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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arching for Debra Winger (2002)

posted Dec 02,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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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일하는 여자의 고충이다
- Searching for Debra Winger (2002)

내 어머니는 칠순을 목전에 둔 지금도 직장에 다니고 계신다. 어머니는 삼십대 후반부터 당신의 대학전공인 영문학과 상관도 없는 장사 일을 전전하며 생활전선에서 뛰셔야 했다. 우리 삼형제는 빨리 커서 어머니를 좀 편히 쉬실 수 있도록 만들어 드리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자랐다. 아들들이 더디 자라는 사이에, 어머니께서는 일거리가 있는 편이 도리어 노년의 활력이 되어주는 측면도 있는, 그런 연세가 되어버리셨다. 어느덧.

어머니는 살림에도 필사적으로 임하셨다. 그러나 부엌일을 등진 남자 넷을 둔 집안은 항상 어딘가 좀 어지럽고, 허전하고, 임시변통이었다. 아들들에게 요리나 설거지, 청소나 빨래 따위를 좀 시켰어도 괜찮았겠건만, 어머니는 우리가 그런 일 하는 걸 그다지 반기지 않으셨다. 돌이켜 보면, 그래서 어머니가 필사적이었다는 느낌이 더 드나보다. 아마 살림만 사는 주부였다면, 되려 거리낌 없이 아들들에게도 그런 일을 시켰으리라.

어린 시절에, 나는 엄마가 밖에서 일하는 게 싫었다. 내가 싫었던 건 '다소 어지럽고 허전하고 임시변통인 집안풍경'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학교에서 돌아와 빈 집에 들어가는 게 싫었다. 다른 식구들이 있더라도, 엄마가 없는 집은 빈집이었다. 고단한 바깥일을 마치고 어머니가 귀가할 때까지, 집안의 분위기는 온기가 다 빠진 구들장 비슷했다. 우리 형제들은 의좋은 편이지만, 우리끼리 있을 땐 - 남자들이 항용 그러듯이 - 용건을 중심으로 대화했다. 술에 비유하자면, 단맛이 없는 드라이 진 같았달까.

29세의 나이로 요절한 시인 기형도는 나의 대학써클 선배다. 같은 과 선배이기도 했다. 그는 타고난 가수이기도 해서, 그가 부르던 '일편단심 민들레'는 듣는 이의 가슴을 뒤흔드는 힘이 있었다. 그의 시들은 다 그의 노래처럼 힘차고, 슬프고, 좋다. 그 중에서도 내 마음에 가장 예리한 칼날을 찔러 넣었던 시가 <엄마 걱정>이다. 나는 기형도 선배만큼 가난한 유년을 겪지도 않았고, 내 어머니가 열무 장사를 하셨던 것도 아니지만, 일하는 엄마의 귀가를 기다리는 아이의 정체 모를 불안감을 이처럼 강렬하게 드러낸 다른 작품을 나는 알지 못한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나는 전업주부와 결혼하고 싶었다. 내 아내가 일을 하는 건 상관없었지만, 내 아이들의 엄마는 집에 있었으면 했다. 대학교 1학년 여름, 아내를 소개팅에서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졸업하면 꼭 직장을 가질 생각이냐?"는 질문부터 했었다. 아이를 가진 뒤 직장을 그만둔 아내는 십칠년째 전업주부다. 감사받지 못하는 그녀의 노동의 댓가로, 우리 집안은 어느 임지를 가건 풍족하고 화려하진 못해도 따뜻하고 깔끔하다. 내 기준으로 봐선 그렇다.

그런데 정작 아내는 자신이 전업주부라는 사실을 별로 행복하게 여기지 않는다. 어쩌다 사회생활 하는 친구라도 만나고 온 날이면 한숨소리도 더 커진다. 바야흐로 사춘기에 접어든 우리 아이들은 엄마가 늘상 집에 있으면서 사사건건 잔소리를 하는 걸 싫어한다. 관심이란, 본질적으로 속박이다. 내 어머니는 자식들을 간섭하지 않고 믿고 방임해 두셨다. 어머니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세 아들들이 되도록 그 믿음에 부응해 드리려고 애썼던 것도, 생계를 위해 일하시는 어머니에 대한 최소한의 보답이었다. 내 아이들은 집에서 살림만 사는 제 엄마보다, 세상 물정에도 밝고 용돈도 집어주는 할머니가 더 쿨하다고 생각하는 눈치다. 이 녀석들은 나중에 직장을 가진 여자를 아내감으로 찾고 다닐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 성실한 직장인과 좋은 아내, 훌륭한 엄마 역할을 다 하는 게 가능할까? 그럴 리가! 생리적으로 임신을 못하고 전통적으로 육아와 가사를 훨씬 적게 부담해온 남자들조차 좋은 직장인과 좋은 남편, 좋은 아빠 역할을 다 해내진 못한다. 기껏해야 그정도면 그럭저럭 애썼다는 평가를 받는 게 고작이지 않던가. 인류가 유성생식을 통한 체내수정 방식의 번식을 중단하지 않는 이상, 아이들에게 엄마의 역할은 아빠의 역할과는 비교할 수 없이 크다. 자연히, 일하는 엄마들이 받는 스트레스는 많고, 근본적인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보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앞섰고,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미국의 경우는 좀 나을까? 특히, 고소득이면서도 전문직과 자유직의 장점을 두루 갖춘 할리우드 여배우들이라면 손쉬운 해결책이 있지 않을까? 천만의 말씀. <Searching for Debra Winger>는 여배우 로잔나 아케트가 2002년에 만든 다큐멘타리 영화다. 이 영화는 짜임새도 엉성하고 날카로운 분석력도 없다. 대신, 여배우가 동료들과 수다를 떨면서 얻어낸 진솔함이 장점이다. 로잔나 아케트가 스물 여섯살로 '수잔'을 찾아 모험을 떠나면서(Desperately Seeking Susan, 1985) 촉망받는 신예로 각광을 받던 때로부터 어언 17년이 흐른 뒤, 그녀는 이젠 '데브라 윙거'를 찾아 여행하면서 일하는 중년 여자들의 고충이라는 현실을 보듬어 안을 만큼 나이를 먹은 거다.

