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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3. Devon

posted Jun 0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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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3월 6일. 바다가 보고 싶었다. 이왕이면 영국의 땅 끝으로 가보기로 했다. 우리의 해남 쯤에 해당하는 콘월Cornwall까지 내달아 볼까 생각도 해봤는데, 너무 멀었다. 콘월 직전에 있는 데븐Devon의 남해안을 목적지로 잡았다. 지도를 가만 들여다보니 빅버리-온-시Bigbury-on-Sea라는 마을이 거리상 그럴듯해 보였다. 남서부 최대의 도시 엑지터Exeter를 지나 데본셔Devonshire 해안으로 가는 길은 관목과 수풀로 뒤덮인 구릉이 넘실대는 무어moor 지형이었다. 도중에 주유소에 들려 차에 기름을 넣고, 그곳에서 전화번호부처럼 생긴 B&B 목록 책자를 뒤적인 끝에 헨리 호텔Henley Hotel이라는 곳에 예약을 했다.


빅버리Bigbury를 지나쳐 목적지에 대충 도달했다고 생각되는 지점에서 포장도로가 끝나버렸다. 좀처럼 길을 찾을 수가 없어서 앞뒤로 헤매기를 몇 차례. 빅버리-온-시로 접근하는 도로의 입구는 키보다 훨씬 높은 갈대밭 사이로 난 소로였다. 차가 진입해도 좋을지 미심쩍었다. 몇 미터 못 가 논두렁으로 굴러 떨어질 것처럼 생긴 좁은 길은 하늘만 간신히 보이는 높다란 갈대밭 사이로 구불구불 길게 이어졌다. 다른 세상으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선 것만 같았다. 그 길의 끝에 조그만 어촌마을 빅버리-온-시가 자리잡고 있었다. 옥스퍼드에서 정오쯤 떠났는데 숙소에 도착한 것은 오후 네 시가 되어서였다. 짧은 해가 벌써 뉘엇뉘엇 넘어가려고 불콰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헨리 호텔은 대서양을 발 아래로 굽어보는 절벽 끝에 지어져 있었는데, 깡촌에 이만한 시설이 있다는 게 부조화스러워 보일 정도로 깔끔했다. 오히려 런던시내의 B&B들보다 잘 갖춰진 객실에 우리는 여장을 풀었다. 젖먹이 녀석의 식사시간이었다. 물을 끓이고 젖병을 꺼내 분유를 탔다.


저녁 어스름이 사라지기 전에, 우리는 유모차를 끌고 마을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19세기 작곡가인 에드워드 저먼 경Sir Edward German이 지은 노래의 제목 덕분에 데븐 지방은 곧잘 ‘영광스럽다’는 형용사와 짝패를 이룬다. 숙소에서 내려다본 절벽은 영락없이 소설 <보물섬Treasure Island>에 등장하는 해적들의 소굴처럼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16세기 엘리자베스 1세 시절 필리페 2세가 이끄는 스페인 무적함대의 침공으로 영국의 국운이 풍전등화와 같았을 때 일개 해적에서 영국함대 부제독이 되어 참전했던 프란시스 드레이크Francis Drake가 데븐 출신이다. 데븐은 그 이름을 딴 햄과 크림으로도 유명하다. 우리는 홍차에 크림을 타 마시는 ‘데븐 크림 티Devon Cream Tea’를 한 잔씩 마시고 절벽 아래 바닷가로 산책을 했다.


창문 너머 파도 소리가 들리는 숙소에서 아내가 아기를 재우는 동안, 나는 서울의 친구에게 엽서를 한 장 썼다. 빅버리-온-시의 절벽을 상공에서 찍은 사진이 있는 엽서였다.


     愚下에게,


안녕하신가. 나는 無想無常 잘 지내는 편이다. 이번 3월 14일부터 열흘간 일정으로 유럽으로 수학여행을 간다.  브뤼셀, 본, 제네바, 스트라스부르그, 파리 등을 다니면서 국제기구 내지는 각국 정부 및 관련기관에서 강의와 세미나를 가진다.  관광으로서야 영양가가 적은 여행이지만, 배낭여행을 한답시고 관광지만 기웃거리고 오는 것에 비하자면 딱히 못할 것도 없지 않나 싶다. 이 여행에는 배우자를 동반할 수 없으므로 좀 미안한 기분도 죽일 겸, 핑계 김에 토요일 아침잠을 설쳐 무작정 집을 나섰다.  바다를 보러 가겠다는 생각 말고는 별다른 행선지가 없었는데, 남부 웨일즈로 갈까 콘월반도의 서단 토말리Land's End로 가볼까 하다가 데븐 지방의 빅버리-온-시라는 곳에 왔다. 웬만한 지도에는 표시도 안 되는 남해안의 작은 마을이다.


호텔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숙소는 민박집에 가까운 규모이지만 매우 정갈하다. 아마도 여행자가 시골에 와서도 쾌적한 숙박을 할 수 있을 때, 그 나라는 비로소 선진국이 되는 게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든다. 영국이 내놓을만한 몇 안 되는 화가중 하나인 터너William Turner가 이 숙소의 앞마당에서 그림을 즐겨 그리곤 했다는군. 외풍이 들고 날도 제법 쌀쌀해서 코끝이 시린 점을 빼면 숙소 선정은 잘 한 것 같다. 콘월이나 데븐의 남서부 해안지대는 해적들의 본거지였다는데, 창밖에는 막 넘어가려는 해가 절벽의 단면을 비추고 있다. 케이크를 잘라낸 것처럼 지괴地塊가 수직으로 잘려나간 절벽이 붉게 물들었다.


좀 아까 카메라를 메고 절벽을 따라 난 계단을 내려가 해 저무는 바닷가를 산책했다. 데븐에서는 일몰이 중요한 관광테마다. Glorious Devon - 이들이 데븐과 함께 즐겨 부르는 형용사도 물결에 비치는 일몰의 이미지에서 멀지 않다. 너와 함께 가보았던 안면도의 해변이 떠올랐다. 얕은 강물이 바다로 흘러들던데, 만조가 되면 모래사장이 아예 없어지는 모양인지 모래사장은 전부 젖어 있었다. 게나 고동이 있을까 두리번거리다가 절벽 가까이서 돌고래의 시체를 보았다. 난생 처음 보는 포유류의 주검에서 풍기던 낯선 냄새가 안면도 주변을 떠돌던 나의 상념을 순식간에 물 설은 대서양의 갯벌로 되끌고 왔지. 눈이 없어진 돌고래의 희끗희끗 벗겨진 피부를 보면서 삼문벼랑에 파도가 친다던 황동규 시인의 풍장을 생각했다. 데븐은 크림과 치즈 같은 유제품이 유명하다. 크림을 타 넣은 차를 한잔 앞에 두고 짧은 안부를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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