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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엄의 다리

posted Jun 0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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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엄의 다리(1974, 이두용 감독 작)

어머니와 영화

 

    30년 전이니까 극장 이름을 잊었다고 해서 나무라지는 마시기를. 아홉 살 난 저는 여섯 살 난 아우와 함께 무술영화를 보러 종로에 갔었던 것입니다. ‘보러 갔다’기 보다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따라갔던 것이지요. 이두용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던 <죽엄의 다리>였습니다. 돌이켜 보면, 홍금보나 성룡이 충무로에서 한 수 배우던 시절이었고, 황정리가 홍콩에서 지금의 배용준이 무색할 정도의 천황대접을 받으면서 홍콩 최고 스타 왕우의 인사를 자리에 앉아서 받던 시절이었으니까, 객관적으로도 그 무렵 홍콩영화보다는 낫지 않았을까 짐작합니다. 하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으로 어땠었느냐는 등의 하찮은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이 <죽엄의 다리>는 당시 저의 아드레날린을 폭발적으로 분비시킨, 엄청나게 재미있는 영화였던 것입니다. 만약 제가 오늘 이 영화를 다시 보고 실망을 하더라도 그 사실을 바꿀 수는 없는 거죠. 당연하게스리, 줄거리는 ‘복수’였고, 주인공은 ‘억울한’ 사나이였습니다.


    아, 사나이들의, 사나이를 위한 그 영화의 기억. 그 독특한 문제해결방식. 세상에 모든 일이 그렇게 비장하고 멋있고 명료할 수 있다면. 악당들을 해치우고 뚜벅뚜벅 멋진 뒷모습을 보이며 사라질 수 있다면. 사실, 어린 아들들의 손을 잡고 ‘관람불가’ 영화를 보여주는 것은 우리 어머니와 그다지 어울리는 일이 아니긴 했습니다. 그 후로 저와 동생은 무술영화를 보러 가자고 끈덕지게 졸라보기도 했건만, 제가 극장에서 다시 권격영화를 접하기 위해서는 강산이 한 번 더 변해서 성룡이라는 불세출의 스타가 나타날 때를 기다려야만 했습니다. 저는 엄밀히 말해서 이소룡 세대에 끼지는 못했습니다. 화려했던 그의 전성기는 너무 짧기도 했고요.


    어머니를 따라가서 관람했던 문제의 영화의 주연은 한용철이라는 배우였습니다. 영화를 보고 와서 몇 달간 저와 동생은 잠자리채를 휘두르며 ‘한용철’ 흉내를 내며 놀았다죠. <죽엄의 다리>를 본 1년쯤 뒤 변웅전 아나운서의 <유쾌한 청백전>에 나와 무술시범을 보이던 한용철을 보고 마치 오래된 친구가 출연이라도 한 듯 반가워 날뛰던 게 그를 본 마지막 기억입니다. 2006년초 영화잡지에 실린 이두용 감독의 인터뷰를 봤더니, 영화 포스터에 ‘차리 셸’이라고 소개되었던 한용철은 재미교포 청년이었답니다. 영화 촬영당시 그는 빨간 띠에 불과했는데, 발차기 재주 하나는 일품이라서 캐스팅을 했다죠. (이두용 감독의 회고에 따르면, “한 3일 정도 수염 안 깎고 길러보니 나이도 제법 커버가 되더라”는군요.) 저와 제 동생 두 꼬맹이는 스무살 먹은 빨간 띠 청년의 발재간과 카메라의 마술에 완전히 속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게 어디 서운해 할 일이겠습니까? 우리는 속으려고 극장에 가는 것이 아니던가요. 어설픈 화면이나 구성으로 관객을 제대로 속여내지 못하는 영화를 보면서 우리는 혀를 차지 않던가요. 중학교 시절에 친구들과 어울려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용쟁호투>를 비데오로 보면서도 “니들이 한용철 영화를 봤어야 되는 건데”라며 객기를 부리던 기억을, 저는 따뜻하게 간직하고 있습니다. 제가 <취권>, <사형도수>를 보고 발길질을 하며 극장문을 나선 것도 벌써 오래전 일인데, 성룡은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습니다. 그는 저의 두 아이들의 영웅입니다. 특히 작은 녀석은 요즘도 Rush Hour 3를 보러 극장에 가지 않는다고 주말마다 투덜대고 있는 중이죠. 잘 알려진 대로, 성룡의 가장 큰 무기는 그의 성실함입니다. 태권도 7단으로 포장된 빨간 띠 차리 셸이 잠간 피었다가 사라진 반면, 대역을 쓰지 않고 노력하는 무술인 재키 찬이 수십년째 권격영화의 왕좌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걸로 정의는 구현된 거라고 봅니다만.