그녀는 데브라 윙거가 훌쩍 은퇴해버린 데서 상처를 받았던 것 같다. 그런 선택이 피할 수 없는 운명인걸까? 일과 결혼생활을 다 잘 해낼 수는 없는 걸까? 이 영화를 통해 아케트는 이런 질문들을 동료 여배우들에게 던진다. 패트리샤 아케트(로잔나의 친동생이다), 엠마뉴엘 베아르, 로라 던, 제인 폰다, 우피 골드버그, 멜라니 그리피스, 대릴 한나, 셀마 하이옉, 홀리 헌터, 다이안 레인, 켈리 린치, 사만다 마티스, 줄리아 오몬드, 귀네스 팰트로, 바네사 레드그레이브, 테레사 러셀, 멕 라이언, 알리 쉬디, 샤론 스톤, 로빈 라이트 펜 등 쟁쟁한 중년 배우들이 여자로서 영화계에서 일하는 애로를 털어놓는다.

이들은 남성 제작자들의 구역질나는 성차별적 태도 따위를 깔깔대며 성토하기도 하지만, 역시 대화의 무게중심은 엄마역할과 일을 어떻게 병행하느냐에 관한 거다. 멕 라이언은 아이가 5살이 될 때까지 촬영장에 늘 데리고 다녔고, 아이가 학교에 들어간 이후로는 영화를 1년에 한편만 찍기로 타협했다. 로빈 라이트 펜(포레스트 검프의 연인 제니)는 일을 포기하고 육아에 전념키로 한 결정에 후회는 없지만 욕심나는 작품을 하지 못한 상실감은 든다고 고백한다. (즉, 후회가 없다는 건 진심이 아닌 거다.) 우피 골드버그는 일 때문에 자식과 메울 수 없는 간격을 만들었지만 "자기가 행복하지 못하면 어떻게 엄마 노릇을 해요?"라고 반문한다. 조베스 윌리엄즈는 “아이와 있을 때는 일에 소홀한 것 같아 스스로에게 죄책감이 들고, 일을 할 땐 애들에게 소홀한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고 말한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할리우드 여배우들도 자기 고충을 털어놓으면서, 잘 나가는 친구를 만나고 온 날의 내 아내만큼이나 갑갑한 표정들을 짓지 뭔가! 일하는 엄마들은 힘들다. 창조주가 선악과를 훔쳐 먹은 남자와 여자에게 각각 내린 형벌 두 가지를 다 짊어지고 나서는 셈이니 어찌 힘이 안 들랴. 그렇게 힘들어하는 여자들과 살아야 하니, 남자들도 안된 노릇이다. 전업주부들은 사회생활 하는 친구들 앞에서 자신을 초라하게 느끼지만, 유능한 직장여성들은 자녀를 살뜰하게 잘 키우고 있는 주부들을 보면 한없이 열등감을 느낀다고 한다. 나는 아내가 살림과 육아를 도맡아 주는 게 고맙고, 사회생활을 할 기회를 빼앗아 버린 것만 같아서 미안하다. 만일 우리가 맞벌이 부부였다면, 나는 아내가 생계를 함께 부담해 주는 것이 고맙고, 집에서 편안히 살림만 하면서 육아에 전념토록 만들어주지 못한 걸 미안해할지도 모른다.

일하는 엄마들을 위해 국가가 나서서 공립탁아시설을 확보하라는 주장도 자주 접하는데, 한국 엄마들 중 과연 몇 명이 공립탁아시설에 아이를 맡기면서 스스로 좋은 엄마노릇을 한다고 느낄지 의심스럽다. 여성들은 직장내에서의 성차별에 대해서 자주 분통을 터뜨리지만, 모든 차별이 다 나쁘다는 태도는 고지식하다. 우리 공동체의 모성을 보호하고 보전하자면 새로운 방향으로 양성에 대한 대우를 차별화하는 문화가 조성될 필요도 있기 때문이다. 정답은 없는 거다. 각자 똘똘하게 자기 취향에 맞는 직장과 배우자를 고르고, 마땅치 않을 때는 차선책, 차차선책을 힘겹게 찾아가는 길 외에는. 그리고 열심히 하는 만큼만이라도 두루 다 잘 되기를 기도하는 것 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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