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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2.9-10 Bandung

posted Dec 12,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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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카르타를 출발해서 해발 700m의 분지, 반둥으로 가는 길은 조금씩, 그러나 계속 오르막이었다. 자카르타를 중심으로 보고르, 반둥 등 반경 150km 안팎까지는 고속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두 시간 반 정도면 반둥 시내에 도착할 수 있다. (물론, 일단 반둥에 진입한 뒤에 목적지까지 가는 문제는 시내 교통정체 때문에 다른 얘기가 되겠지만.) 자카르타를 벗어나 서자바 주 중심부로 진입하면, 이곳은 고대에 자바인(Javanese)이 이주해오기 전까지 자바섬 대부분을 석권하고 있었다는 순다인(Sundanese)들의 본거지다.

    자신들만의 언어인 순다어를 구사하는 이들은 자바인들에 비해 사교적이고 느긋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런 순다인들의 수도라고 할 수 있는 도시가 바로 반둥이다. 1920년 네델란드의 도시계획하에 건설된 반둥, 특히 그 북쪽 지역에는 유럽 분위기를 자아내는 저택들도 있어, 곧잘 “Paris of Java”로 불리기도 한다.

    자카르타에서 반둥으로 가는 길이 급하지 않다면 고속도로의 신세만 질 일은 아니다. 반둥 근처까지 와서 Subang을 통과하는 지방도로로 갈아탔다. 수방을 통과해서 반둥으로 가다 보면 찌아트르(Ciater), 탕쿠라반 뻐라후(Tangkuraban Perahu) 등 온천과 화산을 구경할 수 있으므로.

    수도방위사령부를 떠올리는 객쩍은 농을 속으로 걸어보며 수방 시내를 통과하는 동안, 길거리는 마침 제 철을 맞은 람부탄과, 반둥지방의 특산물인 파인애플 노점상들로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다. Rambutan이라는 과일은 ‘털’을 의미하는 Rambut라는 인니어 명사에 접미사 -an을 붙인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름처럼 껍질에 북슬북슬 긴 털이 나 있다. 맛은 용안(또는 Lychee)의 사촌쯤 된다고 상상하면 되겠다.

    참고로, 매우 얄궂은 냄새를 풍기지만 ‘과일의 왕’이라는 별명을 가진 두리안이라는 과일의 Duri는 ‘가시’라는 뜻이다. 두리안 열매는 위험할 정도로 길고 뾰족한 가시로 뒤덮여 있는데, 이 열매를 맺는 두리안 나무의 줄기와 가지 또한 가시투성이다. 골프를 치다가 공이 두리안 나무 밑으로 가면 공 줍기를 꺼린다고들 한다. 그게 정말인지 골퍼들을 붙들고 일일이 확인해본 바는 없지만, 나무에서 떨어지는 두리안 열매를 정통으로 맞고 살아날 확률이 매우 적다는 점만큼은 확실하다고 본다.

    끝도 없는 람부탄 열매들이 한보따리씩 차로 옮겨지고 있었다. ‘한 곳에 쌓여 있는 한 가지 것들’을 보고 압도되기는 삼척의 오징어 산, 안달루시아의 올리브나무 바다 이래로 오랜만이었다. 찌아트르를 지나 반둥으로 들어갈 때까지 산언덕으로 펼쳐지는 차(茶)밭도 참 끝없이 넓기는 했다. (이 차 잎들을 다 어디다 쓴단 말이냐!)

    찌아트르에는 온천 유원지라고 부를 수 있는 휴양시설이 있었다. 야외온천이긴 했지만 더운 볕을 받으며 여유로이 즐기기에는 물이 너무 뜨거워서 그냥 발만 담그고 잠시 시간을 보냈다. 한갓진 휴양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온천탕 위로 커다란 검은 나비가 두 마리, 너울너울 날고 있었다. 이열치열 좋아하시는 분들은 와서 즐겨 보시길. 찍어 먹어보니 쓴맛이 많이 나는 걸로 미루어 유황성분도 많겠더구만...

    조금 본격적으로 오르막인가 싶더니, 자바섬 최대의 활화산 Tangkuban Perahu의 커다란 분화구가 입을 열고 우리를 맞았다. 분화구 앞까지 자동차로 올라갈 수 있을 줄은 미쳐 몰랐었던 것. 유황냄새가 코를 찔렀고, 화산은 분화구 일대의 시야를 흐릴 정도로 무럭무럭 김을 뿜어내고 있었다.