    어쨌든, 그 <유쾌한 청백전> 이후로는 동생과 저의 영웅이 어찌 되었는지 아는 사람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봉을 휘두르며 놀던 국민학교 저학년 어느 날, 집에 오신 어머니 친구분께서 ‘한용철이 누구길래...’ 하고 묻자 어머니 말씀이, “사내녀석들이 너무 얌전한 것 같아서 좀 씩씩해지라고 무술영화를 뵈주었더니 저렇게 법석이지 뭐니” 그러시더군요. 음, 그렇게 깊은 뜻이... 그래서 그때 극장 입구에서 아저씨가 ‘애들은 못 들어간다’고 하는데도 우리 어머니답지 않게 사정해서 기어코 입장하신 거였구나.


    이 대목에서 우리 어머니의 자녀교육 방식에 대해서 시비를 걸 사람도 있을 줄 압니다. 그렇지만 두 아이의 아버지가 된 지금, 저는 우리 형제에게 한용철을 소개해준 어머니의 마음이 손에 만져질 듯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저는 영화를 사랑합니다. 두 시간 남짓한 동안 다른 인생을 엿보고, 다른 사람이 되어보고, 다른 방식의 삶과 교감하는 것, 저에게는 그것이 영화보기입니다. 어머니와 함께 극장에 갔던 횟수는 많지 않습니다. 어머니가 영화이야기를 하시거나 영화를 권했던 적도 별로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 영화보기를 취미로 자리 잡아 준 사람이 있다면 어머니를 꼽아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가끔 TV에서 방영되던 아카데미상 시상식을 함께 보면서, “어휴, 저 배우가 저렇게 늙어버렸네. 무슨무슨 영화에서 그렇게 꽃같이 예뻤었는데. 슬프다, 얘.”하시던 어머니의 넋두리를, 어느새 제가 이어받아서 중얼거리고 있을 만큼이나 세월이 흘렀지만 말입니다.


     대학에 들어간 뒤, 제게는 영화 포스터를 닥치는 대로 집어오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극장에서 얻어오기도 하고, 벽에 붙은 것을 뜯어오기도 했죠. 그걸 제 방에다 붙이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사면을 채우고도 남아 천정과 바닥에도 도배질을 했었습니다. 왜 그런 짓을 했었냐고 물으신다면, 사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거기에 포스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고나 할까요. 이해할 수 있는 짓거리만 한다면 그게 어찌 젊음이겠나, 정도로 생각하시면 되겠습니다. 여기에 누구보다도 질색을 한 사람이 어머니셨지요. “너 그 지저분한 것 좀 치우지 못 하겠니!” 어머니는 성화를 하시면서도 제 방을 손수 깨끗하게 만드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 또래의 특권인 ‘한귀로 흘려버리기’ 초식으로 일관하고 있었죠. 그러기도 지쳐 이젠 별 의미도 없는 유치한 수집벽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할 즈음이었습니다. 마침 집에 놀러 와서 내 방을 구경하신 이모가 하신 말씀. “너 하는 짓이 어쩜 그렇게 너희 엄마 처녀적이랑 똑같니...”


이두용 감독 언론 인터뷰(2006.1)

<용호대련>의 주인공 한용철(차리 셸)은 미국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다.

