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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음식 이야기를 접으며

posted Sep 13,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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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것은 우리를 매료한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도 시간과 돈을 들여가며 일부러 여행 따위를 할 필요를 느끼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다른 것을 보기 위해 기꺼이 떠나고, 가던 길을 멈춘다. 다른 것들을 서로 다르게 만드는 힘을 우리는 문화라고 부른다. 다른 곳에는 우리와 다르게 말하고 입고 먹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점에서, 문화는 기본적으로 지리의 산물이다. 공간이 발휘하는 힘인 것이다.
 
반면에 인류가 생겨난 이래 꾸준히 작용해 온 다른 힘도 있다. 그것은 온갖 곳의 사람들을 비슷하게 만드는 힘이다. 한 곳에서 생겨난 농업 기술은 멀리 떨어진 다른 곳의 삶을 바꾸었고, 나침반과 화약과 종이는 그것들이 없었을 때보다 전세계 사람들이 좀 더 비슷한 행복과 비극을 경험하게 만들었다. 이제는 어느 나라를 가도 맥도널드와 켄터키프라이드치킨을 볼 수 있다. 세계화의 해일이 들이닥치기 시작한 이래 삶을 획일화하는 힘은 전에 볼 수 없을 정도로 커졌다. 이런 힘을 우리는 문명이라고 부른다. 문명의 지향점은 미래이므로, 그것은 시간적인 관념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와 문명은 끊임없이 서로 다툰다. 문화는 보존하는 힘이고, 문명은 나아가는 힘이다. 사람은 가까운 사람들과 특별한 것을 나누고 싶어 하기 때문에 지역적 특이성은 우리에게 친숙하고 따뜻한 기억의 보금자리를 제공한다. 그래서 문화는 포근히 감싸는 힘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문명의 힘은 무자비하다. 그것은 토착적이고 원형질적인 것을 말살한다. 그러나 역설적인 것은, 인류의 삶을 더 낫게 만든 것은 문명이라는 점이다. 과학기술의 발달만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계급 없는 세상, 기본적 인권이 항상 보호받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가치로 자리 잡게 된 세상은 문화가 아니라 문명이 성취한 것이다. 문화는 따뜻하고 친절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인류의 삶을 문화에만 전적으로 의탁했다면 우리는 지금도 움집이나 동굴 속에서 동물 가죽으로 된 옷을 입고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야 했을 터이다.
 
반면에, 문명이 저만치 너무 앞서 가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안함을 느낀다. 익숙한 관계로 복귀하려는 욕구가 강하게 고개를 든다. 어떤 면에서 우리 모두는 러다이트(Luddite)인 셈이다. 이 세상 누구와도 접속할 수 있는 정보통신(IT) 기술을 손에 쥐게 되었을 때 정작 우리가 한 일은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를 복원하고 강화하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탐닉하는 것이었다. 세계화의 물결이 거세지면서 오히려 도처에서 민족주의의 열기가 뜨겁게 느껴지고, 소수민족이나 이주노동자에 대한 배척과 탄압의 불길이 높아지고 있는 것은 어쩌면 우연이 아닌지도 모르는 것이다.
 
문화는 우리에게 편안함(comfort)을, 문명은 편리함(convenience)을 제공한다. 그런데 인간은 그 둘 중 어느 것도 버릴 수는 없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이것이야말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양난(dilemma)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수와 진보는 그토록 지겨운 다툼을 지금까지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비록 우리나라에서는 진보라는 말이 문명적 발전이 아니라 거꾸로 문화적 특수성에 대한 애착을 가리키게 되어버린 것 같기는 하지만.)
 
문명과 문화의 길항작용은 내 문화에 대한 집착과 보편 문명에 대한 저항이라는 단순한 도식을 넘어, 내 문화와는 다른 모습을 한 문명의 반정립(antithesis) 상태, 즉, 다른 나라의 문화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내가 일본에서 2년간 근무하면서 깨달은 사실은, 이웃나라가 소중한 존재라는 사실이다. 나를 비춰보고 미처 몰랐던 나를 재발견하기에 가장 좋은 거울이 바로 이웃이기 때문이다. 이웃나라라는 것은 우리의 평행우주(parallel universe)다. 이웃나라에는 우리도 그처럼 되어볼 수 있었던 모습, 우리가 하마터면 저렇게 될 뻔 했던 모습, 어찌 보면 우리처럼 되는 게 당연한데 굳이 다르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만나볼 수 있다. 이웃나라와 우리 문화의 뉘앙스 차이는 어쩌면 문명과 문화가 서로 제 할 일을 하면서 만들어낸 작은 틈새와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가녀린 별빛이 망망대해를 떠가는 배의 갈 길을 알려주는 것처럼, 그 작은 틈새는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모습에 대해서 언뜻 보기보다 많은 것을 시사해 준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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