 일본에서 시대착오적인 근대성을 발견한 다음, 문득 내게는 이런 궁금증이 들었다. 포항제철과 현대 자동차와 삼성 핸드폰과 소녀시대와 싸이. 우리가 세계화의 파도를 멋지게 올라타고 탈근대의 선두주자로 나설 수 있었던 이유 중의 적어도 일부는 우리에게 “버리기 아까운 과거의 성공”이 없었던 데도 있는 것은 아닐까?

서양 사람들의 눈에는 일본인과 한국인이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정작 한국인이 바라보면, 변화에 저항하는 일본인의 보수적인 태도는 갑갑하리만치 이국적이다. 어떤 사람의 장점은 그 자체가 그의 단점이다. 결단력이 있는 이는 독선적이고, 신중한 이는 우유부단하다. 쾌활한 이는 덜 진지하고 진지한 이는 덜 쾌활한 법이다. 빠른 이는 엉성하고 정확한 이는 답답하다. 그런 관점에서 보자면 일본인들의 답답한 수구적 생활태도는 그들이 지닌 엄청난 장점에 필연적으로 부수되는 그늘인지도 모른다. 내가 일본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안정성과 예측가능성, 거기서 말미암는 사회적 신뢰의 분위기다.

만일 장점과 단점에 관한 이런 식의 관찰이 옳다면, 우리의 가장 위험한 단점도 우리의 가장 자랑스러운 장점의 바로 뒷면에 자리 잡고 있을 공산이 크다. 대한민국이 탈근대 또는 포스트모던 시대를 맞아 지금까지 좋은 성적을 거둔 비결은 우리의 뛰어난 역동성, 적응력,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과감성 등이었다. 우리가 이런 장점을 지님으로써 불가불 가지게 된 단점이 무엇인지를 혼자서 깨닫기란 수월치 않다. 그러나 일본이라는 거울에 비춰보면, 우리에게 부족한 것은 안정성과 예측가능성, 거기서 말미암는 사회적 신뢰, 또는 그와 비슷한 무언가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역동성과 불안정성, 안정과 정체(停滯)는 실은 같은 현상을 일컫는 다른 이름인 것이다.

일본은 근대라는 반죽을 잘 빚었지만 탈근대라는 발효과정을 채 시작하기 전에 구워버린 빵 같다는 것이 내 비유의 진의다. 이 글을 빵집 이야기로 시작한 것은 그래서였다. 독자들이 이 비유를 지나치게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말아주시면 좋겠다. 다만 이런 비유 속에 일말의 진실을 담을 수 있다면, 어쩌면 우리나라는 서둘러 만든 반죽을 너무 빠른 속도로 발효시켜 자칫하면 술맛이 날지도 모르는 빵에 비유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스스로의 성공에 희생되지 않으려면, 자신의 대견스러운 성공담 속에서도 경고음을 들을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진보는 자기부정에서 출발한다는 명제는 우리에게도 어김없이 해당하는 말이다.

다시 말하지만, 어느 나라에나 이웃나라의 존재는 소중하다. 그것이 스스로를 가장 밝히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웃나라를 자세히 아는 만큼, 우리는 스스로에 관해서 많은 것을 알게 된다. 스스로를 모르는 자에게는 밝은 내일이 없다. 이천년 전, 인류의 스승 소크라테스가 남긴 가장 중요한 가르침도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이었잖은가. '너' 없이는 '나'를 알 길이 없다. 우리는 그런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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