오디션을 하고 재주꾼들을 많이 뽑았는데 딱히 주연감이 없었다. 황정리가 제일 잘하긴 했지만 외모가 주연과는 거리가 좀 멀었다. 그 때 파친코 대부라 알려져 있는 정덕진 사장과 좀 친분이 있었는데 그가 아는 사람을 소개해줬다. 미국에 있는 사람이었는데 1주일만에 한국으로 왔다. 그런데 나이가 스무 살 정도밖에 안 됐고 지금에서야 밝히지만 태권도 빨간 띠였다.(웃음) 만나자마자 인근 도장에 가서 발차기를 시켰는데 다리가 정말 긴 게 쭉쭉 뻗는 게 보기가 좋았다. 황홀할 정도였으니까. 한 3일 정도 수염 안 깎고 길러보니 나이도 제법 커버가 됐다. 그래서 처음 만든 게 <용호대련>이었다. 내가 정말 해보고 싶었던 게 발차기로 악당의 귀싸대기 팍팍 여러 번 때리는 거였는데(웃음) 근사하게 되더라고. 당시 마케팅에서 속임수를 써서 차리 셸이 빨간 띠가 아니라 태권도 7단이라고 속였는데 태권도의 고수가 영화에서 발로 악당의 귀싸대기 때린다고 소문이 나서 극장이 미어터졌다. 그렇게 같은 해에 <분노의 왼발>(1974), <죽엄의 다리>(1974) 등을 연달아 만들었다. 당시 신성일이 500만 원 정도 받을때 한용철은 은밀하게 2천만 원 정도까지 받게 될 정도였다. 지방에서 다들 입도선매로 사갔다. 그런데 다른 영화사에서 엄청 높은 개런티를 주고 한용철을 유혹해서 데리고 나갔는데 그 영화는 잘 안 됐다. 아무튼 그 뒤로 한용철과는 작품을 하지 않았고 강대희라는 배우를 발굴해서 <무장해제>(1975)를 찍었다.

70년대 중반에 당신이 발굴한 황정리는 홍콩으로 건너가 스타급 악역 배우로 맹활약했다.

본명이 황태수인데 홍콩에 가자마자 거의 천황 대접을 받았다. 지금으로 치자면 배용준 정도 될까? 아무튼 내가 미국에서 액션영화 찍는다고 한국에 없을 때 딱히 국내에서 할 일이 없었다. 그 때 홍콩의 오사원 감독이 그를 데려다 성룡과 함께 <사형도수>(1978)와 <취권>(1978)을 만든 거다. 오사원은 <무장해제>에서 황정리가 부채 가지고 하는 액션을 보고 완전히 반해 있었다. 강대위, 진성, 왕우 등 홍콩에는 전통적으로 황정리만큼 발차기가 현란한 액션 배우들이 없어서 완전히 다른 대접을 받았다. 나중에 양자경에게 발차기를 가르쳐준 사람도 그였으니까. 그 때 홍콩은 같은 세트 안에서 서로 다른 10편의 영화가 촬영될 정도로 무술영화를 많이 만들 때니까 그 인기가 엄청 났다. 한번은 황정리가 대만에서 촬영을 하고 있는데 다른 영화 제작자가 그를 캐스팅하려고 트럭에 현금 무더기를 통째로 싣고 오기도 했다. 황정리의 아내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웃음) 주인공은 바꿔도 늘 악역은 황정리를 쓰고 싶어 했다. 한 번은 홍콩 페닌슐라 호텔 커피숍에서 황정리와 함께 있는데 저기 다른 자리에 있던 홍콩 최고 스타 왕우가 직접 인사를 청하러 걸어왔었다. 그런데 황정리가 앉아서 인사를 받더라고. 그 정도로 인기가 많았지. 그런데 황정리는 주연이 되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컸다. 난 다리에 힘이 없어질 때까지 액션배우를 하라고 했는데 ‘주연병’이 좀 있었다. 그런데 홍콩에서는 그게 안 되고 한국에 와서 제작, 감독, 주연을 해서 영화를 만들었는데 잘 안 됐다. 아쉬운 일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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