    주변이 좀 조용했다면 존재론적 사색에 빠져들 법도 할 낯설고 그로테스크한 풍경이었는데, 웬걸 자동차에서 내리자마자 수 십명의 잡상인들이 몰려와서 유창한 한국말로 “기념품 사세요, 다섯 캐 만원, 싸다”, “저 미트루 가면 부글부글 켸란 쌀마 먹어”, “열쇠고리, 화산 토올로 만들어” 등등 도무지 사색 같은 것을 떠올릴 여유를 주지는 않았다. (삶 속에 부처가 있느니라)

    해질녁이 되어서야 들어선 반둥 시내는 자카르타에 비해서 길이 좁았고, 더 붐볐으며, 그러나 더 깨끗했다. 아마도 자카르타처럼 외지인들이 몰려와서 골목마다 슬럼을 형성하는 일이 없는 탓이리라. 거리풍경도 다르지만, 고지에 자리 잡고 있는 반둥의 공기가 자카르타보다 선선하게 닿아 왔다.  자카르타에 비하면 늘 평균 3-4도씩 낮은 편이라고 한다. 반둥에 사시는 어느 동포분의 설명에 따르면, 반둥 골프장에 뒷주머니에 땀 닦는 수건을 차고 나타나는 사람은 십중팔구 외지인이란다. 반둥에는 우리 교민들이 약 800여명 살고 계시고, 상당수가 섬유업종에 종사하고 있다. 중국과 베트남 등이 추격해오고는 있지만, 아직은 인도네시아의 저렴한 인건비가 경쟁력을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한다.

    저렴한 인건비. 우리 교민분들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기를 두 손 모아 빌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나는 저렴한 인건비라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가슴 한 구석이 저리다. 저렴한 인건비로 노동집약적 산업에 몰두하던 시절이 우리에게도 있었다. 저렴한 인건비가 어떤 개인의 생활과, 어떤 모습의 사회에 붙는 서술인지 우리는 알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말하기에는 하루하루 생존하는 문제가 너무나도 절박하고 배고픈, 그런 시절은 우리의 것이기도 했으므로, 아무런 감정 없이 ‘저렴한 인건비’를 발음하기는 쉽지 않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우리와 큰 차이가 없어 보였던 인도네시아, 60-70년대에는 우리가 넘보기 어려운 대국으로까지 생각되던 이 나라가 어째서 아직도 이러고 있을까. 우리와의 비교는 그만두고, 불과 얼마 전까지 말레이시아와 별 차이가 없어 보이던 이 나라를 이웃나라들이 멀찍이 따돌리도록 여기는 아직도 ‘저렴한 인건비’의 나라로 남아 있다니!

    반둥은, 인도네시아 도시들 중 아마도 우리나라 교과서에 제일 먼저 등장하는 곳이 아닌가 싶다. 1955년 반둥에서 개최된 제1회 아시아-아프리카 회의가 비동맹의 탄생을 알리는 회합이 되었기 때문이다. 반둥 시내의 한복판에는 아직도 ‘아시아-아프리카路’로 명명된 길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저조한 경제개발에는 수 십 가지의 그럴듯한 이유가 있을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인도네시아가 선택한 국제정치적 노선이 기여한 바도 크다고 보아야 하겠다.

    아마도 비장하고 고상한 뜻을 품고 출발했었을 비동맹회의는, 역시 결과적으로, ‘성적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쟎느냐’면서 한 데 뭉친 열등생들의 회합처럼 되어버렸다. 당연히, 성적이 인생의 전부일 수는 없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공부를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닐 터이다. (게다가, 한 나라에게 있어서 경제발전은 개인의 성적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지상의 과제이기도 하다.) 국제사회에서도, 어떤 친구를 사귀고, 어떤 동료를 본받느냐(benchmarking!) 하는 문제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2006년도의 반둥은 상기시켜주고 있다.

    우리나라가 오늘날, ‘인건비 저렴한’ 나라를 찾아다니며 투자하는, 전교석차 10등 살짝 바깥쪽의 우등생이 된 사연을 누가 묻는다면, 과연 “그냥 열심히 하는 거지 뭐”라고만 답해버릴 수 있을까. 우리는, 우리보다 더 공부 잘하고 잘난 체하는 우등생들한테 치이고 그 때문에 더러 서러워하면서도, 그들과 섞이고 사귀는 쪽을 택했었다. 이제 와서 우리가 그랬었다는 것을 잊는다면, 우리는 경제적으로 우리보다 뒤쳐진 많은 나라들에게 잔인하고 둔감한 나라가 될 것이다. 자기가 누리고 겪은 것들을 충분이 인지(appreciate)하지 않는 자에게는 기회가 끝없이 주어지지 않을 것이기도 하다. 반둥에서 밤을 보내며, 살짝 두려운 마음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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