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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p (2009)

posted Dec 29,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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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은 업이다

스스로를 인용하자니 좀 민망하지만, 나는 내 첫 책 <영화관의 외교관>에 이런 글을 썼던 적이 있다.

   ‘home’이라는 영어 단어에 딱 맞아 떨어지는 우리말은 없습니다. 경우에 따라, ‘home’은 ‘가정’이나 ‘근거지’라는 추상명사도 되고, ‘집’이라는 보통명사도 되죠. 이 말은 역으로, 우리의 ‘가정’에 꼭 들어맞는 영어단어가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우리말에서 ‘가족’(사람)과 ‘집’(장소)의 중간쯤 자리 잡은 ‘가정’은 장소보다는 관계에 치우친 단어입니다. 반면에, 영어에서 ‘family’(사람)과 ‘house’(장소)의 사이에 존재하는 ‘home’이라는 단어는 인간관계보다는 장소가 구현하고 있는 구체성을 더 많이 담고 있습니다. 서구인들에게는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장소에 담긴 뜻이 중요한 모양입니다. 서구적 정신의 요체는 합리성이라고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요소는 공간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는 내항성(耐航性, navigability) 같은 것일지도 모릅니다. 서양에서 작도법이 더 빠르게 발전한 비밀의 근원도 거기 있는 건 혹시 아닐까요? 그런 탓인지, 서구 영화들 중에는 특정한 공간, 장소가 체화하는 의미를 소재로 삼은 것들이 많습니다. <Holiday Inn>, <New York, New York>, <Sunset Boulevard>, <Howard's End>, <Waterloo Bridge>, <On Golden Pond> 같은 영화에서 장소는 주연 배우들과 거의 맞먹는 비중을 가진 주인공들입니다. <미워도 다시 한번>에서 <친구>에 이르기까지, 우리 영화들은 대체로 관계지향적입니다. 장소를 제목으로 삼은 <길소뜸>이나 <강원도의 힘> 같은 영화의 초점도 인간관계에 맺혀있죠. (영화관의 외교관, p48-49)

장소, 또는 물건으로서의 ‘home’이 서양인들에게 과연 어떤 감정적 매개물이 되는지 직설적으로 보여준 영화가 있다. 픽사(Pixar Animation Studios)의 2009년 장편 애니메이션 <Up>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주인공 칼 프레드릭슨이라는 내성적인 소년이 등장한다.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영웅을 동경하던 그는 자신과 같은 취미를 가진 소녀 엘리를 만난다. 칼과 엘리가 비슷한 점이라고는 마음속 깊이 모험을 동경한다는 점밖에 없다. 묻는 말에 뭐라고 대꾸도 제대로 못하는 칼과는 달리, 엘리는 씩씩하고 괄괄한 말괄량이 소녀이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언젠가 함께 남미 정글 속의 '파라다이스 폭포'를 찾아 떠나자고 약속한다. 영화속 세월이 갑자기 속도를 낸다. 두 사람은 함께 자라고, 사귀고, 결혼한다. 엘리가 의사로부터 아기를 낳을 수 없다는 진단을 받고 낙담한다. 그래도 둘은 사이좋게 늙어간다. 엘리가 병에 걸린다. 결국 그녀는 먼저 세상을 떠난다. 영화의 첫 이십분 정도를 차지하는 이들 부부의 이야기는 애틋하고 아름답다. 눈물이 난다.

이제 주인공은 소년 '칼'이 아니라 고집쟁이 노인 ‘프레드릭슨씨’다. 하지만 관객들은 - 비록 순식간이었지만 -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는 그의 일생을 이미 공유한 터다. 그 덕에, 그는 <Grumpy Old Men>이나 <Dennis the Menace>에 나오는 심술쟁이 영감 월터 매도우처럼 보이기보다는 <The Old Man and the Sea>에 나오는 사연 많은 노인 스펜서 트레이시를 닮아 보인다. 그는 재개발 업체의 끈질긴 회유와 압력에도 불구하고, 엘리와 함께 살던 낡은 집을 팔지 않는다. 그 집은 소년 칼이 소녀 엘리를 처음 만났던 장소였고, 둘의 데이트 장소였으며, 신혼시절의 첫 집이자, 아내를 떠나보낸 집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 집은 그에게 자신의 아내 엘리를, 그녀와의 사랑을, 그녀와 함께 나눈 청춘을 상징한다.

어느날 건설업자들이 집을 비우라는 법원의 명령서를 가지고 들이닥친다. 그는 집을 순순히 내주느니, 차라리 집을 가지고 떠나는 쪽을 택한다. 어떻게? 그건 영화를 보시면 알 일이다. 스포일러를 삼가야 할 테지만, 영화의 중반부, 프레드릭슨이 집을 등에 걸머지고 다니는 장면에서 나는 허를 찔린 것처럼 가슴이 저렸다. 우리는 우리의 사랑을 업보처럼 등에 지고 사는 것이다! 노년의 칼 프레드릭슨이 내내 등에 지고 살았던 것은 젊은 날의 약속도 지키지 못한 채 사랑하는 아내를 먼저 떠나보낸 미안함이었을 것이다. 언제나, 죽음은 살아남은 자들이 견뎌내야 하는 그 무엇이다.

영화 <Up>은 진정한 의미에서 가족 드라마라고 여겨진다. 어린이들도 무척 즐겁게 보지만, 아이들이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원숙한 사랑의 애틋함도 담고 있으니까. 마음을 꼭꼭 닫아걸고 세상을 마냥 원망하는 것처럼만 보이던 프레드릭슨이 자기 사랑의 카르마(karma)를 벗어버렸을 때, 그의 사랑은 잊혀지거나 버려지기는 커녕, 오히려 완성된 것처럼 보인다. 그의 어깨를 떠난 그의 집은 언제까지나 낙원의 폭포를 굽어보고 있을 게다. 휘유 - 당신은 어떤 사랑의 업을 등짐처럼 짊어지고 계시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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